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정치

(정치가 쓰레기같다고 화를 내려는 게 아니다)

정치는 복잡한 개념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정치의 정의는 ‘의사 결정’이다. 이번 글에서 하려는 이야기는 쓰레기에 대한 정치 이야기다.

내가 사는 지자체에서는 쓰레기 문전 수거를 시행하는 중이다. 간단하다. 자기 집 문 앞에 쓰레기를 놓아두면 수거 차량이 가져가는 것.

하지만 문전 수거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특정 구역, 오래전부터 ‘쓰레기 버리는 곳’, ‘쓰레기장’이라 불릴만한 곳에 계속 쓰레기가 모이고 있다. 습관일 것이다. 주로 전봇대 근처가 찍히는 편인데, 한번 쓰레기 버리는 곳으로 굳어지면 쉽게 바뀌지 않는다. 제도가 바뀌어도 몸에 와 닿는 데는 시간이 꽤 걸리니까.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하필 자기네 집 앞이 쓰레기장으로 찍혀서 화가 난 집주인들이 있었다. 뻔히 제도가 바뀐 상황에서 온 동네 쓰레기가 자기네 집 앞에 쌓여있는 게 마음에 안들 수 있다. 인정한다. 아무리 음식물 쓰레기가 아니어도 냄새는 날 수 있고, 차량이 최대한 빨리 치워도 불쾌할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누군가가 불편을 느낀 것이다.

이상적인 해결책은 지역 공동체를 살리고, 서로 의사소통을 해서 반상회를 하거나, 집집끼리 모여서 대화가 이뤄져야 한다. 바뀐 제도를 홍보하거나, 정 사람들이 쓰레기를 한데 모아 버리고 싶다면 어디에 버릴 지를 결정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가장 끔찍한 패악질을 만났다.

일단 경고문이 붙었다. 시뻘건 매직으로 큼지막한 글씨를 썼는데, 이곳에 쓰레기를 버리면 엄벌에 처하겠다는 식이었다.

astral warning

원문을 공개하지는 않겠지만, 정확히 이 짤방과 비슷한 경고문이 붙었다.

그 다음에 등장한 게 무려 화분이었다. 그것도 꽃이 핀 대형 화분을 대량으로 갖다 놓고, 노끈으로 펜스를 치면서 쓰레기를 버리는 곳이 아니라는 항변을 했다.

어찌 보면 일상적인 모습일 수도 있지만 나는 정말 화가 머리 끝까지 뻗쳤다. 왜냐고?

이 과정에서 ‘쓰레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사 표현은 단 한마디도 없었기 때문이다. 쓰레기를 모조리 씹어 먹고 소화하지 않는 이상 생활 쓰레기는 나오게 마련이며, 어딘가에는 버려야 한다. 그러면 쓰레기 배출과 수거에 대한 고민은 조금이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저런 행위에서는 ‘내 집 앞에 버리지 마라’밖에 없었다.

더 웃긴 사실은, 나는 내 집 앞에 쓰레기를 버릴 권리가 있는데, 그 잘난 경고문은 다른 집에서 일부러 쓰레기를 버리러 오는 사람보다 내가 더 많이 보게 된다는 것이다. 결정된 정책에 따라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사람에게까지 스트레스를 줘 가면서 대체 뭘 이루고 싶었던 것일까. 님비 님비 말로만 들었지 이렇게 비열하고 치사한 경우는 살다가 처음 봤다.

행동하는 시민 답게 내가 먼저 나서서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공동체를 구성하고, 반상회라도 소집해야 했을까?

아니. 나는 그럴 의지가 생기려고 하다가도 머리 속에서 씨가 말랐다. 동네 자체에 대한 신뢰도가 산산조각난 상태였기 때문에.

틈만 나면 재개발 한번 해보려고 미쳐 날뛰는 사람들이 가득한 건 부동산 공화국에 사는 중이니까 그렇다 치자.

정말 동네에 실망하고 짜증이 난 건 동네에서 랩을 연습하는 떨거지(너무 비하적이고 저속한 표현이지만 받은 스트레스에 비하면 극도의 자제심을 발휘한 표현이다)들에 대한 대응 때문이다. 취업도 못하고 백수로 사는 마당에 낮에는 글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는데, 근처 옥탑방에서 랩 연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친듯이 시끄러웠고, 음주 가무와 함께 온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 댔다. 몇 개월을 참았다. 그러다가 쫑파티라도 하려고 했는지 옥상까지 나와서 또 소리를 질러 댔는데, 나는 태어나서 가장 큰 목소리로 항의를 했다. 대한민국, 시민 사회, 마을 공동체에 대한 리스펙트는 2바이트도 없는 것들이 무슨 힙합을 한다는 것인지 나 같은 힙합 문외한이 봐도 이해가 안됐다.

그 지경이 되도록 이놈의 동네는 시끄럽다고 항의를 하거나, 조치를 취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자신의 집 앞에 쓰레기가 버려지면서 혼자 피해를 보는 상황에는 단 하루도 참을 수 없었지만, 온 동네가 떠나갈 정도의 소음 공해에는 부처님 반토막 수준의 인내심과 평정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힙합 공연을 진심으로 즐겼거나.

이런 상황에 뭐 좋다고 먼저 행동에 나서겠나. 쓰레기 사태는 결국 경고문과 화분이 난무했고, 화분을 피해 다른 자리로 이동하니 또 화분이 등장하고, 누군가가 구청에 민원을 넣어 쓰레기 투기 금지 구역 안내문이 붙은 다음에야 해결이 됐다. 쓰레기가 지금 어디에 몰리는지, 구청 지시대로 문전 수거가 이뤄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패악질의 수위가 더 높아지지는 않는 것 만으로도 그나마 안심하는 중이다.

