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간의 논쟁, 무엇을 보여주었나?

일주일간의 논쟁, 무엇을 보여주었나?

 강남역에 붙어 있던 추모 포스트잇이 모두 떼어졌다. 비가 온다는 소식이 있어 포스트잇을 지키기 힘들고, 지속적으로 훼손이 벌어지고 있어 하루빨리 보존 처리를 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자원봉사자들이 모여, 추모 쪽지를 모두 떼어낸 뒤 스티로폼 패널에 일일이 옮겨 붙였다. 이 추모 쪽지는 서초구청으로 전달되었으며, 이 중 일부는 서울시청 지하  1층에 마련된 추모 공간으로 옮겨졌다. 나머지 추모 쪽지와, 대전·대구·부산 등 각지에 붙은 추모 쪽지는 서울시 여성가족재단으로 옮겨 보존한다.

강남역에서 서울시청으로 장소가 바뀌었다. 단지 장소만 바뀐 것은 아니다. 이제 강남역 살인사건과 그 추모 열기는 서서히 사그라들 것이다. 이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여성 혐오(misogyny)’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겠지만, 강남역 살인 사건으로 촉발된 한 바탕의 논쟁은 이제 여기서 막을 내릴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이제, 지난 일주일 동안 있었던 거대한 논쟁에 대한 평가와 성찰이 이루어져야 하는 시점이다.

 

시작은 그리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어쨌든 대한민국에선 하루 한 건 이상의 살인사건이 벌어진다. 그 피해자의 대부분은 여성이고 말이다. 언론이 가해자에 이입해 ‘○○녀’ 프레임을 만드는 것 역시 그리 새로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서 딱 한 가지의 차이가 발생했다. 이제껏 분노해 왔던 사람들이, 이제는 분노에 행동을 더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강남역에 모여 포스트잇을 붙이기 시작했고, 주장과 논쟁이 가능한 물리적인 장이 만들어졌다.

여성들이 직접 밖으로 나와 세상의 ‘여성 혐오(misogyny)’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행동을 보여주었다는 것은 대단한 진보다. 그리고 그 행동에 대해 온 사회가 모여 논쟁을 벌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세상은 진보의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줬다.

 

하지만 이 시간이, 꼭 좋은 가능성만을 보여줬던 것은 아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이 사건을 바라보는 두 진영에게 같은 말을 해 주고 싶었다.

“이성을 좀 차리자.”

 

그 성격이야 어쨌든, 강남역 10번 출구는 본질적으로 누군가의 죽음을 추모하는 자리다. 그 자리에 인형탈을 쓰고 나오는 일은 희생자를 모욕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그리고는 ‘폭행’을 당했다며 스스로를 피해자라 주장하는 일은, 어떻게 봐도 과도하다.

‘일베 조화’ 논란도 있었다. “남자라서 죽은 천안함 희생자를 추모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조화가 추모 현장으로 배달됐다. 희생된 여성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건을 끌어들여, 이 사건을 ‘남성’과 ‘여성’의 성 대결로 몰아간 전형적인 사례다.

 

강남역 일베 조화

 

한국 사회에 성차별이 없다고 주장한다거나, 오히려 여성들이 혜택을 보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어떤 수치로 봐도 합리적 근거는 없었다. 한국의 ‘유리 천장 지수’는 언제나 OECD 꼴찌 수준이고, 성평등지수는 100위권 밖으로 나가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 사회가 ‘여성 혐오적(misogyny)’이라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다.

 

반대 진영이라고 달랐을까?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가해자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주장은 어떨까? 한국의 형법은 사형을 제도화하고 있고, 법원이 사형 판결을 내리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나올 수 있는 발언인가? 죽음을 대체하기 위해 또 하나의 죽음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대단히 소모적이다.

“총기 소유를 허용해야 한다”는 논리도 등장했다. 살인 사건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총기를 소유해야 한다? 미국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등장하는 총기협회의 논리와 유사하다. “총기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총기를 소유해야 한다!”

“여성을 넘어서 모든 약자가 안전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던 김광진 의원의 트윗에 보인 반응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는 한다. 이 사건은 어쨌든 여성 살해 사건이고, 이 지점을 조금 더 강조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이후 김광진 의원이 지속적으로 여성 문제를 강조하고 조의를 표했음에도 던져지는 조롱과 비판은 분명 지나쳤다. 이 사건에서 ‘여성’이라는 지점은 대단히 중요하지만, ‘여성’이라는 이슈를 넘어서 소수자와 약자 전체에 대한 논의를 꺼내지 못한다면 곧 파시즘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강남역에 마스크를 쓰고 등장한 남성을 향해 “떳떳하면 마스크를 벗으라”고 외친 일은 어떨까. 박근혜 대통령이 ‘복면 시위대’를 테러 집단에 비유했다가 큰 역풍을 맞았던 것이 불과 6개월 전의 이야기다. 각종 복면을 쓰고 시위 현장에 나와 이 발언을 조롱한 것이 지난 11월의 일이다.

 

복면 시위

 

복면 시위대를 테러 집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불과 6개월 전에 본인이 했던 이야기를 현재의 본인이 반박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논리의 일관성은 보일 필요가 있었다.

 

물론 모두의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 비논리가 각자의 진영에서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수많은 비논리가 각자의 진영에서 횡행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것은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논쟁이 ‘목소리 싸움’과 ‘수 싸움’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우리 편’을 만들고, 어떻게든 몸집을 불려야만 논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누가 더 합리적인가가 아니라, 누가 더 목소리가 큰가의 싸움이었다는 것이다. 논리가 얼마나 부적절했든, 주장하는 사람이 많으면 이길 수 있는 싸움이었다. 상대방에게 폭격을 가하고, 정신적인 위협을 주는 방향으로 논쟁이 진행됐다.

우리 안의 비논리를 해결해야 한다. 이걸 해결하지 못하면, 온 사회가 아무리 거대한 논쟁을 벌여도 성장하지 못한다. 그러기 위해선 누가 더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면밀히 따지는, 개인의 합리적인 판단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비논리가 언제든지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성찰하고 고민하지 않는 한, 언젠가는 우리도 이 비판의 주체에서 대상으로 변할 수 있다.

신중함과 정치적 올바름은 어떤 상황이더라도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가치다.

우리는 보다 더, 현명해질 필요가 있다.

 

 

※ 이 글의 참조문헌과 사진의 출처는 widerstand365.tistory.com/941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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