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 있는 사람

 

사회학자 필립 페셀은 여성과 남성의 특성을 네 가지 성향으로 말했다. 여성은 어머니, 애인, 전사, 선생님이고, 남성은 농부, 유목민, 건설자, 전사로 나타난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든 이 네 가지 성향이 다 있거나 그중 한 가지, 또는 복합적으로 있을 수 있다. 그중 어느 것이 더 발달하는 가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사회가 자기에게 부과한 역할에서 자기의 존재 의의를 찾지 못할 때 생긴다. 때로는 강요 때문에 격렬한 충돌이 생기기도 한다. 자신의 특성을 다 발휘할 수 있는 삶을 살게 된다면 자신이 생각하는 완벽한 목표를 이루어내는 것은 아닐지. 그런 세상은 영화 속에서나 열린다 해도 미리부터 포기할 일은 아니다.

과연 보이는 것만큼 행복할까. 1998년 게리 로스 감독의 영화 <플레전트빌>의 중심엔 TV 프로그램 ‘플레전트빌’이란 시트콤이 있다.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 인기 프로그램은 많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이제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이른 저녁, 아버지가 일을 마치고 “여보, 나 왔어!”라고 말하면, 앞치마를 두른 어머니가 부엌에서 나와 반갑게 맞는다. 정성이 가득한 음식들로 채워진 저녁 식탁에 가족들이 둘러앉아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오순도순 이야기하는 풍경이 보인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이 시트콤을 시청하는 열혈 데이비드의 현실은 너무나 다르다. 이혼한 부모님은 헤어진 이후에도 전화로 서로 싸우고, 하나뿐인 쌍둥이 여동생과는 서로 관심도 없다. 집에 와도 차가운 냉동식품을 데워 홀로 끼니를 때운다. 영화에서 데이비드가 ‘플레전트빌’ 시트콤에 빠지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시트콤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각 에피소드들의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하고 있어 어떤 퀴즈를 내도 그것에 관한 한 척척 맞춘다. 드라마 덕후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쉽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괴짜에다 소심한 남자아이일 뿐이다. 반면에 여동생 제니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책이라곤 읽어본 적도 없지만, 학교에서 소위 ‘잘 나가는 소녀들’ 중 하나다. 어쩌면 방탕하다고 할 만큼 연애도 거침없이 자유분방하다.

정작 영화나 텔레비전 안의 인생이 보이는 것처럼 행복할까? 아니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삶은 보이는 게 전부이다.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배우들이 연기를 하는, 그럴듯한 세트 안의 인생은 조명이 꺼지면 더는 그곳에 없다. 한국에서 인기 있는 드라마가 종영되고 나면 사라지는 이미지와 비슷하다.

나도 드라마에 푹 빠질 때가 있다. 개인적으로 배우 박신양을 좋아하다 보니 그가 출연한 드라마는 DVD도 소장하고 며칠 낮과 밤 동안 그의 세상으로 떠난다. 또 좋아하는 영화 속으로 긴 시간 여행도 한다. 우리는 왜, TV 속 드라마의 열혈 시청자가 되는 것일까? 이 영화의 주인공 데이비드를 통해 현실에선 가능하지 않은 일상의 판타지를 경험하고 싶은 것일 이유가 가장 클 것 같다.

드라마나 영화는 영상으로 고정해 놓은 이미지로 있을 뿐이다. 보여주기 위해 만든 삶이기에 그것으로 끝이다. 그다음은 보는 이들의 감정에 남아있다.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기쁨이거나 슬픔이거나 분노일 수도 때론 낭만적으로 로맨틱하게 내 안에서 작은 미소를 한 두 번 짓게 해 줄 수는 있다.

학수고대하던 학교 킹카와의 데이트가 있는 제니퍼와 시트콤을 봐야만 하는 데이비드의 금요일 저녁이다. 둘이 리모컨을 서로 가지려다 박살이 나고, 때맞춰 등장한 심히 수상쩍은 TV 수리공 할아버지가 시트콤 ‘플레전트빌’에 데이비드가 척척박사라는 걸 알고 신기한 리모컨을 건넨다. 둘은 리모컨 작동과 동시에 촌스러운 복장에 흑백의 몸으로 시트콤에 등장하는 주요 캐릭터인 화목한 가정의 아들과 딸로 변해 그 안에 있다.

시트콤의 플레전트빌은 현실을 지배하는 모든 법칙들이 교묘하게 비껴가는 곳이다. ‘기쁨이 있는 동네’이기에 불도 날 수 없고, 비도 나리지 않고, 농구부 선수들이 넣은 슛은 무조건 들어간다. 소방관들은 출동하여 나무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고양이를 구조하는 것이 가장 큰 업무이다. 한마디로 실패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다.

그렇다. 웃음과 교훈을 주는 시트콤은 언제나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그곳의 사람들은 실제의 인간이 아닌, 허구로 꾸며진 반쪽짜리 존재들이니까. 이 이상적인 세상에서 잘 적응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방송에 대해 무엇이든 알고 있는 그들이야말로, 이 작은 도시에 걸맞은 등장인물인 것이다.