하지만 동네의 이야기일 뿐인가 싶었더니 더 심한 패악질이 아예 지자체 단위에서 나오는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쓰레기 실명제. 분리수거를 제대로 하지 않는 자들을 처벌하고 쓰레기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시행한다고 하는데, 이런 짓을 하는 자들이 정신머리가 있는지 없는지가 더 궁금해진다. 일개 마트나 백화점에서도 개인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 영수증을 버릴 때는 찢어서 버리라는 안내문이 쓰레기통마다 붙어있다. 은행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데 버젓이 내 개인정보를 적어서, 문전 수거 원칙에 따라 집 앞에 버리라고 하면 이건 대체 뭐하는 짓일까? 악질적 파파라치들은 온갖 정보를 다 뒤지기 위해 스토킹하는 상대의 쓰레기통을 뒤지기까지 한다는 얘기는 들어보지도 못한 걸까.

trash can

드라마 <총리와 나> 중에서.

해외 뉴스도 안보고, 드라마도 안보고 탁상행정을 해서 이런 일이 생기는걸까?

유명 정치인이 당을 장악하고 대선을 노리고 자시고… 다 필요 없다. 진짜 정치는 이렇게 일상에 존재한다. 그런데 일상의 정치는 어느 정도까지 성장했는지 살펴보면 속이 답답해진다. 대학 학생회가 갑질을 일삼으면서 신입생들에게 기상천외한 가혹행위를 일삼는 동시에 학생회비 횡령을 저지르고, 사람이 죽거나 말거나 사내 단합 대회로 등산이 강권되는 걸 보면 일상에 민주주의가 존재하긴 하는지 의심스럽다. 21세기가 되면 자동차가 하늘을 날아다닌다고 하지 않았나? 현실은 다양한 야만이 백가쟁명을 이루는 실정이다.







1 thought on “쓰레기 정치

  1. 1. 본문이 다루는 첫번째 사례는 정책의 실패와 그 피드백 과정으로 봐야 할 것.
    아무 동의 없이 관습적으로 쓰레기장으로 사용된 공간의 거주자는 ‘무단투기시 엄벌에 처함’이라는 거친 형태일지라도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 것.
    ‘쓰레기는 자기 집 앞에 내놓자’라는 온건한 계몽적 태도를 취할 수도 있었겠지만, 경고문 작성자에게 그래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게 더 효과적이었을지 또한 의문.
    ‘쓰레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의 대안을 모색할 책임 또한 불특정 다수의 행위로부터 피해를 입고 있는 해당 주민에게 전가될 수 없음.

    경고문 작성자의 의도는 알 길이 없으나, 상식에 비추어 볼 때.. ‘쓰레기 문전 수거제’를 따르지 않았다 해서 엄벌에 처하는 일이 불가능 할 뿐 아니라, 이는 지자체의 정책이므로 공동주거의 주민인 필자가 배출한 쓰레기를 이유로 필자를 엄벌하겠다는 의도는 없었을 것임.

    필자의 비판이 정당한 지점은 ‘내 집 앞에 쓰레기를 버릴 권리’까지일 뿐, 동의 없이 자신의 집 앞이 쓰레기장이 되는 것에 반대하는 타인의 권리 추구를 ‘끔찍한 패악질’, ‘님비’, ‘비열하고 치사한 경우’라며 비난하는 것은 부적절.

    2. 두번째 소음공해의 사례에서 필자는 첫번째 사례와 모순되는 입장을 취함.
    공동체가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혹은 관용하는 어떤 사태에 대한 자신의 불만을 표출하는 방식으로 ‘태어나서 가장 큰 목소리로 항의’했다는 필자는, 자신의 정당한 항의 또한 누군가에게 소음공해일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음.
    소음 공해에 맞서 악을 쓰는 필자의 행위와 ‘엄벌에 처하겠다’는 경고문 사이에 어떤 질적인 차이가 있을 것이라 생각할 수는 없을 것임.

    이에 대해 필자는 자신의 집 앞 쓰레기에는 단 하루도 참지 못하는 자들이 소음공해에는 관대하다며 비난하나, 이 두 사례는 완전히 독립된 것.
    각각의 사례로 침해되는 권리가 다르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피해자들 또한 상이할 것이라 추론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떤 이가 쓰레기 배출에 대해 갖는 태도가 고성방가에 대해 갖는 태도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 볼 근거도 없음.

    3. 필자는 두번째 사례에서 학습했다는 공동체에 대한 신뢰의 상실을 근거로 첫번째 사례에 대한 자신의 무관심을 정당화하려는 듯 하나, 전술했듯 두 사례는 별개의 사건.
    필자의 태도는 자라와 솥뚜껑에 대한 태도 만큼이나 정당화되기 어려울 뿐 아니라 필자의 공동체상에 중대한 오류가 있지 않나 의심케 함.

    타인의 권리추구를 비난하고 자신의 권리침해에 침묵한다며 타자화한 공동체를 비난하면서, 그 공동체에 대한 신뢰 상실을 근거로 대화와 타협의 가능성을 포기한 필자의 사례는 필자가 결론부에서 지적하는 생활 정치의 실종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보여주는 한 사례로 기능할 수 있을 듯.

    첫번째 사례와 유사한 갈등으로는 대추리나 부안 방폐장을, 두번째 사례와 유사한 갈등으로는 퀴어 퍼레이드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임.
    이들 쟁점에 대해 필자가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는지는 내가 상관할 바 아니겠으나, 공동체와 자신을 분리하여 사고하는 중2병스러운 관점에서는 벗어나보기를 권함. 생활 정치는 아마 거기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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