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음과 이로움의 경계

 

2017년 새해가 밝았다. 다사다난이라고 표현하면 너무 무성의하게 느껴질 정도로 파란만장했던 2016년이 드디어 끝나고 뭔가 새로울 것만 같은 새해가 시작된 셈이다. 일단 우리 모두 스스로의 힘으로 알아서 복을 습득 및 확보하기로 하고 넘어가자.

작년 한 해가 문제는 아니었다. 길게 보면 이명박근혜 십년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만 9년간 문제는 빠른 속도로 누적되어 왔다. 더 길게 보자면 민주정부 10년조차 문제의 확대 속도가 완화되었을 뿐이지 문제를 그닥 많이 해결해 온 것 같지는 않을 정도이다. 더 크게 보자면 87년 개헌 이후 제6공화국 체제는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모든 체제 중에서 제일 나아 보이기는 하지만 그닥 뭘 잘하지는 못한 것 같기도 하다. 왜 우리는 이렇게 항상 불만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걸까?

답은 지극히 간단하다. 바라는게 많아서 그렇다.

그럼 바라는 걸 줄이기 위해서 모든 욕망을 접어 버리고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산에 들어가 스님이라도 되어 버려야 하는 걸까?

아니다. 우리가 모여서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며 행하는 거의 모든 행위의 기준이 되는 옳고 그름, 그리고 이로움과 해로움의 기준은 바로 그 “바라는 것”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새해 첫 이야기를 바로 그 “바라는 것”에서 풀어가 보도록 하자.

 

욕망과 행복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이루는 핵심적인 뼈대는 대략 벤담의 공리주의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공리주의는 자본주의 사회를 윤리적으로 포장해준다. 스스로 확대 재생산하고자 하는 본능적인 성향을 가진 자본을 사회의 근본에 두는 자본주의는 태생적으로 천박할 수 밖에 없다. 부자 되세요, 천민자본주의, 배금주의 등이 괜히 생기는 것이 아니다.

쉽게 말해 돈은 많이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어지고, 더 가질수록 더 많이 가질 수 있는 힘이 생기는 존재라는 점, 누구나 어지간히 깨우치고 있다. 그게 한 사회의 근본이 되면 소수에 돈이 몰리고 사회는 양극화 된다는 것, 경험적으로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공리주의는 거기에 “쾌락과 행복”을 좀더 다수가 느낄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옳은 일”이라는 철학적 해석을 덧붙여 준다. 즉 내가 자본을 소유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더 많이 가지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 사회적으로도 옳은 일이라는 자본주의 특유의 윤리 체계를 만들어 냈다.

공리주의가 현실 속에서 구현되기 위해서는 쾌락과 행복이라는 추상적인 기준이 모두에게 일정 부분 객관적으로 수치화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 각자는 이 쾌락과 행복에 대한 기준이 판이하게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것, 그것이 함정이다. 결국 공리주의는 모든 사람이 극도로 다른 기준으로 느낄 수 밖에 없는 쾌락과 행복에 대해 “가격표”를 붙일 수 밖에 없게 된다. 시장논리에 의해 붙어 버린 시 한편의 가격과 배고픈 사람에게 필요한 짜장면 한 그릇에 붙어 있는 가격들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 손쉬운 공리주의의 함정에 깊게 빠져 있은지 오래이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우리는 각자가 느끼는 쾌락과 행복을 기준으로 삼아, 사회적으로 옳은 일과 이익이 되는 일을 혼동하며 살아가고 있다. 아니 실제로 옳음과 이로움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옳음과 이로움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기준은 윤리적인 것이다. 분명히 이로움과 해로움의 구분과는 다른 구분방법이다. 그러나 공리주의의 기반위에 세워져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옳음과 이로움을 구분하기가 힘들어진다.

자본주의 사회에 윤리체계를 부여해준 공리주의는 이로운 것이 옳다는 입장을 가진다. 다만 극도의 이기주의적 행동과 옳음을 구분하기 위해 옳음 앞에 “사회적” 이라는 말을 붙여 놓는다.

즉 우리 사회의 옳음은 “사회적으로 이로운 일”을 행하는 것에 있다는 얘기이다. 이게 바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무책임한 말의 뜻 아니던가?

이명박이 4대강에 엄청난 돈을 퍼붓는 행위는 옳은가 그른가?

한 쪽에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환경을 망가뜨리고 별다른 이득이 없는 사업에 엄청난 재원을 퍼부었으니 이건 사회적으로 이롭지 않은 행동이며 옳지 않은 결정이라는 해석을 하고 이명박을 비난한다.

하지만 이 사업을 강행한 사람들, 이명박과 그의 친구들의 입장에서는 이 사업으로 엄청난 사업기회를 제공하고 많은 매출 상승이 있었으며 (하필 그 회사들이 동지상고 동문들과 관계가 있었다는 것은 우연일 뿐) 이명박 본인에게는 상당한 분량의 떡고물이 생겼으니 이로운 일이며, 이로우니 옳은 일이라는 판단이 있었을 것이다.

