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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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만든 로버트 레드포드 감독은 이슈 자체보다는 그 이슈 근저에 내재한 것에 대한 관객의 시선을 묻고 있습니다. 세 개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스냅 샷 식으로 진행되는 이 영화는 교육과 언론, 정치가 우리 삶에 어떻게 평가받고 이해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거든요. 결국, 우리가 사는 시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1. 교육을 이끌어 가는 교수의 역할과 정치

말리 교수와 학생 토드, 그들의 대화에 담긴 의미를 파악해야만 합니다. 교수와 학생은 논쟁을 벌이는데 두 역할에서 나 스스로 던지는 질문은 ‘이 시대에서 한 개인의 책임은 과연 어디까지이며, 도대체 무엇이지?’ 였거든요.

말리 교수는 한때 총명했던 젊은이로 생각했던 학생이 남학생 사교클럽 등 사교 활동에 더 관심을 쏟으며 자신의 머리를 과신하고 노력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그의 잠재력을 끌어내고 싶었던 것이고 토드라는 학생과 마주 앉게 된 거죠. 그는 토드와 논쟁을 벌이면서 이 영화는 왜, 이런 논쟁이 필요한가에 대해서 풀어나갑니다.

 

“내가 가장 아꼈던 두 제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면 내가 자넬 왜 불렀는지 이해가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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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빈부 차별 없이 하나 되는 건 좋은 거 아니야? 미국인이라는 공통점으로! 그럼 평등한 국가가 될 수 있어. 이대론 안 돼.”

 

영화에서 두 친구는 자신의 신념을 증명하기 위해 행동을 합니다. 더 나아질 국가를 위해, 개인의 필요에 의해 ‘최선’이라는 선택을 말입니다.

 

“어니스티와 이리안은 자원한 거죠? 모험을 즐기는 타입인가 보죠?”

“아니, 아니야. 모험을 즐기는 타입은 아니야. 두려움에 강한 거지. 겁이 나도 견디며 한 걸음을 내딛는.”

“용기가 있다?”

“진정한 용기지. 자넨 뭐가 두렵나? 대부분 학생은 실직, 학자금 대출 등이 고민거린데”

“저도 그래요.”

“이런 고민도 하지. 내가 재능을 썩히고 있진 않나? 내가 최선을 다하고 있나?”

 

말리 교수는 토드에게 있는 학구적인 그의 잠재력이 완전히 관심을 잃기 전에 중요한 일에 관심을 두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현재, 그는 활력 넘치고 적극적이었던 입학 당시의 똑똑하고 비범한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어요. 부유한 부모 밑에서 편한 삶을 영위하고 즐기고 있는 젊은이일 뿐이거든요. 교수와 학생은 논쟁을 통해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두 사람의 논란은 나라 없는 미래가 보장될 수 있느냐에 초점이 모여집니다.

이 사회에 만연된 절차의 무시됨과 정권의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들을 마주하게 되면서 대학 교육만이라도 바로 설 수만 있다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지더라고요. 물론 불가능하지요. 대학은 제 역할을 포기한 지 오래거든요. 학문탐구의 역할은 뒷전이고 한국 사회의 심각한 병폐인 학벌 사회에 걸맞은 기업식 구조 조정을 마구 휘두르고 있으니까요.

최근 중앙대를 필두로 시작한 학부제로 전환하는 것을 골자로 한 학교 측의 ‘학사구조 선진화 계획’은 과거의 학부제와 같이 취업률이 낮은 학과 즉, 기초학문, 인문학, 예술 분야를 가장 먼저 고사시킬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기초 학문이 사라진다는 것은 높은 건물을 지을 때 기초 공사가 부실해서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과 다르지 않겠지요. 그 이후 대학은 어떻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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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넨 현실과 섞이길 원치 않지. 하지만 너의 무관심이 정치인들에겐 전략적인 이용 거리야. 그 무관심을 이용해 자기들 몫을 챙기지.”

“다 제 탓이다? 집안의 전 세대가 자손에게 편한 삶을 주기 위해 노력했고, 이제 그 후손들이 즐길 수 있는데 내가 왜 죄의식을 가져야 하죠? 교수님과 생각이 다르면 비난받아야 하나요?”

“물론 남의 일인 양 방관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많아.”

“노력 않기보다는 실패해라? 다를 게 뭐죠? 결과는 같은데!”

“해 봤다는 게 다르지. 자네는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나?”

