2015년 11월 20일. 아주 조금씩 / 독립문

2015년 11월 20일.

 

 

[오늘의 음악] 아주 조금씩

 

세상이 뒤로 역행하는 느낌이다. 솔직히 말하면 요즘 기분이 대단히 처참하다. 물대포로 사람을 죽이려 드는 경찰, 구급차 안으로 조준되는 물대포, 그저 지나가는 사람에게 쏘는 캡사이신, 그리고 남는 것은 ‘폭력 시위’ 어쩌고 하는 언론플레이. 세상이 뒤로만 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는 와중에, 어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선거 소식을 들었다. 투표율이 50%를 넘어서 선거가 성사됐단다. 사실 투표율이 50%에 미치지 못해 연장선거가 치러지거나 선거가 무산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뉴스거리다. 투표 무산 없이 11월 선거가 성사된 것이 5년만이란다.

거기에 이번에는 연장선거도 없었다. 이건 18년만이라고 한다. 이번 투표율이 18년 만에 최고의 투표율이라고 한다. 모든 단과대학의 학생회 선거도 연장선거 없이 단숨에 50%를 넘어 선거가 성사됐다고 한다. 이런 전례는 얼마나 올라가야 찾을 수 있는지, 바깥에서는 듣기 힘든 수준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신드롬 수준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거기에,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 후보로 나온 김보미 당선인은 선거운동 과정에서 스스로 레즈비언이라고 커밍아웃을 했다는 소식까지 들었다. 당일 교문 앞에서는 동성애에 반대하는 1인 시위가 있었다는 트윗도 봤고, 서울대학교를 ‘퍽킹대학교’라고 부르는 놀라운 개드립도 있었으나 서울대학교는 김보미 후보를 총학생회장으로 당선시켰다. 그것도 18년 만에 최고의 투표율로.

이제 몇 달 지난 일이 됐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동성결혼을 합법화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미국은 이전에도 몇몇 주에서는 동성결혼을 합법화하고 있었지만, 미국 전역에서 동성결혼을 합법화해야 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얼마 전부터 일본 도쿄 도 신주쿠 구에서는 동성 커플에게 증명서 발급을 시작했다. 이 증명서는 실제적인 결혼으로 인정되지는 않지만, 결혼과 같은 효력을 지닐 수 있다. 이 증명서가 있으면, 병원 수술시 보호자 서명 등 배우자로서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다.

세계가 극우의 물결로 흘러가고 있다. IS 테러와, 그 테러를 진압하겠다는 쪽 모두가 과격하기 그지없는 경우가 많다. IS를 명확히 단죄하면서도 모든 무슬림을 적으로 몰지는 말자는 상식적인 이야기는 과격한 담론 속에서 묻혀 사라진다. 꼭 파리 테러에 관련된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세상은 아주 조금씩 발전하고 있더라. 우리가 아는 사이든 모르는 사이든, 2015년은 그 숫자의 미래적 조합에 걸맞게 성장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 서울대학교의 선거 결과 브리핑 덕분에 절망에서 조금은 깨어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조금은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제 조금은 여유를 가져도 될까. 아주 조금씩 세상이 발전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 같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세상을 향한 시선을 거둘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의 음악, 福山雅治(후쿠야마 마사하루)의 ‘虹’와 비스트의 ‘무지개’로 골랐다. 후쿠야마 마사하루의 곡을 비스트가 번안했다. 무지개를 쫓는 것 같이 느껴지는 삶 속에도, 오늘은 성과를 거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오늘의 역사] 독립문

 

1897년 11월 20일, 독립문이 완공되었다.

