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이길 것인가

어떻게 이길 것인가

 When they go low, we go high.

지난해 미국 대통령선거, 힐러리 클린턴 후보 지지연설에서 미셸 오바마가 했던 말이다. “그들이 저급하게 가도, 우리는 품격 있게 가겠다.” 차별과 혐오에 기댄 도널드 트럼프 후보에 대응하는, 미국 민주당의 기조가 오롯이 담긴 선언이었다.

 

 

그리고 몇 개월 뒤, 한국에는 기적과 같은 대선이 찾아왔다. 대통령은 탄핵당했고, 이내 구속되었다. 비서실장과 장관, 재벌 총수까지 구치소로 모여들었다. 집권여당의 정권 연장 가능성은 사실상 사라졌다.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후보의 독주를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가 따라붙고 있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의 지지율은 10%를 오가고 있고,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의 지지율은 5% 선에서 뛰어오르지 못하고 있다. 보수정당은 착실하게 몰락의 길로 들어서고 있으며, 한때 한 정당에 몸을 담았던 두 명의 후보가 정권을 두고 경쟁하고 있다. 기적같은 일이었다. 국민이 광장민주주의의 힘으로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그러나 우리 정치에게는, 그 기적을 감당할 수 있을 만한 힘이 있었는가?

어찌 보면 선물과도 같은 일이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발빠른 진보였다. 우리는 그 발빠른 진보를, 온전하게 성장의 동력으로 삼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가?

소란스러운 대선 정국을 바라보며, 피어오르는 의심을 스스로 주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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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정치란 언제나 소란스러운 것이다. 소란스럽지 않으면 정치가 아니다. 소란스럽지 않은 정치는 오히려 더 위험한 정치다. 정치의 본질은 소란스러움이다. 그러나, 그 소란스러움이 얼마나 생산적인지는 또 다른 문제다.

쓰리디나 삼디나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기본적인 어휘를 잘 알고 있다면 좋겠지만, 그걸 모른다고 해서 좋은 정책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공약은 후보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다. 후보가 당장의 시류를 잘 따라가지 못하더라도, 좋은 사람을 데려와 좋은 정책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건 문재인 캠프가 가지고 있는 장점이기도 하다. 핵심은 3D를 무어라고 읽느냐가 아니라, 3D 프린터를 비롯한 기술혁명에 어떻게 대응하려 하는지 그 청사진이다. 별로 중요한 지적도 아니고, 별로 영양가 있는 지적도 아니다.

그런데 한 쪽에서 영양가 없는 지적을 하면, 다른 쪽에선 영양가 없는 대답이 나온다. G20을 ‘지이십’이라고 읽으면 안 된다느니, 홍길동도 아니고 3을 ‘삼’이라고 읽으면 어떠냐느니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익숙하지 않다보니 실수를 했다고 말하고 다음부터 그러지 않으면 될 것을, 그리고 기술혁신에 대응하는 자신의 공약을 강조하면 될 일을, 이상한 논리를 들고 와서 방어를 한다.

조폭이니 이단이니 하는 말들도 오간다. 그런 세력과의 연계를 끊어내지 못한 캠프의 작태는 한심하다. ‘차떼기’와 같은 불법 행위가 있었다면 명백히 처벌받아야 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이 논란들이 ‘조폭’과 ‘이단’이라는 말에 담긴 부정적인 이미지를 안철수 후보에게 부당하게 덧씌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조폭이든 이단이든 누군가를 지지할 수는 있다. 문제는 그들의 영향력이, 그 후보에게 얼마나 강력하게 미치고 있느냐는 것이다. 안철수 후보의 정책에 ‘조폭’과 ‘이단’이 강력하게 개입한 정황이 존재하는가? 정부 성립 이후 그들이 국정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보이는가? 그들로 인해 국가의 정책방향이 흔들릴 수 있는가?

불법적인 사실에 대한 처벌 요구를 넘어선, 아무런 증거 없는 단순 의혹에 근거한 후보 비방은 네거티브에 불과하다. 하루에 수백 장도 넘는 사진을 찍는 정치인에게, 그들과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은 아무런 증거가 되지 못한다.