 

혹시 이 영화에서처럼 교수와 사회문제에 대해, 혹은 자신의 진로에 대해 격의 없이 논쟁해 본 적 있나요? 만약 있었다면 그 논쟁을 기억해 봐도 좋을 겁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 논쟁을 하다 보면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기도 하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현실을 만나는 당혹감도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학과 젊은이들은 정치나 사회 개혁에 대체로 반응이 없어 보입니다. 자기 이익과 미래의 관심에 치우쳐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해요. 지금 거론되는 수많은 말들을 생각해봅니다. ‘감정 노동자’ ‘열정 페이’ ‘비정규직’ ‘임금 피크제’ 등 나의 현실이고 미래는 지금보다 더 혹독하게 되겠지요.

결국, 사회제도가 바뀌지 않는다면 핑크빛 미래는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노동 착취를 가능하게 했을까? 정치인들은 뭘 하는 거지? 정치 체계에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아서 정치는 제멋대로 놀아나는 걸까? 정치의 기만과 이중성, 모호함 등 그에 대한 생각을 묻는 것 자체를 불편하고 무겁게만 받아들이진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 현실이 가져올 우리들의 미래, 과연 어떤 대가를 치를지. 하긴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 대가를 치르는 중이니까 멈출 방법이 필요합니다.

개개인들이 놓인 상황은 다양하지만, 이 영화에서 우리에게 묻고 있는 질문에 답할 수 있으면 싶었어요. 교육이 처한 현실에 좀 더 관심을 두고 적극적인 해결 방법을 찾아내야만 한다는 것은 물론입니다. 어쩌면 지금이 역동적인 역사의 흐름을 다양한 방법과 다양한 목소리로 듣고 보고 현장에서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최초의 세대임과 동시에 최후의 세대일지도 모르잖아요.

 

  1. 언론인의 역할과 개인, 그리고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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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제니는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객관적인 저널리스트로서 회의적이지만 훌륭하고 총명한 기자입니다. 현재는 당내에 영향력 있는 상원의원인 어빙이 일리노이주의 젊은 신예 의원이었던 시절, 이 젊은 의원이 공화당의 미래라고 기사를 썼지요. 이 기사는 어빙 의원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당시에는 좌익 기자라는 딱지를 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편파적인 기자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였어요. 훌륭한 기자로서 상원의원이 된 어빙이 당내 신선한 바람이라고 여겼기에 그에 대한 기사를 썼던 거지요.

상원의원은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 그녀를 선택했습니다. 자신을 알려지지 않은 정치 신인 시절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지명도 높은 기자였으니까요. 하지만 상원의원에게 관심 있는 것은 자신이 속한 정당의 강력한 지지를 얻기 위한 승리일 뿐이었죠. 그 어떤 희생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의문을 갖지 않습니다. 그는 헌신적이며 당 이념에 충실하며 게다가 자신만만한 인물이기도 해요. 국익을 위한 대외 정책보다는 하락 일로의 당을 위한 구원자가 되고 싶어 하는 거지요. 젊은 시절 넘치는 신념의 정치인이 변질되지 않는 건 가능하지 않나 싶더라고요. 그죠. 이십 대에 먹은 초심을 평생 지켜나갈 수 있는 신념 있는 인물로 남기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싶습니다.

 

“중요한 건 이 전략이 인내와 결단을 요구한다는 거요. 적의 신속한 발견 및 제압이 관건이죠. 그게 아프간 재건의 길이고 어떤 대가도 감수할 거요.”

“왜 대통령은 지금 잠수함과 전투기 개발에 거액을 투자하려고 하죠? 왜 우릴 침공 안 한 나라에 아프간의 10배나 되는 병력을 보냈죠?”

 

제니는 언론인으로서 어느 정도의 책임을 느끼며 젊은 시절과는 달라진 상원의원 어빙이 조직망, 기존의 정치 시스템에 완전히 동화된 모습을 발견합니다. 좀 더 독창적이며 독립적인 인물로서 많은 장점이 있었는데 안타까워합니다.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분노와 공포까지 느끼게 되지요. 그것은 한 상원의원의 야망으로 국가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현재 그녀는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이전과 같은 선택권을 갖고 있지 못하고 기업화된 미국 회사를 위해 일하고 있죠. 미국 대기업의 뉴스 통제는 1980년대 후반부터 발생하여 오늘날 몇 개의 대기업이 모든 뉴스를 만들고 있는 실정이래요. 이것은 국익에 결코 이로운 것은 아니잖아요. 지금 우리의 현실과 흡사한 자본과 권력에 부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영화 속에서도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더라고요.

그녀는 상원의원과의 인터뷰를 기사화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상관은 주목받고 있는 젊은 상원의원과 1시간의 단독 인터뷰 기사를 종용하거든요. 상관과 언쟁을 벌이지만 이미 50대 후반이 된 자신의 재정적인 안정을 위해 모든 것을 묵과하고 기사를 써야 하는지 아니면 진정한 기자로서 자신이 본 대로 진실을 기사화해야 하는지 갈등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결국 그녀도 현실의 자신을 밀어내지 못하고 상관의 말대로 합니다.

