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저드 계획(Tizard Mission)

*팟캐스트(http://www.podbbang.com/ch/7658) 레이더 편 원고를 쓰면서 조사를 하다가, 한국어 인터넷에 너무나 자료가 없기에 글로 남겨둔다. 혹여나 나처럼 인터넷으로 조사를 하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자료, 최소한의 검색어 하나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난 뒤, 영국은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이었다. 나치 독일은 호시탐탐 영국을 노리면서 공습과 폭격을 이어나갔고, 아무리 영국의 자원을 모조리 쥐어 짜도 총력전을 감당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해상 무역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섬나라 입장에서 전시 체제를 버티는 건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다.

일종의 돌파구가 필요한 상황. 이때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한 가지 결단을 내린다.

이분 말고...
요즘 잘나가는 이분 말고 다른 분

일명 티저드 계획(Tizard mission)이다. 대략적인 얼개는 이렇다.

*영국이 독자적으로 갖고 있는 기술들을 미국에 제공한다. 동시에 과학 연구가 영국보다는 원활하게 진행되는 미국의 과학 기술들을 수혈받는다. 전시에 먹고 살 것도 없는 영국의 상황에서는 연구를 더 이상 진행할 수가 없으니까.

*이를 통해 미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더이상 진행되지 않던 과학 연구를 미국의 손을 빌려서 계속 진행한다. 동시에, 영국이 기술은 갖고있지만 대량생산을 못해서 실전에 써먹지 못하는 물자들을 미국에 의뢰해서 생산한다.

대충 생각하기로는 쉬운 얘기다. 어차피 독일이라는 공동의 적에 맞서 싸우는 입장에서 좋은게 좋은거라고 손을 잡으면 일사천리로 해결될 이야기처럼 보이니까.

하지만 어디 세계사가 그렇게 만만하게 굴러간 적이 있었던가. 반대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정신나간 짓이다.

*미국을 믿을 수 있는가? 전쟁 상황에 대체 누구를 믿을 수 있을까. 독일이 정신이 나가지 않은 이상 미국을 공격하는데는 대서양이라는 물리적 한계가 있고, 아무리 전쟁이 멀리까지 퍼져도 미국에게는 남의 집 불구경이다. 미국이 기술만 낼름 집어먹고 영국의 뒤통수를 친다면 영국은 자멸한다.

*보안을 장담할 수 있는가? 기밀은 지정하는 순간부터 유출의 위험이 함께한다. 자국 내에서도 독일 스파이의 위험이 있는 상황에, 무려 타국에다가 국가 과학 기밀을 넘기는 일인데 무슨 사고가 날지 어떻게 알까. 미국 안에 독일 스파이가 있다면 적에게 고스란히 기술을 갖다 바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미국이 과연 이 기술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을까? 영국은 스스로 기술을 연구해냈으니 가치를 알아본다. 미국도 그럴까? 아무리 과학이 이성적으로 움직이는 학문이라 해도 정치적 가치는 매기는 놈 마음대로다. 미국이 기술의 가치를 후려치거나, 심할 경우 아예 ‘그게 뭐 대단하다고’따위의 소리를 하면 외교적 성과는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다. 어쩌면 과학자들이 기술의 가치를 알아봐도 정치인들이 거기에 동의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아마 영국 내부에서도 격론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 자세한 속사정은 알기 힘드나, 처칠은 계획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이쯤 되면 정치를 종합예술이라고 부를 만 하다.

이 중차대한 임무를 맡은 사람이 헨리 티저드. 영국 항공연구위원회 위원장인 동시에, 과학계 엘리트였다.

레이더의 발명 과정을 다룬 BBC 영화 'Castles in the sky'의 헨리 티저드. 실제 인물이랑 똑 닮은 사람이 연기했다.
레이더의 발명 과정을 다룬 BBC 영화 ‘Castles in the sky’의 헨리 티저드. 실제 인물이랑 똑 닮은 사람이 연기했다. 영화도 강력추천. 어딜 가나 과학자는 제대로 대접받는 일이 드물다는 걸 잘 보여주는 영화(검색할때 뒤에 film이나 2014를 꼭 덧붙이자. 안그러면 <천공의 성 라퓨타>가 나온다)

미국이 알아먹을지 못알아먹을지는 모르겠으나, 그 기술들에 대해 설명할 사람으로서는 최적의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이 계획은 티저드 계획(Tizard mission)이라고 불리게 된다. 외교사절은 이래서 슈퍼 엘리트를 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손건 좀 그만 까라. 그냥 편지 셔틀이 아니라 외교 엘리트라고
그러니까 손건 좀 그만 까라. 그냥 편지 셔틀이 아니라 외교 엘리트라고

티저드는 보따리를 싸들고 비밀리에 미국을 방문한다. 보따리 안에는 21가지의 기술이 들어있었는데, 눈에 띄는 것 몇가지를 보자.

*영국의 암호 해독 기술: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 보면 잘 나온다. 독일의 에니그마, 일본의 퍼플은 여러가지 의미로 악명높았고, 이걸 해독하는 데에 영국의 암호 해독 기술은 직간접적으로 크게 기여한다.

