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에 대하여

 

맑고 차가운 기운이 창으로 와 깨우는 아침이다. 바흐의 칸타타 211번이 흐른다. 나는 어느새 잠이 들었던가. 제 스스로 멈출 수 없는 무한반복을 해놓아 마침 순서가 된 바흐의 커피 칸타타. 오늘 이 하루가 어느 시대 누군가의 하루로 이어질 수 있을까. 바흐의 음악을 들으며 한 번쯤 기억을 해낼까.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화 <디 아워스>를 보고 더 느끼고 싶어 원작까지 읽으면 오랫동안 세 명의 여인이 가슴에 남는다. 그렇게 닿은 사물. 그 안에 담긴 세 여인의 시간. 그들의 시대와 공간은 다르지만 그 어느 날의 이야기에서 존재를 배운다.

버지니아 울프의 ‘델러웨이 부인’을 징검다리로 삼은 시대를 초월하는 의식들에 대해서 고민해 볼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커닝햄의 책과 영화의 이미지가 서로 교차되면서 진정한 나라는 존재를 생각할 허공이 마련된다.

한국의 버지니아 울프 학회에서는 울프의 작품을 다시 연구하고 번역해 발간하고 있다. 나는 이십 대에 그녀의 작품을 따라 길을 걷는 자신을 발견한다. 버지니아의 독백이 세기를 넘어 내게로 왔을 때 그녀의 고뇌가 온몸으로 파고들곤 했던 그 물음들이 다시 되풀이된다.

댈러웨이 부인과 울프 부인 그리고 브라운 부인의 그 하루가 버지니아와 로라, 클래리사로 남은 그 세월이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전개된다. 세상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없었던 세 여자의 삶이 어쩐지 영원히 지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존재의 공허마저 배운다. 그다음의 시간은 허공의 존재로 남을 수 있다.

그리고 나의 시간. 또 당신의 시간. 우리라고 부를 시간이 많이 쌓여 있다면 나는 시간여행자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 시간은 이성보단 감성이 더 많이 투영된 순간들일 테니. 이성이 부족해서 겪는 현실적 고민들은 실상 감성의 결여가 원인인 경우가 더 많았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다면.

적은 이성의 힘과 넘치는 감성의 힘으로 내 시간은 존재해온 것 같거든. 이성적이라면 난 좀 더 나은 선택을 했을 것 같다. 실패하지 않는 죽음처럼. 하지만 과연 죽음에 달 이유가 있을까. 내가 선택한 것에? 모두 이유를 달고 싶어 하는 죽음이어야 되는 건 아니다.

갑자기 찾아온 죽음을 어떻게 막을 수 있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죽음을. 탄생도 그렇잖아. 난 내가 태어날 줄 전혀 몰랐고 세상에 나와서도 왜 태어났는지 잘 모르는데. 삶이던 죽음이던 시작도 끝도 아닌 거지. 한 점에서 출발된 거라면 그 점이 더는 보이지 않는 것을 죽음이라 이름 붙인 것일 뿐.

시간이라는 그 찰나가 눈에 선명하게 보이다가 점점 흐릿해져서 사라진다한들 그게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닐 거다. 그 점은 하늘을 바라보면 언제나 찾아낼 수 있는 점이니까. 그 점을 확대해서 질리도록 우려먹는 거지. 그게 삶이라는 이름이 되기도 하고.

삶이라는 제목에 굳이 흔적을 남겨야 할 것도 아니지 않겠어? 스스로 확인하다가 살아있음을, 그것이 벅차면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거고. 어떤 점으로 있건 그건 내가 부르고 싶은 이름으로 불릴 뿐이다. 수많은 말과 소리와 글로. 또는 이미지로.

세상의 여러 모습으로 살아가는 일. 지금 여기와 그 어느 날과 또 다른 그 어느 시간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삶이라면 그 삶은 살아나고 싶은 욕망으로 넘칠 수 있을까.  결국에는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 가장 아팠던 시간이었다는 건 불행일까?

중심이 되는 하나가 다른 차이, 질적 다양성을 말살시키려는 것, 폭력이다. 인류의 역사에 드리워진 만행, 전방위적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것, 남성 중심의 사회구조이다. 그들조차 인지하기 어려울 만큼 두꺼운 시간의 더께에서 보호받거나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하나에서 여럿으로 살아가기 위한 새로운 역사의 출발선이 되곤 한다.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어느 정도는 일상에서 느끼며 알고 있다. 다만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과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과는 다름을 지나칠 뿐이다. 내가 생활하면서 만나는 부당함이 뼈저리게 파고들지 않으면 별 저항이 안 든다는 것도 말이다.

남성 중심의 사회가 그렇다. 워낙 별 일 없는 듯이 오래도록 이어지며 공고하게 굳어진 남자 중심의 생각들이 자리를 내어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스스로 알아차리고 깨닫지 않으면 페미니즘은 수많은 사회운동처럼 부분에서 정체되어 더 나아가지 못한다.

페미니즘은 더 나은 삶을 위한 과정의 한 의식화이고 그 너머에서 진정한 휴머니즘의 세계가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남자, 여자로 규정된 전통에서 벗어나 인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세계에서 하나인 인간으로 살아나기 위해서라도 페미니즘은 자명성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접근해 한 걸음 내딛기 시작해본다. 내가 받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어머니 교과서를 다시 풀어내 보기. 지금 나는 과연 누구와 마주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는 일. 다름 아닌 거울 속에 ‘여성’은 아닐지. 단 한 번의 거대한 투쟁 없이 지나온 한국 여성의 역사를 공부해 보기.

