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 매장남, 책추천

온 나라가 알파고 이세돌 얘기로 가득하다. 나는 게임인으로서 바둑에 대한 동경이 무척 강한 사람이다. 보드게임 중에서 끝판왕 아닌가. 간단한 규칙, 무한에 가까운 게임 진행, 그리고 볼때마다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거대한 게임판.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임이 아닐 뿐더러, 이런 게임이 다시 나올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나름의 방법으로 바둑에 도전해보려고 했던 때가 있었다. 무슨 책을 읽어도 즐거운 군대 시절에. 어릴적부터 수읽기가 워낙 둔해서 다른 게임을 할때도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바둑을 배우면 좀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창호 바둑 입문 책을 샀다. 덕분에 축, 장문 같은 개념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물론 실전은 고사하고 문제 풀이도 제대로 못하는 수준이지만.

(여기까지 읽은 분들이라면 대세로 뜨는 이슈다 싶으니까 발 한번 걸쳐보자고 날뛰는 글쟁이 나부랭이의 글이라는 것을 알수 있을 것이다. 어쩌겠는가. 글 쓰는 사람 입장에서 놓칠 수 없는 소재인것을.)

이런 초짜가 봐도 이번 대결은 정말 궁금했다. 국민학교때는 체스 선수 카스파로프와 IBM 컴퓨터 딥 블루의 대결이 세상을 뒤덮은 적이 있었다. 그때 한국에서 단골로 나오던 얘기가 바둑은 훨씬 복잡해서 절대 컴퓨터가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북한의 은별이 막강하다더라, 잘나봤자 아마 1단밖에 안된다더라 같은 얘기가 본게임 비중이랑 비슷하게 나왔었다. 아마도 게임 관련 국뽕으로는 전무후무할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20년 흐르고 나니 세계 최고의 바둑 선수와 대등한 경기를 펼치는게 아닌가. 경기의 승패를 떠나, 알파고와 이세돌 모두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다.

먼저 이세돌. 정말 놀라웠다. 바둑의 정점을 찍었다고 할법도 한데, 또 새로운 도전을 한 셈이다. 바둑은 몰라도 주워들은 건 있어서 복기 이야기를 여러번 들었다. 헌데 게임이 끝나고 난 이후에 복기를 할 수 없어서 답답해하는 모습. 그러면서도 좋은 게임을 하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모습. 게임 규칙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지켜보고싶고, 열광하게 만드는 모습은 저런 모습이 아닐까 싶을 정도.

그리고 알파고. 사람들이 죄다 기계 따위에게 인간이 질 수 없다 같은 말을 하며 이세돌을 일방적으로 응원하고, 스카이넷 드립을 쳐대지만 나는 이게 불쾌하다. 알파고는 나로서는 상상도 못할 프로그래밍, 노력, 자본을 들여서 만들어 낸 인공지능이다. 그 과정의 땀과 눈물을 생각한다면, 누구 하나를 응원할 상황은 아니지 않은가. 더욱 세심하고 치밀한 계획, 목표 설정이 있어야겠지만 그 성과에 박수를 보낸다. 게임 인공지능으로서 정점을 찍었다는 점에서 인간의 게임 문화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을 생각하니 게임인으로서도 뿌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니 드립도 대폭발했다. 스카이넷이 드디어 나타났네, 기계의 세상이 한발 더 가까이 다가왔네, 대신 바둑돌 놓아주는 사람이 기계 세상의 첫 인간 하수인이네… 발랄하고, 참신하면서, 빵터졌다. 늘 그랬듯이.

하지만 내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웃어도 웃는게 아니었다. 매장남 사건 때문이다.

http://www.ytn.co.kr/_ln/0103_201603071530068743

소개팅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사람이 상대를 업계에서 매장해버리겠다고 겁박한 사건이다. 사건은 일파만파로 퍼졌고, 여론도 급격히 들끓었다. 사건이 알려지고, 사과문이 올라오는 등등의 사건 진행은 엄청나게 빨라서, 며칠 사이에 이슈에서 확 사라졌다. 결론은 이승로그 오늘의 탐라가 제대로 보여줬다.

http://murutukus.kr/?p=11490

아니, 인공지능이 인류 최고의 게임에 도전하고, 게임계에 혁명적 이벤트가 일어날 때 이런 사건이 같이 일어난다는 게 말이나 될까?