*공진기형 마그네트론: 내가 팟캐스트를 하면서 가장 머리를 쥐어뜯은 물건. 아무리 설명을 읽어봐도 문과인 내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된다. 전파를 엄청 막강하게 뻥튀기시키는 장치다. 출력이 부실했던 레이더의 성능을 급격히 향상시키면서 독일 공군으로부터 영국을 지켜낸 결정적 장치라고 한다. 영국 내 자체 생산이 어려워서 미국에 생산 대행을 의뢰했다. 특히 이 물건이 미국에 더욱 충격적이었던 점은 처음엔 미국에서 개발된 장치였다는 점. 영국이 개량해서 실용화하는데 성공했는데, 미국인들은 ‘미국 해안으로 들어온 화물 중 가장 가치있는 것’이라는 극찬을 할 정도였다. 자국 원천기술이 해외에서 더 업그레이드된 채 외교적 거래 대상으로 되돌아온 것을 본 기분은 어땠을까.

*방탄 고무: 총알에 맞으면 충격을 흡수하고 총알을 감싸버리는 고무. 가뜩이나 무게 때문에 장갑을 두껍게 만들 수 없는 비행기, 그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연료통을 감싸는데 사용해서 비행기 방어력을 높임.

*제트 엔진: 영국에서 연구하고 있던 최신 제트엔진 디자인도 이때 미국에 전해진다.

*그리고… 종이 쪼가리 몇 장: 실질적 물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문서의 길이도 그렇게 길지 않았다. 제목은 ‘튜브 합금 프로젝트’따위로 위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모든 기술 중 가장 막강한 내용이 담겨있었다. 원자폭탄에 대한 연구로, 영국 물리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원자폭탄을 실제로 만들 수 있다는 연구 보고서가 티저드의 보따리를 타고 미국에 전해졌다.

티저드의 브리핑을 들은 미국 과학계는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과학이 이정도까지의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점, 타국과의 과학 수준 비교를 통해 자신들의 상대적 위치를 확인한 점, 독일도 과학 선진국인데 혹여 이런 수준의 무기를 이미 가지고 있는 건 아닌지에 대한 불안감 등등으로 발칵 뒤집혔다. 미국은 영국의 제안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고, 거기에 맞게 과학적, 정치적으로 대응하기로 결정한다.

이 사건 이후 미국의 무기대여법이 가결되면서 미국은 연합국 전체에 전쟁물자를 갖다 뿌리기 시작한다

이분들이 출동하시니
이분들이 출동하시니
이런 기적이 일어나더라
이런 기적이 일어나더라

영국은 무기대여법의 가장 큰 수혜자 중 하나다. 결국 생산력 싸움이라는 점에서 미국은 진주만 공습 이전부터 2차대전의 판도를 좌지우지하고 있던 셈이다(무기대여법이 티저드 계획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법이 맞는지에 대한 정확한 근거 자료는 찾지 못했다. 영문 위키피디아 토론방에서 이 영향을 기술해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 정도만 찾을 수 있었다)

미국 과학계는 받은 충격에 자체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한다. 티저드를 만난 사람 중에 바네바 부시(Vannevar Bush. 이 양반도 미국 과학사를 뒤흔든 양반 중 하나다)라는 사람이 있었고,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에게 국가 방위 연구 위원회(National Defense Research Committee)를 만들 것을 제안한다. 이름이 더럽게 길고 복잡하지만 내용은 단순하다. 온갖 과학자와 공학자를 잡아다가 갈아넣자는 것, 공밀레와 과밀레를 실행한 것이다. 그중에 혹시 군대에 가야 할 사람이 있다면 병특을 줘서라도 잡아다 연구를 시키자는 것.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지만, 장래가 창창한 과학자들도 알보병으로 끌려가서 총알받이처럼 죽어나가는 일이 허다했던 시절이다.  그리고 또 하나. 예산 사용, 연구 목록 등 모든 부분을 위원회가 자체적으로 결정하며, 정부나 군부의 간섭을 받지 않게 해 달라고 제안했다.

루즈벨트는 바네바 부시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공계 인력을 수만명 단위로 데려다가 갈아넣었다. 그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미국이 핵폭탄으로 2차대전 막타를 넣게 된다. 처칠도 처칠이지만, 루즈벨트의 결단력도 대단했다. 두 정치인의 판단이 세계 역사를 바꿔놓은것이다.

Atomic_bombing_of_Japan

과학기술과 전쟁무기, 정치인 얘기가 뒤섞인 얘기를 보고 나니 어떤 생각이 드는가. 나는 자료를 조사하는 내내 싸드 생각밖에 안났다. 외교적 관점에서 우호국을 선택하고, 일정 비용을 소비한 다음, 국익을 챙기는 것.

물론 티저드 계획도 철저하게 비밀로 취급됐던 작전이고, 나중에 기밀문서 같은 것들이 공개되면서 대중에게 알려졌을 것이니 싸드도 이런저런 사정이 있을 수 있다. 대의민주주의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한국 정치인에게 처칠이나 루즈벨트같은 사기 유닛 수준을 요구하는 것도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치인들에게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니다. 최소한, 티저드 계획 초반부에 모두가 걱정했을 문제들에 대해 고민했던 것처럼 국가의 이득과 손해에 대한 생각만큼은 해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싸드 얘기만 언론에 나왔다 하면 성주 참외와 외부세력 얘기만 나오는 현실에 한숨이 나올 지경이다.

참고자료

<전쟁의 물리학> 배리 파커, 북로드, 2015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 어니스트 볼크먼, 이마고,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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