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

이걸 행운이라고 표현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굉장히 행운을 많이 타고난 사람인 걸로 느껴진다.

로또에 맞거나 무슨 엄청난 좋은 일이 생기는 행운이 아니다. 오히려 좀 반대쪽인데, 뭔가 파국에 이를 정도로 심각한 재앙이 올 때, 간발의 차이로 살짝 비켜서거나 빠져나오는 일이 무척 많다.

학생시절, 꽤 큰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함께하던 친구들 몽땅 연행되고 재판받고 그러던 사건. 그 때 나도 현장에 있었어야 할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빠지게 되었고, 일이 해결된 뒤에도 묘하게 가기가 싫어서 농뗑이를 피웠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결론은 나만 빠짐.

군대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고, 사회 나와서 월급 받던 시절에 아무래도 낌새가 이상해서 회사를 옮겼는데 3개월이 못가 회사가 부도난 일도 있었고..

한참 바쁘게 사업할 때에 좀 큰 병이 걸린 적이 있었는데 그 때도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해서 병원에 먼저 찾아갔더니, 정말 잘 왔다고 조금만 더 지났으면 심각해질 뻔 했다는 얘길 들었다.

자동차에 관해서도 비슷한 경험이 꽤 있다. 나름대로 차를 열심히 관리를 한다고 하면서도 워낙 정기적인 일을 챙기는 걸 귀찮아 하는 스타일이라 가끔 꽤 오래 정비를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뭐 특별히 바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정비소를 가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다. 그 때 정비소에 가보면 이런 얘기가 나온다.

“조금만 더 무리하게 운행을 했으면 심각한 문제가 생겨서 주행중에 사고 나실 뻔 했다.”

물론 꽤 오래도록 관계를 유지해 온 단골 정비사라서 장사 해먹으려는 멘트는 아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나중엔 내가 정기적으로 오일 갈고 필터 갈고 하러 가도 정비사는 뭔가 심각한 결함이 생기는 중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여기저기 찾아보곤 한다.

이번에도 그랬다.

오른쪽 윗 치아 사이에서 생긴 종양이 느린 속도지만 꽤 커졌었고, 조금만 더 자랐으면 중앙선을 침범하고 수술이 불가능한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암환자의 입장에서는 “수술이 가능”하다는 판정이 얼마나 행운인지 모른다. 병실에서도 서로들 부러워 하고 축하하는 수준.

거기다가 또 막상 수술을 하는 과정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을 또 발견하기도 하는데 그런 것도 없었다. 수술은 매우 힘들었지만 깨끗하게 잘 되었다는 판정. 방사선 치료도 뭔가 존재하는게 확인된 종양을 축소시키거나 하려고 적용하는 방사선 치료가 아니고, 발견이 안되었지만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암세포를 줄여 재발의 가능성을 낮추는, 그러니까 꽤 희망적인 방사선 치료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주치의 선생님의 말씀은, 보기 드물게 좋은 케이스니까 앞으로 건강 관리 잘하고 잘 먹고 운동 많이 하고 건강하게 사시라는 결론. 제 때 처리가 되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 얘기가 남게 되었다.

물론 오른쪽 윗 치아 8개가 사라져 버리고 윗 턱뼈, 입천정의 반이 사라져 평생 보철을 이용해 먹고 마시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 입장이지만 그것도 해 보니까 뭐 그럭저럭 해볼만 하다. 좀더 지나 수술 자리가 안정되고 고정되면 보철도 새로, 오래 쓸 수 있는 걸로 제작해 준다고 하니까 뭐..

이제 남은 것은, 나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들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점인데..

물론 “재발”이라는 치명적인 상황이 한 쪽의 옵션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그런데 내가 그 재발을 막기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는데 뭐 어쩌겠는가?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시간을 즐기되, 지나치게 장기적이거나 감당하기 힘든 책임 같은 것에는 나서지 말아야 할 것이며..

백날 고민해 봐야 대책도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냥 잊고 지내자”는 정책을 취하기로 했다.

뭐 정기적으로 검사를 할테니, 그 문제는 의사들이 알아서 하라 그러기로 하지.

자 이제 내게 주어진 이 새로운 시간을 어디에 쓸까?

일단 뒷산에 가서 산책을 하며 좀 생각해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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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우리집 뒷산에는 이런 곳은 없다.

 







4 thoughts on “행운

  1. 분명희행운입니다.저또한 부동맥으로 심장에 재새동기를 달고 살고 있지만,,그로인해 조금이나마 건강을 챙길수 있어서..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2. 저에게는 언제나 슈퍼맨 같이 든든한 버팀목이고 강하다고 생각했던 저의 아버지도 가는 세월은 어쩌지 못하시는지
    요즘들어 아버지를 볼때마다 아버지라기보다는 70세가 훌쩍 넘으신 머리 희끗한 할아버지로 느껴지더군요.
    지금까지 처럼 언제나 제곁에 계셨는데 남은 시간이 얼마 안된다는걸 깨닫게 되니 애잔한 생각도 들고 그동안 사회생활하며 좌절하고 맨붕오고 열등감에 사로잡혀있을때마다
    스스로를 탓하기보다는 흙수저 마인드로 거들먹거리면서 아버지한테 심한말하고 원망하고 탓을 했던걸 생각하면 참 쥐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돌이켜보면 저희 아버지는 남들이 겪을수 있는 불행이란걸 저에게는 겪지 않게 하기위해 본인이 할수 있는 모든걸 다 하고 인생를 받치셨다는것을 너무 늦게 느끼게 된것 같습니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좋은 기억이 떠오르고 추억할수있는 아버지를 만나고 그의 아들로 살아온것만해도 저에게 주어진 큰 행운인걸 이글을 보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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