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혐을 극혐하다

 

난 “극혐”이라는 표현을 지극히 혐오한다. 극혐이라는 말 자체가 극단적으로 혐오한다는 뜻이니까, 결과적으로 난 극혐을 극혐한다는 얘기.

하지만 극혐이라는 말은 이미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온 사방에서 너무나 많이 사용되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만, 그게 과연 합당한 표현인지는 한 번 정도는 생각해 봤으면 싶어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다.

왜 그런지 이야기를 풀어 보기로 하자.

혐오

혐오의 사전적 의미는 싫어하고 미워한다는 것이다. 싫음과 미움은 감정이지 논리가 아니다. 물론 논리적인 관점에서 어떤 부당한 일을 자주 하거나 나에게 피해를 끼친 주체에 대해 혐오의 감정을 가지게 되는 경우도 있다. 연쇄살인범을 혐오하게 되는 경우 같은 것이다. 이런 것은 혐오의 원인을 다시 논리적으로 따져볼 필요가 있는 경우이겠지만 어디까지나 과정의 문제고 결과적으로 혐오하게 되었다면 그건 이미 논리를 떠나 감정의 문제로 전이한 상태라는 것이다.

대체로 혐오는 무지에서 기인한다. 예를 들어 뱀의 경우를 보자. 뱀은 별다른 이유없이 다수의 사람들이 혐오하는 동물의 일종이다. 물론 독을 가진 뱀의 경우 실제로 만났을 때 서둘러 회피하는 것이 생존에 도움이 되는 일이긴 하다. 다수가 가지는 뱀에 대한 혐오가 그 현실적인 위험에서 초래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경우도 있긴 하다. 그러나 독이 없는 뱀도 다수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고, 인체에 거의 위해를 가하지 못하는 뱀들도 있다. 뱀과 유사하게 혐오의 대상이 되는 지렁이도 있다. 심지어 지렁이는 인류에게 매우 유용한 동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 개체들의 뱀에 대한 혐오는 그런 점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저 싫은 것이다. 성경적인 내용으로 뱀에 대한 원초적 혐오를 설명하는 경우에 대해선 논하지 말고 그냥 무시하기로 하자.

성적소수자를 혐오하는 경우를 보자. 말 그대로 성적소수자는 혐오의 대상이 절대 아니다. 하지만 다수가 그런 인과관계 없이 그저 혐오하는 경우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왜 혐오하는가를 물으면 인간의 자연적 본성이 어떻고 하는 비논리적인 변명을 늘어놓기 일쑤다. 거기에 남성동성애를 에이즈 감염의 경로니 하면서 비난하는 경우는 완벽하게 무지에 의존한 혐오, 아니 그 이전에 혐오를 정당화 시키기 위해 억지로 끌어온 무지의 경우가 된다. 그러나 그 혐오는 그야말로 인과관계 없는 혐오의 감정일 뿐이다. 그러나 실제로 아주 많이 존재하는 혐오의 감정이다.

이런 무지에 기인한 혐오들은 그리 쉽진 않지만 인과관계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으로 어지간히 거둘 수 있다. 물론 무지에 의한 혐오를 일삼는 사람들이 그런 합리적인 설명을 쉽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혐오를 철회하는 경우가 그리 흔하진 않지만 가능하긴 한 경우라는 얘기이다.

또 다른 축의 혐오는 호불호의 감정이다. 흔히 말하는 취향이다. 아주 자연스러우면서도 매우 위험한 경우가 되는 혐오의 감정이다. 난 개인적으로 어린이 흉내를 내는 어른을 매우 혐오한다. 미성숙의 상징이라고 느끼는 것 같다.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어린이 흉내를 내고 있는 사람 앞에서 난 당신을 혐오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 혼자만의 감정일 뿐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 행동을 재미있다고 느낄 수도 있고, 또 내가 그 감정을 표현했을 때 그 사람이 입게 될 상처가 미안하다는 것이 이유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감정을 너무 쉽게 표출한다. “극혐”이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주로 그 대상은 일반적이지 않은 외모나 행동이다. 자신에게 호감을 주지 못하는 경우 너무 쉽게 혐오를 해 버리고, 심지어는 별로 혐오하지도 않으면서 “극혐”이라고 표현을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 대상이 피부의 색이나 성별, 국적, 보유한 재산의 양, 출신 지역이나 출신 학교의 문제로 퍼져 나간다면 이는 “혐오발언”으로 분류되어 사회적으로 부도덕한 발언이 될 수도 있는데 그런 문제를 따지기 이전에 너무 쉽게 그 선을 넘어 버린다.

