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한기 생활정보: 온수가 안나올때

요 몇년간 겨울이 좀 따뜻했다가 다시 추워지고 있다. 나같은 옥탑방 백수 글쟁이는 한해 겨울이 얼마나 추운지를 느끼는 기준이 보일러 온수관이 얼었는지 안얼었는지로 판단한다. 작년, 재작년은 분명 안얼었는데, 올해는 한방에 얼어버렸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해가 중천에 뜬 대낮에도 얼어버려서 올해가 정말 끔찍하게 춥다는 걸 느끼고 있다.

겨울왕국

올 겨울은 너무 추워서 보일러 말고 다른 추위의 증거가 나왔다.

아침에 일어나서 현관문을 보니 허옇게 얼어있다.

문 열때 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쩌저적 하고 난다.

저렇게 얼어붙은 얼음이 녹으면 문틈으로 밖으로 빠져나가는데

그게 밖에서 다시 얼어서 밖에 나갈때 자칫하면 미끄러진다.

옥탑방의 포스다.

 

몸보다 추운게 지갑이다. 기름값이 역대 최저로 싸니 어쩌니 해도 가스비는 심야 할증 택시 미터기에서 전력질주로 달리는 말만큼이나 무섭고, 이따위로 추우면 밤새 더운물을 조금씩  틀어놓으라는 어른들의 조언도 별 소용이 없는 경우가 많다.

특히 나처럼 따뜻한 동네에 살다가 대학생활, 취직 등의 이유로 서울이나 추운 지방에 왔을 경우라면 더운 물이 안나올때 일단 ‘무섭다’. 매일 씻어야 하는 사람은 찬물에 씻어야 한다는 게 무섭고, 보일러가 대체 뭐 어떻게 고장이 난건지 무섭고, 세들어 사는 입장에서 집주인한테 말을 하긴 해야하는지, 대체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돈은 누가 내야하는지, 수리비는 얼마나 나올것인지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섭다. 눈이 자주 오는 동네 사람들은 운전을 해도 준비된 스노우체인을 감고 잘 다니지만, 애초에 눈이 안오던 동네에 폭설이 내리면 운전자 전체가 당황하는 일이 많지 않나.

그나마 SNS 등등에 경험담이 많이 올라오지만 이런건 체계화되거나, 교과서에 나오거나, 정석이 있지 않다. 더 좋은 방법들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내 기준으로 가장 좋은 방법을 소개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씻으려는데 온수가 안나온다면

1번. 일단 침착한다. 한국이 시베리아보다 춥니 어쩌니 난리들을 떨지만 그래도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땅이다. 보일러 생산업체도 바보가 아닌 이상 한방에 얼어터질 정도로 물건을 부실하게 만들지 않으며, 경험과 지식이 있다면 응급처치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처음부터 겁먹고 패닉에 빠지면 아무것도 못한다(내가 가장 힘들었던것도 이부분이었다. 밤새 보드게임 파티를 하던 날이었는데, 평소에 안쓰던 다른 방에 여자친구와 여자친구의 여자사람친구 A씨를 재우고, 나는 다른 친구들과 밤새 보드게임을 달렸다. 아침이 되니 여자친구는 방이 추워서 감기에 걸렸고, 하필 그날 처음으로 온수관이 얼어있었다. 미친다. A씨는 집을 나서며 찬물로 씻고 나가야 했고, 나는 어떻게든 온수관을 녹여야했다. 감기걸린 사람이 있으면 더운물에 씻기라도 해야 할게 아닌가. 인터넷 뒤지고 보일러를 손으로 더듬어가며 어딜 녹여야할지 찾는데 답이 나올리가. 분명 난방은 되는데 더운물만 나오질 않으니 더 기가 막힌다. 고장이 난것도 안난것도 아니니까. 친구놈들도 죄다 따뜻한 남쪽나라 출신이라 경험이 하나도 없으니 조언을 해주거나 할 건덕지도 없었다. 밤을 새고 슬슬 졸릴 시간이었지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멘탈 추스리고 침착해야 했다.)