아들의 특혜 채용 논란은 어떤가. 지금으로서 그가 문재인 후보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떤 특혜를 받았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 문제는 남겨진 의혹을 일소하는 일이다. 그러나 ‘귀고리’ 의혹에 대한 “자유로운 분위기의 공기업”이라는 대답을 보자.

대체 어느 시대 어느 공기업이 그런 자유로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해명에 동의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취업을 조금이라도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모두들 비웃을 일이다. 채용 공고상 시간이 부족해 급하게 준비하다보니 부주의했다는 해명 정도면 충분하다. 캠프의 대응이 시민의 상식을 뛰어넘지 못한다. 논란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그 기본조차 모른다.

 

 

아무런 가치 없는 질문과 의혹 제기가 이어지고, 마찬가지로 영양가 없는 대답이 이어진다. 누구에게도 이 갈등을 생산적으로 풀어나갈 의지가 없다.

문명화된 갈등의 방식이 현대의 민주정치라지만, 무엇을 두고 갈등하는지는 성찰할 필요가 있다. 3D를 무어라 읽어야 하는지를 두고 갈등하는 것과, 기술혁신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두고 갈등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가.

 

When they go low, we go high.

 

미국 민주당의 선거 기조를 그대로 농축한 이 문장을 다시 한 번 음미해 보자. 우리는 그들의 ‘저급한’ 지적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저급한 지적에 저급하게 대응하는 정치. 실수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정치. 사과에 인색한 정치. 우리는 그리 ‘품격 있는’ 정치를 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기적과 같은 선거였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사회는 그 기적을 감당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분명 누군가는 선거에서 승리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 정권은 교체될 것이다. 현재 상황에서 자유한국당 정권의 연장은 불가능해 보인다. 촛불 민심은 새로운 세력을 선택할 것이며, 광장에 모여 대통령을 파면시킨 국민은 변화를 갈망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승리를 거둘 것인가? 똑같이 이기더라도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당당하게 이기는 후보가 있다. 반면 상대 후보에 대한 비방과 무책임한 의혹 제기로 비굴하게 이기는 후보가 있다.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패배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키며 올곧게 패배하는 후보가 있는 반면, 끝까지 아무런 비전을 제시하지 않고 지저분하게 패배하는 후보가 있다.

 

 

어떻게 싸우든, 이기고 지는 것은 같다. 누군가는 이기고 누군가는 진다. 그러나 때로는, 어떻게 이기고 어떻게 지느냐가 다음의 승패를 좌우하기도 한다.

우리는, 어떻게 승리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패배할 것인가?

상황이 유리할 수록, 더 뼈아픈 성찰이 필요한 법이다.

 

 

물론 그렇다고 단순히 “품격 있는 정치를 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정책 대결이 실종됐다”며 현명한 척을 하는 언론들이, 정작 1면 톱으로는 3D니, 조폭이니, 이단이니 하는 이야기를 떠들고 있지 않은가. 생산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논의 대신, 소모적이고 무의미한 논쟁만을 자극적으로 보도하는 언론이 있지 않은가.

우리들의 수준 역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상대방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난, ‘우리 편’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가 어느새 일상이 되어버리지는 않았는가. 자극적인 제목을 뽑아낸 ‘찌라시’들의 클릭수를 올려주는 것도 결국은 우리들이 아니었던가.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이, 이 현실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정치인들만을 함부로 비난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부당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저급한’ 정치는 꼭 그들의 탓만은 아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냐고? 상대편에서 자극적인 의혹을 쏟아내고, 그 의혹이 정책 이슈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품격 있는 정치’를 할 수 있냐고?

유세 현장에서, 미셸 오바마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How do we go high?

 

광장에 모인 미국의 유권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We vote!

 

그리고, 힐러리 클린턴은 유권자의 직접선거에서 300백만표 차이로 도널드 트럼프에게 승리했다.

어쩌면 답은 우리 안에 있는지도 모른다.

 

 

 

 

# 이 글의 참조 문헌과 사진의 출처는 widerstand365.tistory.com/971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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