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시대, 희망의 개인

절망의 시대, 희망의 개인

 세상이 절망적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사람이, 더 많은 집단이, 더 많은 국가가 절망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 희망찬 미래와, 활기찬 번영의 시대를 꿈꾸던 이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이제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오직 저무는 노을뿐이다.

혐오는 이제 일상이 되어버렸다. 인류의 절반 이상은 무자비한 혐오의 그늘에 노출되고 있다. 세상은 여성, 이민자, 난민, 무슬림, 성소수자까지, 사회적인 힘이 없는 사람들은 무방비로 혐오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러는 사이 우리의 삶도 악화 일로에 서 있다.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열아홉의 노동자는 컵라면 한 그릇 비우지 못하고 죽어가야 했다. 에어컨을 수리하다 떨어져 사망한 노동자에게 회사는 실적 압박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낮은 임금과, 불안정한 고용과, 살인적인 업무 강도가 우리를 옭아매고 있다.

꼭 우리나라의 일만은 아니다. 세계적으로 출현하고 있는 테러 집단은 극단적인 믿음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내는지 직접 보여주고 있으며, 그러는 사이 반대편에선 도널드 트럼프를 비롯한 세계의 극우파 지도자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영국은 결국 국민투표를 통해 EU를 탈퇴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유럽 증시는 폭락을 거듭했고, EU라는 공동체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지고 있다. 꼭 EU만 파괴된 것이 아니다. 국경을 넘어서 모두가 화합할 수 있다는 순진한 미래를 꿈꾸는 사람은 이제 남아있지 않다.

 

브렉시트

 

사회적 사건에 주목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삶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것은 얼마든지 체감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지표는 절망을 암시하고 있고, 우리를 둘러싼 숫자들은 종말로 향하는 화살표의 역할만을 묵묵히 수행할 뿐이다. 시대에 희망이 비집고 들어갈 틈새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숙명처럼 배워온 밝은 미래는 이제 없다. 기술이 발전해 우리를 이롭게 할 것이며, 세계는 점점 좁아져 하나의 공동체가 될 것이라는 생각. 인류는 끝없이 진보할 것이고, 우리는 언제나 그 진보의 극단을 살아갈 것이라는 믿음. 이제는 모두 허상일 뿐이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진보에의 성취감보다는 일자리에 대한 불안감이 앞서 찾아온다. 여전히 약탈과 독식, 분쟁과 점령이 인류사를 정의하고 있다. 종교와 인종과 사상과 피부색이 얼마든지 차별의 사유가 되는 세상에 우리가 서 있다.

우매한 대중과 그것을 점령하려는 정치. 민주주의의 현명한 선택은 실종되었다. 아무리 어리석은 결정이라도, 다수가 원하면 인류는 그 어리석은 길을 따라가야만 한다. 그리고 현명한 소수가 그 책임을 온전히 떠안고 있다. 민주주의란 더 이상 희망의 언어가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아있는 희망의 언어는 무엇인가. 남아있기는 한 것일까.

우리는 절망의 시대를, 앞으로도 더 절망적일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절망

 

 

하지만 나는, 여전히 세상에 희망이 남아있다고 믿는다.

온 세상의 지표가 절망을 말하지만, 그 숫자로 표시되지 않는 틈새의 희망이 남아있다고 믿는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선택이 남아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해 노력을 쏟아부을 수 있고, 이제까지의 삶을 걷어치우고 2막의 인생을 시작할 수도 있다. 이대로의 삶을 계속하는 것도 선택이며, 꿈꾸던 것을 위해 모든 것을 걸어보는 것도 선택이다. 역동적인 선택을 할 기회가 얼마든지 남아있다. 물론 언제나 자신이라는 개인의 범주 안에서지만, 그 선택이 주어지는 한 세상에 희망은 남아있다.

개인이 성장할 수 있는 플랫폼이 남아있다. 개인의 힘과 능력으로, 꼭 엄청난 부호가 되지는 않더라도, 원하는 삶을 살며 나름대로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례는 우리 곁에도 수없이 존재한다. 각자가 원하는 것을 쫓아가는 삶이, 여전히 희망으로 남는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런 개인들이 모여 아주 손쉽게 소통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는 점이다. 개인과 개인이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서로의 생각을 얼마든지 나눌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조금씩 사람들의 생각이 진보할 수 있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때로는 어느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가르쳐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든 자기주장을 할 수 있고, 듣는 사람들은 수긍하거나 반박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토론의 장이 마련된다. 때로는 철학적이거나 사회적인 주제가 다뤄지지만, 때로는 아주 실무적이고 기술적인 주제가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아이디어에서 탄생하는 혁신은 이제 일상에 가깝다.