2번. 보일러실을 찾는다. 평소에 갈 일이 없으면 어디있는지도 모르고 사는 경우 분명히 있다. 보일러가 여러개 있기라도 하면 어떤게 자기집 보일러인지도 알기 힘들고. 이건 케바케니 할수없다. 미리 알아두면 좋겠지만 그런거 미리 찾아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어쨌든 물어보든, 찍든, 자기집 보일러를 찾아야 한다.

3번. 보일러와 대면.
보일러 관

최소한 온수관이 얼었을 경우, 그걸 해결해야 하는 경우라면 보일러는 그렇게 무서운 물건이 아니다. 큼지막한 보일러의 뚜껑을 열고 내부를 살펴보고 자시고는 필요도 없다. 사진에 보이는 관들만 찾으면 된다. 보통 보일러 아래쪽에 붙어있고, 회사마다 차이가 있으니 꼭 이렇게 생겼다는 보장은 없다. 지금 보이는 관은 보온재를 싸거나 한 게 아니라서 관 자체가 밖에 노출돼있지만, 대부분 추위에 대비하느라 단열재, 은박지 비슷한 스폰지 같은걸로 싸여있을 것이다. 보일러 응급처치를 하려면 단열재를 벗겨내야한다(테이프로 칭칭 감아서 고정되어있거나 하다면 어떻게할지 고민을 좀 해야 할 것이다. 응급처치를 하고 원상복구를 할지, 아니면 그냥 내버려둔채로 응급처치를 할지. 안타깝게도 그건 내가 어떻게 해 줄 수가 없다. 직접 선택해야 한다)

보일러는 여러가지 기능을 하지만 단순히 보면 난방과 온수 두가지가 있다. 난방이야 방바닥에 더운물을 돌려가며 방을 데우는거고, 온수는 싱크대와 화장실, 수도에 더운 물이 나오게 하는것. 이 둘은 별도로 작동하고, 그래서 방 바닥에 보일러는 도는데 온수가 안나오는 상황이 발생하는거다. 사진의 보일러 기준으로 오른쪽의 약간 투명한, 플라스틱스러운 관이 온수관, 왼쪽의 금속제 주름관은 난방관이다. 주황색 휘어진 관은 가스관이고. 당신의 집에 더운물이 안나오는 이유는 전부 오른쪽에 있는 플라스틱 관 문제다. 플라스틱 관은 탄성이 있어서 살짝 당겨보면 움직일텐데, 얼어있다면 당길때 뽀드득거리면서 얼음 부서지는 소리가 날 것이다. 손의 느낌으로도 조금씩 찌직거리는 느낌이 전해질 것이고. 그럼 직빵이다. 당신 보일러는 온수관이 얼었다.

4번. 문제 해결

지금까지 말한 내용에 전부 해당된다면 일단 축하한다. 당신은 사태를 파악했고, 돈을 들여가며 보일러를 수리해야 할 만큼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녹일것인가? 인터넷에는 온갖 백가쟁명의 방법들이 다 나와있다.

난 처음에 헤어 드라이어를 써봤다. 심지어 머리 말릴때는 수건만 쓰는데 온수관 녹이려고 헤어 드라이어를 싸구려나마 일부러 돈들여서 샀다! 열을 가하는 물건이니까 도움이 되겠지하고. 개뿔. 망했다. 하루종일 틀어놔도 잘 녹지도 않고 시끄럽기만 했다. 어두운 보일러실에서, 꼭두새벽에, 스마트폰은 있는데 플래시라이트 앱도 모르던 시절에 휴대폰 카메라 조명을 수시로 켜 가며 녹이려면 사는게 뭔가 싶은 회한만 들고 제대로 녹지도 않는다. 절대 비추다.

그 다음엔 가스렌지로 물을 끓여서 관에 부어봤다. 역시 비추다. 오래 걸리고, 제대로 포인트도 못짚어서 짜증이다.

가장 추천하고싶은 방법은 끓는 물에 수건을 적셔서 관에 감아주는 것이다(화상 주의. 한겨울에 온수 못틀어서 고치려다 화상 입으면 그거만큼 어이없는 부상도 없을 것이다. 분명히 경고했다).