결국 이 사람들의 의견이 갈라지는 부분은 이명박과 그의 친구들 몇몇에게 이로우니 옳다고 생각하는 쪽과,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 대한민국이라고 부르는 이 사회 전체에는 이로운 일이 아니니 옳지 않다고 판단하는 그 차이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옳음과 그름의 차이는 이로운가 이롭지 않은가의 차이도 아니고, 이로움을 판단할 기준 영역이 얼마나 큰가로 갈리는 것뿐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로움의 영역

이로움의 영역이 넓을수록 더 옳은 일이라는 결론이 얼마나 허무한가. 나에게 이로운 일만 하는 사람을 우리는 이기주의자라고 부른다. 나와 내 가족의 이로움만 따지는 사람을 우리는 “지 식구만 챙기는 놈”이라고 비난을 한다. 내가 나온 학교에게 이로운 것이 옳다고 생각하면 학연, 내가 태어난 고장에 이로운 것을 옳다고 주장하면 지연, 내 문중의 이익만을 따지면 혈연주의자가 된다. 이런 평가들은 그 사람이 생각하는 옳음의 범위가 좁다는 점을 지적하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범위의 이로움을 옳음이라고 간주해야 되는 것일까? 내가 속한 사회의 이로움이라면 그 사회의 범위는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가? 외국인 노동자들은 포함되는가? 강아지나 고양이, 혹은 가축 등 동물은 포함되는가? 그 사회는 국가의 경계로 나누어 지는가, 아니면 인류 전체를 포함하는가? 그리고 그 사회에는 현세의 인간들만 포함되는가, 아니면 미래의 인류까지 포함되는가?

이로움의 영역으로 옳음과 그름을 나누는 기준은 이미 그 영역의 범위부터 결정하지 못하고 무력화될 공산이 크다. 심지어 우리는 우리 사회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사회적 약자들, 여성, 장애인, 성적 소수자들의 이익조차 “사회적 옳음”의 기준에 넣지 못하고 쩔쩔 매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마르크스는 공리주의자들을 보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그럴싸한 구호를 외치며 자본주의의 약육강식 법칙만 강화하고 있는 부역자들이라고 비난했나 보다. 어, 마르크스가 실제로 이런 비난을 했었나? 나이를 먹다 보니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현실의 기준은 허약하다

현실은 언제나 철학자들의 심오한 논의보다는 훨씬 단순한 수준에서 모든 것이 결정된다. 이로움은 옳음이 맞다. 적당한 범위에서 이로움이 판단된다면 말이다.

내 욕심을 위해 소작인의 재산을 강탈한 김첨지는 벼락 맞아 죽을 놈이 맞고,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일본의 유력 정치인 이토오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의 행위는 숭고한 것이다. 이런 걸 보면 우리의 옳음은 대략 국가적 이로움의 기준으로 판단되는 것 같기도 하다.

똑같이 기업을 해도 국가 권력에게 뇌물을 바치고, 밀수 등 불법적인 사업을 해서 회사를 키운 뒤 자식에게 물려준 이병철, 이건희는 나쁜 놈이고, 사업을 일으켜 사회에 환원한 유일한씨는 숭고한 사업가가 된다. 물론 요즘의 유한 킴벌리는 그렇게 좋은 회사는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전염병이 돈다고 기르던 가축을 천만단위로 산 채로 매립해 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한 편에서는 애완동물(이제는 반려동물이라고 불러야 한다.)의 권리까지 논의되고 있는 것도 우리 사회이니 그 기준은 인류라는 특정 종에 국한되는 것 같기도 하다.

뭐 대단하게 철두철미한 판단기준이 작동하는 것도 아니다. 개인적이고 협소한 이기주의는 나쁘고, 사회적인 이로움은 옳은 행위가 된다. 그것도 해상도 떨어지는 기준으로 적절하게 판단을 하는 것뿐이다. 그거 정말로 어쩔 수가 없다. 사회의 거대함에 비추어 우리의 윤리적 철학적 판단력은 아직도 별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일이다. 우리는 결국 이러니 저러니 해도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며 자본주의 사회의 윤리적 기준은 공리주의적 기준이 될 수 밖에 없으니 말이다.

우리는 더 좋은 기준이 만들어질 때까지 이렇게 좀 낡은 허약한 기준을 사용하는 수 밖에 없다.

 

남을 비난할 권리

여태껏 옳음과 그름을 가르는 기준이 얼마나 허약한가에 대해 생각을 해봤다. 그리고 그 결론은 허약하기 그지 없는 기준, 만들어진지 무척 오래된 기준, 적용 범위, 판단 범위도 불확실한 기준을 그냥 그냥 쓰고 있다는 것으로 나와 버렸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허약한 기준에 의거해서 “옳지 않은 행동”을 한 사람을 어느 선까지 비난할 수 있을까? 물론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훔치는 명확한 범죄는 이미 국가적 사법권력을 동원해서 비난이 아니라 처벌을 하고 있다. 빠져나가는 놈들이 많아서 탈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의 윤리적 기준인 공리주의를 가져와야 되고, 이로움의 범위를 따지며 설전을 해야 겨우 판정이 나는 옳지 않음을 어떤 수준으로 비난을 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 그 이전에 우리는 그런 수준의 이유로 남을 비난할 권리가 있는 것일까?

사실 따져보면 이로움의 범위 차이에 불과할 수도 있다. 나는 국가 차원의 옳음을 이야기하고 있고, 넌 인류 차원의 옳음을 이야기 하고 있으며, 나는 현생 인류에게 이로운 일을 주장하고 있고, 넌 미래 인류에게 미치게 될 해로움을 이야기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런 차이로 상대를 비난하는 것이 타당한 일일까?

결국 옳음과 이로움의 경계조차 명확하게 설명되지 못한 상황에서, 우리는 너무 쉽게 별다른 근거도 없이 타인을 비난하며 그 결과로 분쟁을 일으키고 그 분쟁으로 인해 서로 고통을 받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7년을 맞이하며 첫번째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아주 단순하고 쉬운 이야기 한 마디이다.

누군가를 비난할 때에는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하자는 것. 그 근거가 없거나 약하다면 비난을 멈추는 것이 옳다는 얘기이다.

2017년 새해, 우리 모두는 좀 더 착하게, 좀 더 사이좋게 놀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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