정리하자면 혐오는 감정이다. 그리고 그 혐오의 감정 중 상당수는 별다른 인과관계가 없는 혐오에 불과하며, 그 중 상당수는 무지에서 기인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내가 어떤 대상에 대한 혐오의 감정을 느낄 때, 과연 이 혐오는 어디에서 기인한 혐오인지를 적어도 한 번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 생각의 결과에 따라 내가 가진 혐오가 근거가 없거나 무지에서 기인했다면, 감정적으로 조건반사적으로 느껴지는 혐오라 할 지라도 내 안에서 억제하고자 노력할 필요가 있다.

특히나 그 혐오가 나와 동일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 타인을 대상으로 할 때에는 더욱 더 심각하게 그 혐오의 감정을 억제할 필요가 있다. 왜냐면 타인을 대상으로 혐오를 표출하는 것은 내 자신을 위험에 빠트리는 행위가 될 수도 있는 “공격적인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혐오의 표출

대체로 혐오를 느끼면 혐오를 표출하게 된다. 혐오의 표출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까?

뱀을 만나 비명을 지르며 혐오를 표출하면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 뱀을 피하라는 경고로 작용하게 되는 효과가 있다. 물론 동물원 유리창 안에 갖혀있는 뱀의 경우에는 그런 혐오의 표출은 경고의 효과는 전혀 없고 내가 뱀을 엄청 싫어하고 무서워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주변인들에게 노출시킬 뿐이다.

내가 만약 성적소수자들에 대한 혐오를 공개적으로 표출한다면 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문명인이 되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제는 거의 없어졌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성적소수자에 대한 감정적 혐오를 느끼던 시절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아마도 무지와 생소함이 원인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난 그 혐오를 느끼는 것 자체가 옳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비록 머리로는 깨닫고 감정으로는 혐오감이 남아 있더라도 절대 그걸 남들 앞에서 표출하면 안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혐오를 제거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표출은 하면 안된다는 것을 아는 최소한의 야만을 벗어난 문명인이 되고자 했다는 뜻이다.

이 자리를 빌어 내가 그런 점을 깨닫게 도와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어린이들의 경우에는 혐오의 표출은 부모를 향한 도움의 요청으로 작용한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가 혐오하는 대상을 제거해 주기 위해 노력하곤 한다. 그게 합리적인 혐오인지를 따지지 않고 말이다. 그러나 부모들도 제거해 줄 수 없는 혐오가 있다. 부당하고 비합리적 혐오인 경우나, 그 혐오의 대상이 자녀에게 필요한 경우 말이다.

난 어려서 미역을 무척 싫어했다. 미끈거리는 질감이 너무 불쾌하고 잘 씹어지지도 않으며 이상한 냄새가 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난 미역국만 보면 밥을 못 먹고 도망다니곤 했다. 미역국을 먹어야 된다고 강요하는 아버지가 너무 싫었고 결국 울음을 터트린 적도 있다. 난 부당하게 미역국을 혐오했으나 내 건강에 미역국이 필수적이었다고 판단한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강제로 미역국을 먹였다. 난 내가 혐오하는 미역국을 먹을 수 밖에 없어서 너무 슬프긴 했지만 지나고 보니 그런 바보같은 짓이 또 어디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지금도 미역국을 싫어한다면 조용히 안 먹으면 된다. (사실은 무척이나 좋아하게 되었다.) 거기다가 내가 만약 아무 이유없이 미역을 혐오한다 하더라도 그게 미역국을 파는 식당의 문을 닫게 만드는 행위로 표출되면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 종류의 혐오를 표출하는 것은 야만이다. 정당한 근거가 없고 인과관계가 없는 혐오를 표출하고 그 혐오의 대상을 사회적으로 무력화시키기 위해 행동하는 것은 대표적인 현대사회의 야만의 일종이다. 여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취향, 즉 호불호 관련한 혐오를 표출하는 것 역시 거의 비슷하다. 난 파란색이 좋고 초록색은 질색이지, 라는 얘기 정도는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저 초록색 옷을 입고 나온 탤런트는 극혐이다 라고 말하는 순간 위험해진다. 그 탤런트가 어떤 사람은 좋아할 수도 있는 초록색의 옷을 입고 나왔다는 것은 내가 그 탤런트를 혐오하는 것의 원인이 되기에는 합리성이 부족하다. 따라서 원인은 사라지고 혐오만 남게 된다. 그리고 그 혐오는 아마도 해당 탤런트의 팬클럽에 속한 다수에게 역공격의 대상이 될 것이다.