 

  1. 진보는 정치와 마음껏 노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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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TV를 바라보는 두 청년의 모습에서 우리의 미래를 변화시킬 힘이 결국 자신 안에 있음을 경험하게 해줍니다. 내가 그것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결코 그것은 묻혀 빛을 잃고 일상의 안락함으로 무관심해진다는 겁니다. 미래에 누릴 삶을 형성하기 위해 ‘나는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개인을 향한 끝없는 질문입니다.

언론인 제니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제니가 침묵을 하고 상원의원이 요구했던 기사가 뉴스 자막에 보입니다. 그 뉴스에 말리 교수와 논쟁을 벌였던 토드가 눈을 반짝이며 자세를 바로 하고 앉거든요. 아마도 제니처럼 우클릭하는 기성세대가 있는 것처럼 또 다른 젊은 세대에서 누군가 좌 클릭할 수도 있다는 의미일까? 음, 고민 좀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도 영화 속 말리 교수의 말을 떠올려 보면 어떨지요.

 

“병적으로 변형된 정치에 믿음을 갖지 않은 채 시간이 흐르면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정치를 계속하도록 기회를 주게 되고 그 결과 상황은 치명적이다. 변화가 필요하다면 그 변화는 미래 젊은이들의 몫이다.”

“지금 내건 결정은 끝까지 너를 따라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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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시작되면서 나오는 첫 장면인데 뉴스에는 이라크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뉴스를 바라보는 토드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지요? 이 뉴스가 텔레비전으로 나오기까지의 그 이면에 벌어진 일들, 토드와 논쟁을 하는 말리 교수와 이라크 전에 참가해야 했던 두 학생의 순수한 신념에 찬 목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국가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진 무모한 전쟁에서 일어난 두 대학생의 죽음은 왜 일어나야 했던 거지?

영화 속에서 말리 교수는 사회 개혁의 시작은 미래 세대의 몫인데 그것 또한 개인의 선택이라는 말을 해 줍니다. 민주주의는 제도에 의해서 꽃을 피울 수 있는 거니까요. 나는 그 제도가 그나마 인류의 진보 위에서 덜 나쁘기 때문이라는 누군가의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도가 잘못되었다면 고쳐야 하는 것인데 그 일을 하지 않는 정치는 결국 위기에 내몰리는 현실을 만들게 됩니다.

원인을 찾아보면 우선 가장 시급한 것은 언론의 역할을 기대할 수 없는 사회 환경이겠지요. 또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권력에 매달린, 서글픈 정치 철학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정치인들과 정파에 매달리는 행태들입니다. 시민을 기만하는 정당들에도 있습니다. 물론 역사 앞에 누구도 무죄일 수 없는 이 나라의 주인들에게도 있거든요. 그래서 현실에서 정치 제도에 혁신이 필요한 이유가 넘친다는 겁니다. 합법을 이용한 국가 폭력과 기업의 도적질. 멈추게 만들어야겠지요.

이집트의 피라미드 건설 과정의 어두운 면에는 수많은 이집트 백성들의 고통이 있었다는 거 짐작하지요?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향한 개인들이 선택해서 치른 희생들은 민주주의라는 피라미드를 향해 나아가는 데 큰 힘을 건네고 있습니다. 피라미드를 쌓아가는데 각자의 역할이 소홀하여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면 피라미드라는 구조물은, 민주주의의 가치는 하나의 점으로 합해져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정치를 외면해도 생활하는데 직접적인 영향이 없었고, 더욱이 내 방식의 삶을 살아오는데 큰 문제 또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선진 사회와 후진의 차이는 ‘사람’에 의존하느냐 ‘자본’에 의존하느냐에 달린 문제 같습니다. 이 현실에서 당면한 문제에만 급급하게 대처하기보다는 멀리 내다보며 미래 세력을 양성해야 하는 간절한 이유이기도 하지요. 국가의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이 교과서의 죽은 지식으로만 자리 잡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게 됩니다.

교육 전체의 혁신은 당장 힘들다 해도 그것은 위로부터의 시작으로 준비되면 열릴 수 있는 가능한 변화라고 생각되거든요. 그 위로부터 가능한 권력을 우리가 만들어내야 한다는 거,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정당에 무조건 맡길 것이 아니라 십 대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정치에 입문할 수 있도록 사회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요.

왜 전문적인 차세대 정치인의 양성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지 너무 궁금합니다. ‘정치인’이기보다는 ‘정치가’로서 그의 철학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조율된 사회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게 진보하고 싶지 않아요? 정치와 마음껏 놀아보면 재미가 쏠쏠합니다. 정치가 얼마나 현실의 영역인지 놀다 보면 절로 알게 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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