처음 한국과 중국 사이의 조공 관계가 만들어진 것은 신라시대로 기록된다. 신라시대 당나라와 조공 무역을 시작한 것을 계기로, 고려시대 송ㆍ원과의 관계를 거쳐 조선시대 명ㆍ청과의 관계까지 한국과 중국의 무역 관계는 끊긴 적이 대단히 드물 정도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명에서 오는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서대문 근처에 ‘영은문’이라는 문을 건립했다. 그리고 근처에는 ‘모화관’이라는 건물을 지어 사신을 맞이하는 행사를 이 주변에서 치렀다. ‘영은’은 ‘은혜를 입는다’는 뜻이고, ‘모화’는 ‘중국을 흠모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전형적인 사대관계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조선과 중국의 사대관계와 조공무역을 단순히 주종 관계로 대입할 수는 없다. 물론 사상적으로 조선 후기의 사상가들이 자주성을 상실한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당대에도 비주류로 실학자들은 남아 있었다. 또한 조공무역은 동아시아라는 지역에서 벌어진 특수한 형태의 무역이라고 보는 게 옳으며, 중국은 중심으로 군림하는 대신 공물을 내려주고 변방국은 정통성을 인정받고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조선 민중들 사이에는 청나라에 대한 반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거기에 예전부터 발해나 고려, 조선에 정복당하거나 예속되어 있던 여진족이 조선에 군림하려 하자 반청 감정은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여기에 청나라가 유럽 열강과의 전쟁에서 패하는 등의 사건이 벌어지자 조선 내에서도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선언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하게 나타났다. 청나라로부터 조선이 독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1890년대, 독립협회를 이끌고 있던 독립문은 영은문과 모화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과 독립관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재필은 프랑스 개선문의 이미지를 참조해 직접 독립문의 모양새를 스케치했다.

이후 더욱 적극적으로 독립문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빗발쳤다. 결국 고종이 이를 윤허했고, 영은문 앞쪽에 독립문을 세우기로 결정되었다. 1895년부터 서재필은 독립문 건립을 위한 백성들의 성금 모금을 시작했다.

성금 모금은 성공적이었고, 이내 독립문을 건설할 수 있을 정도의 자금이 모였다. 서재필은 자신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러시아 건축가를 영입해 공사 계획에 들어갔다.

 

독립문 기공식 초청장

▲ 독립문 기공식 초청장.

 

공사가 시작된 것은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청과 일본이 조선이 독립국임을 확실히 명시한 뒤에 시작되었다. 공사가 시작되고 완공까지는 1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1896년에 시작된 공사는 1897년 11월 20일에 완공되었다.

높이는 14.28m, 폭은 11.48m. 1,850여개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판은 양쪽에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고 새겼다. 현판은 ‘김가진’이라는 사람이 썼는데, 일제 처음에는 친일 활동을 하다 이후 독립운동으로 방향을 튼 사람이다. 현판 바로 아래에는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이 새겨졌다.

앞쪽에 있던 영은문은 헐렸지만 아래쪽 기둥 부분 두 개는 헐리지 않고 지금까지 잔해로 남아 있다. 독립문 기공식 때는 고종을 비롯한 황족과 고관들이 대거 참여했고, 삼전도와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굴욕을 이제야 떨쳤다며 상당히 기뻐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독립문

▲ 현대의 독립문 모습. 앞의 기둥 두 개는 헐리지 않은 영은문 기둥이다.

 

독립문은 이후에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1979년 성산대로 공사를 하면서 본래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70m정도 이전했다고 한다. 이후에는 이동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독립문은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며 지은 상징적 건축물이다. 그리고 독립문은 그 자리에서 일제에의 예속을 맞았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서대문형무소에는 독립 운동가들이 수감 당했다. 한참이나 지난 뒤 독립문은 다시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맞았고.

독립문이 세워진 지 이제 100년이 넘게 흘렀다. 하지만 우리는 진정으로 외세에 대해 독립해 있는가. 주한미군이 한반도에 들어와 범죄를 저질러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전시작전통제권조차 가지고 있지 못하고, 여전히 일본과 역사 문제로 휘둘리고, 제대로 된 외교 하나 하지 못하는 이 나라는, 진정으로 외세에 대해 독립해 있는가.

독립문이 세워진 오늘, 우리의 독립에 대해 떠올려볼 때인지도 모른다.

 

 

※ 이 글의 참조문헌과 사진의 출처는 widerstand365.tistory.com/821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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