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는 단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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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세계에서나 가능할 것이라 여겼던 일들이 이번 정부에 들어서는 그 정도를 너무 넘어간다. 내년이 대선인데 줄줄이 튀어나오는 사건들은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정과 비리의 의혹이 대통령과 관련하여 넘친다. 임기 초부터 말기가 되기까지 제대로 시민들과 소통하여 합의해 처리되는 일은 거의 없나 보다. 도대체 행정부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는 상태라면 이 나라는 어디를 향해 가는 건지.

19세기 독일 작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미하엘 콜하스』를 보면 그의 열정이 깃든 삶의 방식처럼 그의 행동도 단순하다. 그래, 정의감은 너무 단순한 거였다. 그 단순함을 지나치면 정의감은 행위로 이어지기 어렵다. 같은 시대, 같은 상황이 아니라 해도 삶의 보편성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에 그의 행동은 결국 그의 삶을 전혀 다른 미래로 향하게 했다. 삶이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내가 삶을 버릴 수도 있었던 거였다.

한 개인이 선택한 정의를 향한 외로운 투쟁이었다. 개인이 터뜨리는 ‘분노의 표출’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하늘의 파란빛이 더는 파랗게만 보이지 않는다. 문학으로 삶을 위안하는 것조차 허용하기 어려운 것 같다. 그 작품에 침잠하여 그 후에 찾아낼 삶의 의욕이 없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생전에 동시대인들과의 소통에 실패하고 동반자살로 생을 마감한 작가는 20세기에 들어서야 그 천재성을 인정받은 불운한 작가라 한다.

불운하다는 것도 타자의 시선이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는 자기 삶을 살다 자신이 선택한 방식으로 떠났다. 보통 사람들과 달리 그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문학 작품이 그를 지금까지 느끼도록 할 수 있으니 불운이라거나 불행이란 말로 그를 부르기는 어쩐지 싫다. 그의 단편 모음집 『버려진 아이』에는 ‘희망’이란 느낌이 깃들 수가 없다. 내 나라의 현실만큼이나 처절하고 분노가 차오른다. 소설이라고? 맞다. 다행히도 소설이다.

『미하엘 콜하스』를 원작으로 만든 아르노 데 팔리에르 감독의 영화 ≪미하엘 콜하스의 선택≫에서 콜하스는 부당한 현실에 ‘정의감’으로 적극적인 저항에 나선다. 하지만 그도 정의롭지 못한 그 시대정신에 갇히게 된다. 정의 실현의 과정에서 폭력이 발생하는 근본 원인에 집중할 수 없다면 불의에 저항하는 행위는 같은 결과를 반복할 뿐이다. 마지막에야 죽음을 앞두고 그가 원한 정의의 선택은 이루어졌다. 원작과는 차이가 있지만 자기 목숨까지도 바쳐 지켜야 했던 것, 정의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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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님, 통행료 징수권은 없어졌다고 들었습니다.

저를 속이셨더군요.

제 말을 예전 그대로 돌려주십시오. 법원에 고소하겠습니다.

 

그가 그 시대에 순응했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별로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적당한 재산과 자기를 흠모하는 주변인들과 사랑하는 가족과 적잖은 풍요는 그의 성실함으로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기에. 말 중개인으로 잘 먹고 잘살았을 것이다. 미하엘 콜하스의 행동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근본적인 성찰을 할 수 있다면 단순히 그의 정의로운 행동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정의에 저항한 그의 선택이 어떻게 가능했는가에 시선이 머문다.

그가 원한 것은 뜻밖에 단순하다. 소통이었다. 그 사회가 만든 법과의 소통, 강자에게만 유리한 법이 아니라 정의로움에 손을 들어줄 수 있는 법이었다. 하지만 법은 그들과 결탁한 강자들의 편에서 그를 우롱했고 그는 행동에 나섰다.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거의 모든 것을 잃은 개인의 극단적인 모습을 소설에서나 볼 수 있으면 좋은데 내 눈앞의 삶에서도 그런 소설이 읽힌다.

한 개인의 힘으로 대항할 수 없는 불의를 공감했다면 행위의 사회 연대가 절실하다. 현재는 국가 폭력으로 목숨을 잃은 농민의 유가족과는 상관없이 강제로 부검을 한다고 시민들과 대치 중이다. 법치가 저들 편리하게 협치로 둔갑했다. 매일 불거지는 최순실 게이트로 시끌벅적하지만 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검찰이 강제부검 처리처럼 신속하게 움직이고 있는지 의문이다.

뉴스로 겹겹이 쌓아놓은 ‘사태’가 산을 이룬다. 불과 몇 년도 되지 않은 불의한 일들은 다 잊혔거나 여영 부영 세상의 시선에서 사라진다. 쌍용차 해고노동자 사태를 말해주는 스물여섯 켤레의 주인 없는 신발, 세월호 참사의 주인 없는 250개의 가방, 두 개의 사태만 언급해도 한국 사회의 현실을 말해주는 데 부족함이 없다. 이런 일들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걸까. 최소한의 도덕을 규정한 법의 실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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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미하엘 콜하스는 모든 것을 다 잃었다. 그가 얻은 것은 없다. 목숨까지도 잃는다. 다만 원작과는 다르게 영화에서는 ‘정의’라는 실체 없는 그것이 실현된다는 결말이다. 원작을 읽는 내내 불편한 마음에 자꾸 현실이 떠올라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영화에서조차 정의를 외면했다면 영화관에서도 폭동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고 있다. 정의는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다고 해서 지워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21세기에 살면서 샤머니즘 정치학이라니. 뭔가 아싹하다. 진화하지 못한 문명. 주체 반납. 이것도 숙명론으로 받아들일 건지. 또 누군가는 병풍 뒤로 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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