, 혐오의 표출은 이미 나만이 알 수 있는 내 안의 감정의 흐름에 대한 문제에서 벗어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행동”의 단계로 올라가게 되는 일이며, 이는 혐오 그 자체보다 훨씬 더 위험한 야만적 행동에 다가가게 되는 현상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정당한 표출, 부당한 표출

그렇다고 어떤 사안이나 그 일을 행하는 주체, 즉 인간에 대한 혐오와 혐오의 표출, 즉 비난을 멈출 수는 없다. 그걸 멈추는 순간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그 어떤 잘못된 일도 바로잡을 수 없기 때문이며, 그 어떤 범죄도 단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표출을 해야 할까? 답은 아주 단순하다. 정당한 원인을 설명하면 된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 근거없는 혐오나 취향, 호불호는 인정되어서는 안된다.

어떤 사람을 혐오하는 경우, 그냥 아무 이유없이 싫은 경우라면 표출하지 않는게 좋다. 그건 이유없는 공격이기 때문이다. 이유없는 공격은 야만이다. 현대사회에서 햇빛이 너무 따가와 살인을 하면 안된다. 그런 행동은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린다. 현대 사회에서는 야만적인 행동, 즉 이유없는 공격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상대로 하여금 나를 법적으로 고소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리는 바보짓이다.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를 설명하고 사람들을 설득하여 동의를 구해서 실제로 그 혐오를 제거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야 한다.

어떤 연예인이 성차별이나 지역차별 발언을 했다. 그런 경우라면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설득과 동의의 과정을 거쳐 해당 연예인이 그런 발언을 다시 하지 못하도록, 사과와 재발방지의 약속을 받아내는 것이 옳다. 이런 것은 정당한 이유가 있는 혐오이며, 그 혐오를 표출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 옳은, 정당한 혐오의 표출에 해당한다.

그러나 어떤 연예인이 깐족거려서 보기 싫다면, 그냥 안보는게 맞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깐족거림이 유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그 깐족거림을 혐오하는 사람의 숫자가 많다는 것은 절대 정당한 근거가 아니다. 취향투표로는 아무도 처벌되어서는 안된다. 소수자의 취향이 억압될 수 있는 근거는 지극히 제한될 뿐이다. 예를 들어 그 소수적 취향으로 누군가가 다치게 된다면 억압해도 될 것이다.

어떤 정치인을 혐오하기 위해서는 더욱 더 정당한 이유가 필요하다. 어떤 정치인을 사랑하기 위해서도 이유가 필요한 것과 비슷하다. 이유없는 혐오와 이유없는 사랑은 취향으로 분류될 수 밖에 없으며 그건 정치적인 의견이 아니다.

정치적인 의견이 아닌 것을 정치판에서 정치인을 상대로 표출하는 것은 바보짓에 불과하다.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에 대해서는 지지의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족하며 나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인류애적 사랑이나 종교적 신앙을 고백할 이유는 없다. 내가 반대하는 정치인을 반대하는 이유 역시 그 이유를 설명하는것으로 족하며 증오할 이유는 없다.

물론 어디까지나 당신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일까지 왈가왈부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마음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관계없이 그 감정을 외부로 표출할 때를 간섭할 뿐이다. 사회적 문제라는 의미이다.

혐오의 감정이건 사랑의 감정이건 외부로, 사회적으로 표출할 때에는 그 정당성 여부를 가려야 한다는 것이며, 그 정당성 여부는 오로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이유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 결론이다.