우리 시대에 더 이상 혁명적인 변화는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기본적인 교육을 받고, 모든 사람이 국가 정책에 의견을 낼 수 있는 시대다. 사회의 의사결정 시스템에 이미 ‘모든 사람’이 들어와 있다. 인류는 자연의 많은 부분에 대해 인지하고 있으며, 우리가 모르는 나머지 부분에 혁명의 원동력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우리 절망의 원인이라면, 그럴 이유는 없다. 이젠 혁명과, 그 혁명을 이끄는 한 사람의 영웅이 필요한 시대는 지나갔다. 한 사람이 연결할 수 있는 네트워크의 수가, 공간적 제약을 뛰어넘어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 네트워크를 통해 이루어지는 소통과, 혁신과, 교육과, 토론. 그 모든 것들이 세상을 조금씩 바꾸어나갈 것이다.

 

네트워크

 

한 사람에 의해 벌어지는 혁명은 없다. 우리의 혁명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아주 조용히 다가올 것이다.

그리 멀지 않은, 바로 우리 시대의 이야기다. 이미 개인과 개인의 네트워크 속에서 벌어지는, 과거에는 주변적이라 생각했던 사건들이 사회 중심으로 접근하고 있다. 책과 영화가 대형 자본 없이 개인의 작은 돈을 모아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SNS에서 탄생한 아이디어가 실제 제품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개인방송 출연자들이 수억대의 돈을 받는 것은 물론, 이제 지상파에서 그들의 포맷을 빌려오기까지 한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방송을 만들고 원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팟캐스트와, 아프리카TV와, 유투브는 더 이상 신선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일상해 안착해 있다.

수많은 개인과 개인이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네트워크를 지배하는 힘은 존재할 수 없다. 그 네트워크 속에서 소통하고, 성장하고, 때로 좌절하고, 또 재기하는 역동적인 개인의 힘이 세상을 견인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아니 적어도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의견을 나누는 과정에서 성장하고, 논리를 보다 촘촘하게 만들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세상이 온다면, 민주주의란 모든 공동체에서 얼마든지 현명하게 이용될 수 있다.

어쩌면 민주주의란 오만한 제도다. 절반 이상의 사람이 현명하지 않다면, 사회는 퇴보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란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다. 절반 이상의 사람을 현명하게 만들겠다는, 더 열심히 교육하고, 소통하고, 때로 반성하고, 공부하겠다는 사회적 의지의 표명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는 수많은 공동체들이 가진 의지를, 그 저력을, 여전히 신뢰할 수 있다. 우리에게 남겨진 희망의 언어는 그래서 ‘개인’이다. ‘개인의 힘’이다.

 

민주주의

 

 

우리 시대의 표제는 절망이다. 더 이상 어디에도 희망이 보이지 않으며, 인류가 알고 있는 세상 바깥에서 성장의 동력을 찾아낼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우리에게로 돌아와야 한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그 역동하는 힘과, 주고받는 말과 글 속에서 진보하는 사회가, 이제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힘이다.

인류의 역사는 언제나 폐허 속에서의 재건이었다. 폐허가 되어버린 시대를 재건하는 일은 인류가 그 긴 역사를 두고 언제나 해왔던 일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재건의 동력은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인류 스스로 그것을 만들어내고 있다.

 

 

세상은 여전히 절망적이고, 세상 이야기를 하는 나는 그래서 앞으로도 절망을 논할 것이다.

높은 등록금 때문에 한 평짜리 고시원에서 잠을 자는 청춘이 있고, 사회에 나가자마자 받아든 것은 오직 빚뿐인 청년들이 있고, 생존의 문턱에서 허덕여야 하는 빈민이 있고, 거리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하는 장애인이 있고, 마음껏 사랑할 수 없는 성소수자가 있고, 저녁에 친구와 농구 한 판 대신 오토바이를 타고 음식을 배달해야 하는 청소년들이 있으므로. 나는 여전히 절망을 논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아무리 절망적이어도, 아직 개인이 가질 수 있는 힘을 끝까지 몰아치진 않았다. 우리에게는 아주 약간의 틈새가 남아있다.

그리고 그 약간의 틈새가 세상을 바꾼다. 틈새를 통해 사람들과 만난 현명한 개인이 세상을 바꾼다. 그리고 그 현명한 개인을 만들어낼 동력은, 우리 사회에 얼마든지 남아 있다.

절망이 세상을 지배하지만, 그 절망을 규제할 힘과 시간이 여전히 남아있다.

 

아침

 

 

쉬지 않고 가다보면 언젠가 끝이 보이는 법이다. 물론 중요한 것은 ‘언젠가’가 아니라, ‘쉬지 않고’다. 나는 오늘 희망의 가능성을 논하지만, 그 가능성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남는 것은 없다.

그렇기에 희망을 찾기 위해선 지금보다 더 많은 힘을 쏟아부어야 할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미안하다. 세상과 개인은 당신을 필요로 할 것이다. 당신의 힘을 필요로 할 것이다. 절망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필요로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희망을 노래할 것이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 기형도, ‘정거장에서의 충고’ 중에서.

 

 

※ 이 글의 참조문헌과 사진의 출처는 widerstand365.tistory.com/949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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