중요한 핵심이니 처음부터 차근차근 알려준다.

일단 물이 나오건 말건 온수 방향으로 수도꼭지는 틀어놓자. 보일러실이 가까우면 창문만 열어놔도 온수가 나오는 소리를 들어서 해결된 걸 알기 쉽고, 보일러실이 멀어도 틀어 놔야 사태 파악이 쉽다.

가스렌지, 전자렌지, 전기포트 등등을 이용해서 그릇이나 냄비에 물을 담고 물을 데운다. 가스렌지도, 전자렌지도, 전기포트도 없다면 근처 편의점 전자렌지라도 써라(물론 물을 담고 나면 다시 온수쪽으로 수도꼭지 틀어놔라). 이 뜨거운 물과 수건을 갖고 보일러실로 가자.

보일러실에 도착하면, 앞에서 말한 얼어붙은 온수관을 뜨거운 물에 적신 수건으로 감은 다음 전체적으로 문질러준다(당연히 더러워질 것이니 새 수건 말고 걸레나, 빨래통에 담긴 수건을 추천한다). 사진 윗부분에 관과 보일러를 연결하는 너트부분도 지긋이 잡고있어주자. 거기도 상습적으로 어는 부분이다. 관 전체가 어는 경우는 드물다.

여기서 중요한점 또하나. 위의 사진으로 돌아가보자. 맨 오른쪽에 흰 관, 그 왼쪽에 빨간 관이 있을 것이다. 보일러는 자체적으로 물을 생산하는 물건이 아니며, 물이 들어가서 -> 데워진 다음 -> 다시 나오는 물건이다. 위 사진에서 흰 관은 물이 들어가는 관, 빨간 관은 데워진 물이 나오는 관이다. 빨간 관에 온수가 나오려면 흰 관을 먼저 녹여야한다는 걸 알 수 있다. 흰 관을 먼저 녹이다보면 뽀드득 하면서 얼음이 녹고 물이 움직이는 감촉이 손에 전해질 것이다. 그 다음에 빨간 관을 같은 방법으로 녹이면 역시 얼음 갈라지고 물 흐르는 감촉이 전해질 것이다. 이것때문에 온수를 미리 틀어놓으라고 한 것이다. 물이 잠겨있으면 이 감각이 확실하게 전해지지 않는다.

여기까지 왔다면 당신은 겨울 추위에 보일러 관이 언 것을 혼자서 응급처치했다. 축하한다. 관에 단열재가 덮여있던 곳이라면 단열재를 다시 잘 싸매주고 보일러실에서 나오자. 집에 들어가면 미리 틀어 놓았던 온수가 김을 내며 당신을 반길 것이다.

‘열심히 단열재를 싸 놓으면 밤에 얼지도 않을텐데 뭐하러 사서 고생을 하냐’는 사람 분명히 있을 것이다. 열심히 싸 봐라. 아무리 잘 싸놔도 이따위로 추우면 한번은 관이 언다. 단열재조차도 답이 안나오게 관이 얼었을때의 응급처치를 알려주는 것이다. 물론 잘 싸서 안 어는게 제일 좋지만.

녹이는 과정을 사진으로 하나하나 찍어가며 보여주면 훨씬 이해가 빠르겠으나, 이 추운 날씨에 오래 나가있기도 싫어서 최소한의 사진만 덧붙였다. 글로만 읽어보면 ‘아 이러면 되겠구나’하고 생각이 날 수 있으나, 절대 비추천한다. 게으른 몸을 움직일 생각이 들고, 온수가 나오지 않는 상황을 상상만해도 치를 떠는 순간에, 꼭! 무조건 시뮬레이션을 돌려봐라. 물도 끓이고, 보일러실도 찾고, 수건도 적셔보고. 사고 터졌을때 서둘러서 하려고 하면 보일러실 못찾고, 관 어떤건지 헤매고, 뜨거운 물에 손 화상입고, 빨랫감 냅두고 새 수건 썼다가 우울해지면서 인생이 피곤해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시 경고한다. 끓는 물 화상 조심해라. 다치면 손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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