나의 색깔은 어디 있을까. 플레전트빌에서 아이스크림집의 존슨은 데이비드가 오지 않으면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무의미하게 카운터 위나 닦으면서 데이비드가 올 때까지 멍하니 기다려야 한다. 그는 시트콤에 자주 등장하는 ‘카페 주인’의 역할이다. 언제나 카운터를 닦으면서 주인공에게 필요한 조언을 해주는, 선량한 캐릭터이다. 식당 문을 열고 카운터를 닦고 메인 주인공이 등장할 때마다 가끔 비치는 조연인 것이다. 그런 그에게 데이비드가 말한다.

존슨, 스스로 그 무엇도 할 수 있어요. 다음부턴 제가 오지 않아도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모든 것은 정해진 것이 아니니까요. 마음대로 바꾸어도 되는 거죠.

그 후, 작은 자유를 맛본 존슨은 더 큰 자유에 대한 욕망이 생겨나고 이렇게 플레전트빌은 변화를 맞게 된다.

이 영화에서 ‘색깔’은 ‘인간다움’과 일맥상통한다. 아기처럼 아무것도 모르던 주민들이 자신의 욕망과 정체성을 깨닫게 되면서 색깔을 찾는다. 여전히 마을의 배경은 흑백이지만 생생한 색깔을 찾게 된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간다. 그러나 아직 자신의 색깔을 찾지 못한 마을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들을 유색인종으로 취급하며 단호하게 뭉친다.

1세기에 2년 남겨둔 3.1절. 변화를 요구하는 시민들 사이에서 태극기 물결과 괴성들이 겹쳐진다. 나도 어느새 시트콤 같은 나라에 있는 것인가 싶어 섬뜩함을 만난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마치 영화에 동원된 배우들로 기운을 빼게 하는 건 아닌지. 어쩌면 영화 속의 세계에서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끌려 들어온 관객들은 아니었을지 생각해 본다.

플레전트빌은 그동안 지켜온 언제나 유쾌한 마을을 지키기 위해 주로 시장을 중심으로 한 중년 이상의 남성들이 나선다. 제니퍼의 극 중 아버지도 포함된다. 마치 우리들의 아버지들처럼 시대의 변화에 호들갑을 떨며 놀라고 어이없어하는 모습들이 연출된다.

그들이 어이없어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아내들이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거다. 저녁에 집에 들어왔을 때 당연히 맛있는 식사가 차려져 있어야 하는데, 색깔을 찾은 부인들이 그것을 거부한다. 도서관에는 책들이 글자를 채워 컬러로 빛을 내고 연인들의 호수에는 컬러의 세상이, 그들만의 자유로움이 자연스럽게 채색된다.

중년을 넘긴 그들은 플레전트빌의 기득권자이자 권력자, 그리고 지배자였다. 그들은 변화가 두렵다. 이미 지금도 충분히 힘과 관련된 편리함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젊은이들이 방종하게 연애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막으려고 한다. 바깥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키우는 책들을 강제로 빼앗아 불태워 버리고, 자유롭게 음악을 듣지 못하게 금지곡을 만든다. 시장은 선동하며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이곳 주민들이 지켜야 할 법규들을 새로 만든다.

결정적인 해결책은 없지만 늘 새로운 시도는 가능하다. 우리들은 현실에서 얼마큼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걸까. 지금도 무언가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텔레비전이나 재미난 영화에 빠져 세상을 잊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은 아닐까.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상상력 사전에서 알지 못하는 것을 마주할 때의 두려움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인간은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대할 때 가장 큰 두려움을 느낀다. 그 미지의 것이 적대적인 존재일지라도 일단 정체가 밝혀지면 인간은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반면에 상대의 정체를 알지 못하면, 상상을 통해 두려움을 부풀리는 과정이 촉발된다. 그리하여 각자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던 악마, 가장 위험한 존재가 나타난다…… 그러나 아직 이름이 붙어 있지 않은 미지의 존재는 무엇이든 인류를 위한 새로운 도전을 유발할 수 있다.

이 영화 속의 시트콤, 플레전트빌에서 사람들이 자각과 경이를 느끼면서 그동안 나릴 수 없었던 비가 내린다. 그 비를 보고 무서움에 떠는 그들의 표정은 우리 사회에서 한 개인이 나쁜 정부를 향해 저항할 때 만나는 두려움과도 비슷하다. 무엇이든 하지 않는다면 안 되는데 정작 실행하면 나만 다칠 것만 같은 두려움을 느끼게 해 주는 이 사회도 제 색깔을 찾으려는 개인들이 있다.

나는 잘못된 일들을 저항을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것보다는 하고 나서 만날 내일이 덜 두렵다. 그렇기에 역사에 기록되어 후대에게 전해줄 광장의 소리, 98년이 된 3.1 만세 운동의 그 외침을 가슴에 새긴다. 21세기에 지난 세기의 유신 대통령 아바타가 성(性)을 달리하여 현란했던 시간은 끝났다. 새 봄날을 새 빛으로 채울 수 있게 될 것이기에. 광장은 색깔 있는 사람들로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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