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 어디까지 왔나

 

 

2016년이 저물고 있다. 한 해를 마감하는 글로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하는 고민을 하다가 결국 내가 할 얘기가 기본소득 말고 뭐가 있겠나 싶어서 또 꺼내본다.

최초로 기본소득 이야기를 글로 선보인 시점이 찾아보니 2012년 7월이었다.

http://murutukus.kr/?p=4688

기본소득에 관한 글들 모음은 이 링크를 이용하면 볼 수 있다.

http://murutukus.kr/?cat=2848

물론 그 이전부터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가 있음을 알고 책을 보고 자료를 뒤지고 그러는 시간이 있었으니, 대략 2012년 초부터 관심을 가졌던 걸로 기억이 된다. 다시 읽어보니 지금과는 참으로 많이 다른 관점에서 기본소득 얘기에 접근을 했던 것 같다.

당연한 것이 사람의 아이디어라는 것은 무수히 많은 반론들에 의해 단련되고, 실제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의해 변형되며 무엇보다도 스스로 많은 공부와 고민으로 갈고 닦으면서 점점 더 구체화 되는 법이니, 바뀌지 않았다면 더 큰 문제일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

2012년 당시에만 해도, 기본소득은 완전히 뜬구름 잡는 헛소리였다. 사람들에게 설명을 하면서도, 이건 그냥 거의 SF 수준의 이야기이며 뭔가 색다른 아이디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이나 끌어보는 수준일 거라는 생각이 더 많았었다.

물론 나는 이게 답이라는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게 답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머리속의 생각과 현실은 다른 거다. 세상은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갈고 닦아야 하는 것도 맞지만, 언제나 다른 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법이다. 둘 중의 어느 한쪽이 취약해지면 자기 생각이 없는 바보가 되거나, 자기 생각만 옳은 고집쟁이가 되는 법이다.

하여간 나는 사람들에게 나름대로 기본소득이라는 개념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을 해 왔고, 성과도 있고 실패도 있었다. 재미있는 일이었으며 나 자신도 많은 새로운 관점을 새로 배우게 되기도 했었다.

그리고 예상 밖의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앞당겨진 기본소득

최소 십년 이상, 길게 보면 수십년 걸릴 거라도 생각했다. 번듯한 국가에서 기본소득을 국가적 규모로 도입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벌써 시작되어 버렸다.

아직 본격적으로 실행되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반대자들은 핀란드나 네덜란드, 스위스 등도 결국은 실험과 연구 끝에 서서히,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국가 차원에서 도입할 거라고 섣부른 소리 하지 말라는 반응을 보이곤 한다.

과연 그럴까? 지금 같은 가속도로 나아간다면, 2020년 이전에 기본소득을 국가 차원에서 도입하는 나라는 최소 5개국 이상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최초로 도입한 국가에서 우리가 생각지 못한 큰 실패가 발생하지 않는 한 그보다 더 많은 나라가 도입할 가능성이 높다. 결코 급하게 생각하는 일이 아니다. 여태껏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가 퍼져온 속도를 봤을 때 매우 보수적으로 잡은 예측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변형이 있을 수도 있다. 심지어 국내에서도 아무도 주목하지도 않지만 나름 대선 후보인 정운찬 전 총리가 기본소득을 얘기하고 있는 중이다.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왜 그렇게 급하게 진행이 되는 걸까?

곰곰히 생각해 본 결과 답은 바로 실업률에 있었다. 실업률은 정상적인 국가라면 국가권력을 좌우하는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라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거의 모든 서방국가에서 실업률이 계속 올라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정말 큰 문제다.

거기에 서구사회 전반을 뒤흔드는 AI, 즉 인공지능에 대한 경각심이 가세하고 있다. AI가 인류의 미래를 밝혀주리라는 기대 이전에 거의 모든 관련된 사람들이 AI가 인류에게서 빼앗아갈 일자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일자리 문제, 즉 실업률이 상승할 거라는 문제, 이 위기감은 일반인들보다 권력자들이 훨씬 더 심각하고 빠르게 느낀다.

물론 맨날 놀면서 주사나 맞고 시술이나 받는 권력자는 그런 거 생각 안하겠지만.

어떤 방법을 써도 실업률의 증가를 막을 길이 없다면 그것은 정치적 리더의 무덤이 된다. 그리고 그 무서운 실업률은 AI의 발전으로 인해 가속적으로 증가될 상황인데, 그 AI의 발전을 막을 방법이 없다. 막아서도 안되고 막을 수도 없다.

모순된 상황인 것이다.

 

백악관은 저항한다

백악관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상식을 가진 사람은 모두 다 저항한다. (나는 상식이 없어서 기본소득을 좋아하는 건가? 모를 일이다. )

기본소득은 답이 아니다. 기본소득은 무리한 발상이다. 기본소득은 위험하다. 기본소득은 돈이 너무 많이 든다. 기본소득은 인간성과 어울리지 않는다. 이 모든 거부감은 아마도 기본소득은 새롭고 낯설어서 무섭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겠다.

심지어 기본소득은 마르크스주의에 위배되기 때문에 도입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세상에나..

