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광: 뒤바뀐 운명

은광: 뒤바뀐 운명

 16-18세기는 여러모로 재밌는 측면이 많은 세기다. 새로운 집권 세력이 나타나고, 새로운 경제 주체가 나타난 시기다. 세계 각지에서 혁명적인 변화가 끓어오르던 시기이며, 또 그만큼이나 많은 꿈이 좌절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세기에서 또 다른 흥미로운 지점 하나가 있다. ‘상업’이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전 세계가 하나의 교역망으로 통합되기 시작한다. 포르투갈에서 출발한 배가 유라시아의 동쪽 끝까지 도달했고, 동남아시아가 해상 무역 중심 기지로 성장했다. 신대륙에서 막대한 재화가 쏟아져 들어왔고, 서양과 동양이 대규모로 무역을 벌이며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던 역동적인 시기다.

그렇다면 세계를 돌아다니던 이 무역선들이 싣고 돌아다니던 물건들은 무엇일까? 많은 것들이 있었다. 향신료가 오가기도 했고, 도자기가 오가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 것은 분명 은(銀)이었을 것이다.

 

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역시 전 세계적으로 통용할 수 있는 화폐 따위는 없었다. 그렇다고 무슨 환전소가 도시 곳곳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말이다. 아니, 사실 화폐제도 자체가 발달되지 못한 시대였다.

그렇다면 전 세계 사람들이 어떤 것을 가지고 교역을 했을까? 단순한 물물교환으로 이런 체계가 유지되기는 어렵다. 그래서 고안된 화폐가 바로 ‘은(銀)’이었다.

금이나 은이나 동은 아주 예전부터 인류와 함께했던 귀금속들이다. 그런데 이들 중 금은 너무 비싸고 희소해 무역에 사용하기는 어려웠다. 동은 반대로 너무 가치가 낮아서, 국내 거래 정도에는 쓰여도 대규모 국제 무역에 쓰기는 부적절했다. 가장 적절한 세계화폐로 은이 선택된 이유다.

 

은이 중요했던 것은 다른 이유도 있었다. 전 세계 경제의 절반 가까이를 괴물처럼 빨아들이고 있었던 국가, 바로 중국의 존재였다. 중국은 명대부터 ‘일조편법’이라고 해서, 세금을 반드시 은으로 내도록 강제했다. 조선을 포함한 동아시아 각국이 중국에게 바치는 조공 역시 은을 다수 포함하게 했다.

당시 중국과 그 조공 무역망에 포함된 인구를 따지면 세계 인구의 절반 가까이 된다.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이 은을 반드시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이 시점에 동아시아가 가지고 있던 은에 대한 수요는 엄청났다. 그 정도가 어느 정도였느냐면, 높은 수요로 인해 은의 값이 폭등했는데 그 결과 중국의 은 가격이 서양의 은 가격의 두 배였다고 전해진다. 약 두 세기 동안 서양의 은이 무지막지하게 중국으로 유입된다.

말하자면 은은 세계 화폐이기도 했지만, 그 자체로 서양 상인들에게는 훌륭한 재테크 수단이었던 것이다.

 

자, 그런데 그렇다면 이 많은 은들은 대체 어디서 나왔을까? 우선 많은 양이 유럽에 위치한 은광에서 나왔을 것이다. 유럽이라고 은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유럽의 은으로 이 역동적인 세기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그래서 새롭게 떠오른 지역이 신대륙이었다. 신대륙은 막대한 귀금속을 서양에 전달해 주는 말 그대로의 보물창고였다. 특히 멕시코 지역에서 나오는 은은 세계 경제 전반을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었다. 오죽하면 모든 건물을 금으로 세웠다는 ‘엘도라도’ 같은 전설까지 나왔을까.

 

엘도라도

 

 

그런데, 사실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은광은 동방에도 존재했다. 일본에 위치한 ‘이와미 은광’이라는 녀석이 있다. 지금도 시마네 현 오다 시에 보존되어 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은광이다.

아주 단순하게 말해 보자. 약간의 과장이 섞여 있기는 하지만, 이 은광은 당시 전 세계에서 나오는 은의 3분의 1을 생산했던 은광이다. 이 막대한 은의 대부분은 중국으로, 그리고 나머지는 서양에 팔려나갔다.