인간이 인간과 닮은 것을 만들어내면서 무려 ‘인간 평균 이상(바둑 한정이지만)’을 만들어 냈단 말이다. 그런데 대체 인간 스스로는 뭘 하고 있나.

상대를 존중하고, 상대의 외모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지위로 상대를 겁박하지 말기. 이게 어렵나?

가수 신해철이 생전에 남긴 이야기가 있다. 네댓살쯤인가의 어린 아이가 올림픽 유도 시합 중계를 봤다고 한다. 그때 아이가 한 말은 아주 단순했다. ‘때리지 마세요’, ‘싸우지 마세요’ 였다고 한다. 상대를 존중하는거. 쉬운거다. 유치원을 안가도, 어린이집에서도 배울 수 있다고.

AI가 사람의 자리를 대체할 거라는 불안감, 개드립, 가상 시나리오에 나는 코웃음을 쳤다. 알파고가 당신들의 자리를 대체할까봐 두려운가? 정신차려라. 단순한 계산기 하나만 놓고 봐도 이미 당신들보다 다섯자리 곱셈을 훨씬 빨리 하지 않는가.

기계의 인류 지배를 막기 위해 지금부터 바둑을 배워서 이세돌을 뛰어넘고, 알파고와 대결을 해서 이길 것인가?

나는 차라리 다른 게임을 제안하겠다. 힘든 일에 헛심 쓰느니, 차라리 인간으로서 할 수 있고, 이미 정답까지 알고 있는 문제에 집중하는 게 낫다. 방금 말했듯이 어린이집을 다니는 아이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인간끼리 더불어 사는 것. 조금 더 존중하고, 함께 살기 위해 노력하는것.

멋진 게임 아닌가? 승자와 패자가 엇갈리지도 않고, 무려 함께 승리할 수 있는 협동게임이다. 이런 게임 흔치 않다.

그리고 이 게임의 가장 좋은 점이 있다. 완벽공략은 아닐지 몰라도, 제법 오랜 세월 잘 다듬어진 좋은 공략집이 있다는 것이다.

세계인권선언이다.

http://amnesty.or.kr/about/%EC%9D%B8%EA%B6%8C%EC%9D%B4%EB%9E%80/%EC%84%B8%EA%B3%84%EC%9D%B8%EA%B6%8C%EC%84%A0%EC%96%B8/

모두가 함께 더불어 사는 게임에 대한 공략집이라고 쓰긴 했으나, 누군가에게는 그 게임의 설명서일수도 있고, 게임 광고로 보일 수도 있겠다. 누군가에겐 스포일러일 수도 있고.

하지만 하나는 장담할 수 있다. 인간이 역사상 가장 스스로의 추악함을 쏟아냈던 시절에 대해 이만큼 뼈저린 반성이 있는 글도 흔치 않다.

그리고 예전에 추천한 책인 헌법과 공통점이 있다. 쉽다. 전문이 좀 길고 정신없으면 건너뛰어도 된다. 그 다음에 나오는 항목들은 얼마나 쉬운가. 굳이 이런걸 선언이랍시고 말을 해야 하나 싶을 만큼 쉽고, 익숙하게 알고 있는 내용들이다.

바둑은 어려운 게임이니 인공지능이 좀 앞서나갈 수도 있다 치자. 그런데 인간의 도덕, 윤리 수준이 매장남 수준으로 계속 머무르면 어떨것같은가. 언젠가 알파고같은 인공지능이 나와서 도덕과 윤리에 대해서도 잔소리를 할 것 같지 않나?

그때까지 가서야 세계인권선언을 찾으면서 인공지능에 맞서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겠다고, 인간도 꾸준히 노력해왔다고 하면 그건 드립 취급도 못받을 것이다. 알파고 이후의 바둑 열풍에 내 입맛이 씁쓸해지는 이유다. 매장남은 순식간에 묻히고 있다. 땅콩리턴은 그나마 기억에라도 남아있지, 매장남은 1년 뒤면 누군가 기억이나 할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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