극혐을 극혐하는 이유

거의 대부분 설명이 되었다. 내가 요즘 많이 쓰이는 “극혐”이라는 표현을 극혐하는 이유는 그 표현이 사용되는 경우의 상당수가 아무런 합당한 이유를 동반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저 나의 증오를 표출할 뿐이다. 이런 것은 잘못된, 부당한 표출이다.

통계적으로 확인해 보지는 못했지만, 최근 들어 “극혐”이라는 표현이 더욱 많이 쓰이는 것, 그저 “난 쟤가 싫어” 라는 표현이 더욱 강화되어 “난 쟤 극혐이야” 라는 표현이 일반화 된 것처럼 보이는 이 현상의 바닥에는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스트레스 지수의 상승이 가장 중요하게 깔려 있다는 추측을 하고 있다.

, 현실에서의 고통과 억압으로 인해 누적된 스트레스가 이유없는 혐오를 증가시키고 나아가 그 혐오를 사회적으로 표출하도록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즉 스트레스에 짓눌려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단말마의 비명으로 들린다.

그러나 현실적이면서도 불행한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스트레스는 남에게 전파한다고 해서 해소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스트레스를 남에게 전파하는 순간 그 스트레스는 더욱 더 많은 개인들의 스트레스로 자리잡게 된다. 즉 스트레스의 총량이 늘어난다는 얘기이다. 그 늘어난 스트레스는 또 다른 곳에서 나에게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결국 제발등찍기에 불과한 일이 되어 버린다.

가급적 스트레스를 날것 그대로 남에게 전파하지 말았으면 한다. 자신의 스트레스는 씹어 삼키고 오히려 더 근본적으로 나에게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원인이 뭔지를 차근 차근 생각해 본 다음, 그 스트레스의 원인을 아예 뿌리채 뽑아 없애 버릴 방법은 뭔지 확인해 보고, 단계적으로 그 원인 자체를 제거하기 위한 노력에 나서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인 일이다.

그리고 그 합리적인 노력을 기울이기에 가장 좋은 곳, 원래 그런 일을 하라고 만들어 놓은 곳이 정치판이다.

조용히, 대신 집중력 있게 과연 누가 나의 스트레스의 원인을 제거해 줄 수 있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어떤 정치인이 내가 생각하는 문제점을 해결해 줄 수 있는가를 눈여겨 살펴보고, 그런 정치인을 지지하고 보다 큰 권력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것.

이것이 내가 여태껏 발견한 내 스트레스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그 얘기를 한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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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thoughts on “극혐을 극혐하다

    1. 인류가 역사를 기록한 이래 동성애 관련 기록은 꾸준히 있어 왔고, 심지어 동물들 사이에서도 동성애는 그리 어렵지 않게 발견됩니다. 동성애를 혐오하는 것이 자연적 본성이 아니라 동성애 자체가 자연적 본성에 포함되죠.

    2. 일단 하나, 자연적 본성에 어긋나다면 유구한 인류의 역사를 거치며 도태되어 없어졌겠죠.
      그리고 둘, 자연적 본성 운운하기엔 이미 인간은 본능보다 이성, 그리고 그 이성이 낳은 문화를 향유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물론 보노보 같은 유인원도 자손을 생산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 섹스 그 자체를 목적으로 행하고 있죠. 이성과 나누는 쾌락을 위한 섹스는 괜찮고 동성과 나누는건 괜찮지 않다?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1. 물뚝심송님 근황이 궁금해서 와 봤습니다. 기획하신다는 것은 잘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해서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물뚝심송님 글을 계속 읽어온 사람들은, 마지막 결론 부분이 어떤 말을 전달하려는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헌데, 물뚝님 글 처음 읽는 사람이라면 놀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내 스트레스를 감소시키기 위해서 빨갱이를 색출하고 제거하는 것이다”라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는 겁니다.

    뿌리채 뽑아라는 말을 “근원부터 정화시킨다”정도면 조금 부드럽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이것도 좀 마땅한 표현은 아니지만, 근데 저도 물뚝심송님 표현이 맘에 더 들어 그런 표현을 저도 사용하기는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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