이 시기를 중심으로 일본은 점차 상업화를 이루게 되었고, 수많은 서양과의 교역이 바로 이 은광에서 나오는 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메이지 유신 전까지 일본을 이끌던 힘은 이와미 은광이었다.

 

이와미 은광

▲ 이와미 은광 (石見銀鑛)

 

 

그런데 이와미 은광에서 이렇게 은을 많이 생산할 수 있었던 건, 단순히 이 은광에 은이 많아서는 아니다. 이와미 은광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선진적인 은 제련 기법을 가지고 있었다. 흔히 ‘연은 분리법’이라고 불리는 방법이다.

당시 동서양을 막론하고 은을 분리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었다. 은광석은 채취하면 납과 은이 섞여서 나오는데, 핵심은 납에서 은을 분리하는 방법이다. 그래야 순수한 은을 만들 수 있으니까 말이다.

원래 사용되던 방법은 그냥 이 은광석을 한 번에 녹인 다음에, 녹은 재 속에서 순수한 은을 찾아내는 방법이었다. 은을 찾는 것 자체가 어려워서 생산량도 많지 않았고, 그 품질도 좋지 못했다. 그런데 이와미 은광에서 찾아낸 방법은 은과 납의 녹는점 차이를 이용해서 효과적으로 은을 분리해낼 수 있었다. 기술의 발전이 경제를 이끈 원동력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 기술은 그냥 이와미 은광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기술이 아니다. 이 기술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건, 의외로 조선 땅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연산 9년 5월 18일 계미일 기사를 하나 전한다.

 

“양인 김갑불과, 장예원 노비 김검동이 납으로 은을 분리해 바치며 아뢰었다. “납 한 근으로 은 두 돈을 분리할 수 있는데, 납은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니 은을 넉넉히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쇠 화로나 냄비 안에 재(灰)를 둘러 놓고 납을 조각조각 끊어서 그 안에 채운 다음, 깨진 질그릇으로 사방을 덮고 숯을 위아래로 피워 녹이면 분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임금이 시험해 보라 전교했다.”

 

여기서 ‘납’은 ‘은광석’ 정도로 바꾸어 해석해도 좋다. 납에서 은이 나올 리는 없으니까 말이다.

 

연은분리법

▲ 이와미 은광에서 사용하던 연은분리법.

16세기 조선을 드나들던 일본 상인들이 배워 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술은 이와미 은광에서 사용하던 연은 분리법과 일치하고, 곧 조선에서 이 분리 기술이 건너갔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다만 조선에서는 후기에 접어들기 전까지 은광을 국가에서만 관리하고 있었고, 저 기술을 개발한 이들이 양인(아마 중인이었을 것으로 추정)과 천민이었기 때문에 크게 호응을 받지 못했다.

그랬던 기술은 일본으로 건너갔고, 그렇게 이와미 은광이 탄생했다. 세계 은의 3분의 1을 생산하고, 일본의 상업화를 이끌었던 그 은광이 말이다.

전국시대에 접어든 일본은 이와미 은광을 가지고 쟁탈전을 벌인다. 결국 이와미 은광을 차지한 것은 도요토미 가문이었고, 도요토미 가문은 일본 전역을 성공적으로 차지한다. 도요토미 가문은 이 은광을 이용해 서양과 적극적으로 무역했고, 총도 이 과정에서 일본에 들어왔다. 그리고 은으로 축적한 자본력은 곧 임진왜란의 전쟁자금에까지 사용된다.

 조선이 가진 지하자원의 양은 결코 다른 나라에 밀리지 않았다. 한반도 북쪽은 ‘동방의 엘도라도’라고 불릴 정도로 지하자원이 풍부했던 것이고,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면서는 금광부자도 많이 탄생했었다. <조선일보> 가문의 방응모 사장이 대표적인 금광 부자 아니었던가.

하지만 기술을 대하는 두 나라의 태도가 달랐다. 조선은 경직된 경영으로 그 기술을 잠재웠으며, 일본은 그 기술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그리고 그렇게 조선과 일본이 만들어졌고 말이다.

어쩌면 이와미 은광이라는 단편적인 사례는, 두 나라의 뒤바뀐 운명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데지마

▲ 나가사키에 위치한 데지마 섬. 일본과 서양의 무역 기지였다.

 

 

※ 이 글의 참조문헌과 사진의 출처는 widerstand365.tistory.com/935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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