내게 부여된 젠더로 나의 삶을 구분하거나 규정하는 일은 순전히 개인의 몫이어야 한다. 타인들이 지칭할 문제가 아니기에 인간이면 충분할 자의식이 필요한 거였다. 여전히 이 세계는 성 역할의 사회학습 효과를 톡톡히 요구하고 있으니까.

씩씩한 남자 만들기 만큼이나 현모양처 만들기에 힘을 쏟았던 한국사회의 시간을 느껴보는 일. 주체로 살아가기에 걸림돌은 무엇일까 생각하다 멈추는 곳은 지금, 여기였다. 페미니즘은 건강한 사상이다. 논쟁으로 승부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앎을 서로 나누는 재미있는 수다이다.

젠더만큼 뜨겁고 달콤하고 격렬하기도 한 논쟁은 드물다. 뒤끝으로 공부의 동기를 주는 괜찮은 학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온라인에서는 논쟁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말들로 뒤죽박죽이다. 표출된 말들은 치우친 경우가 더 많다. 읽어보면 공론장과 같은 역할의 커뮤니티에서 정제되지 않은 풍경은 가히 폭력을 넘어 가학적으로 보인다.

페미니즘을 거론하는 책들을 접하면서 만나는 것은 수많은 문학과 책들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다. 작은 부분들로 이루어진 페미니즘은 전체를 돋보이게 할 수 있는 기제로 서로를 감싸 안아준다. 어느 작은 한 가지로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내게 참고 서적으로 늘어난 다양한 사상 중의 한 가지인 것처럼.

시몬느 보봐르의 <제2의 성>은 섹슈얼리티에 관한 편견을 벗어나게 해 준 책이었다. 내 기억에 남은 것은 남성과 여성으로만 구분되던 성을 다양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된 책이었다는 점이다. 그때만 해도 페미니즘에 관한 호기심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본느 보봐르는 여성이기보다 그저 한 인간으로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보부아르는 「제2의 성」을 쓸 무렵 자신은 페미니스트가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다. 게다가 “거의 우연하게” 이 책을 쓸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저 여자인 자기 자신을 좀 더 깊이 알아가는 과정에서 우연히 여성 문제에 대해 글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청소년기와 청년의 시간에 책을 가까이하지 않거나 못해온 한국사회의 경쟁주의라는 강박. 페미니즘 공부를 해오면서 자주 만나는 감정이다. 일부러 찾아 펼치지 않아도 문학에서 느낄 수 있는 대부분의 감정 밑에는 페미니즘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책을 읽는 것이 생활화되었다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받는 차별과 몰이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성이기에 받아온 부당한 현실을 토로한 문학은 서구 유럽 중심 사고가 거칠게 몰려와 받은 한국이기에 꽤 이른 시기에 세계문학을 접할 기회가 주어졌다. 고전이라 불리는 세계문학 안에는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인간으로 살아가려는 수많은 목소리가 있으니까. 적어도 주체의 나를 보살피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회에서 만들어진 여성의 모습과 다른 나를 인정하는 일부터 시작해 사회에서 학습한 지식이 얼마나 남성 중심으로 치우쳤는지도 알아낼 수 있다. 문제는 서구 유럽에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니 그 의식에서 벗어나는 일부터 시작해야 가능하긴 하다. 그 일을 가능하도록 도움이 되는 책은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이다.

나를 인간으로 살아가게 해 준 십 대의 우상은 전혜린이었다. 오죽하면 그녀의 삶을 따라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고대하고 알약을 모았을까. 물론 그 알약 덕분에 나는 꿈틀거리는 삶을 쥐게 되었다. 스르르 흘러내릴 것만 같던 그 청춘의 휘청거리는 오후를 잘 지나왔긴 하지만 여전히 나는 비틀거린다.

1970년대의 한국이라는 독특한 상황에서 전혜린이 갈망한 자유와 인간으로 살기 위한 몸부림들은 그녀의 책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이른 죽음의 선택이 여성으로 엄마로 누군가의 아내로 살아가면서 잃고 싶지 않은 그러나 이미 잃은 자기를 지키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나는 그녀의 삶에서 받은 영향으로 여자가 아닌 인간으로 살아가는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여성이기에 제대로 해 낸 것이 있다면 아이를 낳은 일이라 생각한다. 물론 그 아이들의 자유로운 삶을 응원하고 있을 때 주변에서 심심찮게 듣던 말은 방임이었다.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게 이 나라에선 방임이 되어 어미라는 제 역할을 못한 여자가 되기도 한다.

되돌아보면 문학과 함께 굳이 꺼낼 이름들이 페미니즘과 이어지곤 한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배우는 것은 이 세계가 얼마나 편향성을 주류로 생각해 왔는 가이다. 인간으로서 존엄이 거의 모든 영역에서 강자에게 치우친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적어도 나의 세계만큼은 변화가 온다.

문학을 통한 버지니아와 만남은 세월을 지나 여전히 현재의 그대와 나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하나에서 여럿으로 여럿에서 다시 하나로. 개개인의 존재로 모인 하나, 여럿의 해체로 다시 개개인. 삶은 무수히 많은 점들로 이어진 지점을 이어가는 세월의 한 순간이기에 지금, 이 순간을 당당하게 잘 살아낼 수 있기.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왜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가?

이 시대에서 여성의 삶은 어떤 의미로 이야기할 수 있는가?

내 삶은 사회적 관습에서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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