어찌되었거나,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는 과거 전통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무척이나 거북하고 낯선 아이디어 임에 틀림없다. 오히려 별다른 전문지식이 없는 일반인보다 그런 전문가들이 더 큰 거부감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백악관에서 나온 리포트에서는 기본소득이 현재의 과학기술의 발전, AI의 발전으로 인한 실업률 상승을 막는 것에 별다른 도움이 안될 것이라는 의견이 실려 있다. 오바마는 그만두기 전 유언 같은 보고서를 내고, 거기에 기본소득 보다는 더 활발한 직업교육(그러니까 자동화 기술에게 일자리를 빼앗긴 사람들이 다른 일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과 더 많은 사회보장(일자리를 옮기는 사이에 먹고 살아야 하니까)을 제공하는 것이 해법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거의 똑같은 주장을 정의당 팟캐스트 노유진에서 유시민 전장관이 나한테 직접 설명한 적도 있다. 사회보장에 더 많은 투자를 하는게 정답이지 기본소득 같은 과도하게 앞선 아이디어를 도입할 필요는 없다고 말이다.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런 입장이 진지하고 조심스러운, 신중한 의견일 수도 있다. 문제는,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문제는 그런 진지함과 신중함으로는 상대하기 힘든 파격적인 문제라는 점이다.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보자. 말이 끌고 마부가 모는 마차가 사라지고 엔진으로 달리는 자동차가 등장한 적은 있다. 말을 키우는 목장의 목동들과 마부들과 마구간 지기라는 직업이 사라지는 대신 자동차 공장의 직공, 운전기사와 정비사라는 일자리가 생기는 걸로 넘어왔다.

그런데, 자동차 공장에서는 공정 자동화의 결과로 직공이 필요 없어지고, 운전기사는 AI, 자율 주행차가 대치하고, 정비사는 공장입고 및 신차 교체로 해결해 버리는 시대를 인류가 겪어 본 적이 있을까? 실제로 자율주행차를 생산하는 회사들은 무인공장을 운영하려고 하고 있고, 개별정비는 무조건 공장입고와 모듈 교체로 대치하려고 하고 있다. 쉽게 말해서 정비를 신청해두면 차가 알아서 공장에 가서 스스로 부품을 교체 받고 집으로 돌아올 거라는 얘기다.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움직이면서 (심지어 날아다니기까지 한다) 짐을 날라주는 기계 일꾼들이 인류사회에 등장한 적이 있을까?

이건 전혀 새로운 상황이다. 막연하게, 이번에도 뭐 없어진 만큼 새로운 일자리가 생길 거야, 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넘어갈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일자리가 사라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보수적이고 관습적인 신중함으로 막을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2017년 다가오는 한해에는 그 점이 더욱 명확해 질 것으로 예상된다.

신중함은 미덕이지만, 21세기의 인류사회는 그 신중함으로 감당하기 힘든 속도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2017년에는?

핀란드는 실험을 할 것이고 그 결과가 매우 궁금해진다. 미국의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터인 Y-콤비네이터의 기본소득 실험도 진행될 것이다.

각종 미디어는 기본소득 아이디어를 사람들에게 전달할 것이고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기본소득 개념을 설득하게 될 것이다. 나 또한 그 사이에 끼어서 가급적 많은 자리에서 이 얘기를 지속하게 될 것이다. 불러 주시라. 기본소득이 주제라면 강연비 없이 차비만 줘도 간다. 어허.. 차비는 줘야지.

문제는 그런 설득의 속도, 전파의 속도보다 비극이 다가오는 속도가 더 빠를 거라는 점이다.

거국적인 견지에서는 백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백만개의 일자리가 새로 생긴다면 별 문제가 아닐 것으로 보이지만, 그 속에는 백만명의 실직의 아픔이 있고 백만 가정의 위기가 있는 것이다. 그 위기의 폭은 이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런 일시적인 충격만으로도 시장은 얼어붙을 것이고 기업들의 매출은 급감하고 경제위기가 닥쳐오게 될 것이다. 자체적으로 견딜 만한 능력이 되는 선진국가들 말고 우리같이 기초가 취약한 국가에서는 IMF 따위와는 비교도 안되는 충격이 몰아닥칠 것이다.

이 위기상황이 2017년 안에 올 것이라고 예측하지는 않는다. 아직은 그래도 몇 년의 여유는 있을 거라고 본다. 불안불안 하지만 그렇게 빠르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충격파가 닥쳐올 때에는 이미 늦은 상황이 된다. 그 때는 뭔가 대안을 마련하고 싶어도 못할 상황이 될 수도 있다.

많은 거 바라지 않는다.

2017년 한 해,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많은 사람들이 지금 자본주의 위에 쌓아 올려진 전 세계의 경제시스템, 인류 차원의 시스템에 중대한 도전이 다가오고 있다는 “위기 의식”만이라도 공유하게 되길 바란다.

그것도 당연하고도 당연하게 인류를 위해 복무할 것으로 모두가 생각하던 과학기술의 발전 때문에 말이다. 우리를 위해 만든 칼이 우리의 발등을 찍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새해에는 우리의 발등은 우리가 먼저 보호할 수 있도록,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현명한 인류가 되길 기원한다.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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