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직 리얼리즘에서 소쉬르까지 – 2

사용자 삽입 이미지
편집자 주 :

아래는 꽤 오래전에 알바들이 놀던 모 사이트에서, 알바들간에 나누었던 대화를 정리/편집한 내용입니다. 불필요한 잡담은 가급적 지웠고, 논의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한도내에서 읽기 좋게 편집해 봤습니다.

다시 읽어보니 알바들 모두 참 새삼스러운 눈으로 보게 되는군요.

2008/03/28 – [문화/여행] – 매직 리얼리즘에서 소쉬르까지..

에서 이어집니다.
————————-

궤네깃또 :

포켓횽/ 아..그렇군요.
 
횽 덕에 또 하나 찾아 읽어봤습니다.
덕분에 공부를 많이 하게 되네요.^^
 
그런데, 저는 중남미의 그런 매직리얼리즘이나, 메타픽션적 사고체계를 보면 안타까운 것이,서구 같은 경우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이 근대에 대한 자기반성적 성찰의 의미로 비롯된 것인데 반해, (물론 그래봤자 자본주의적 상품화나 개인의 파편화를 더 부추긴 점이 많지만)중남미 같은 경우는 미처 근대적 성취도 제대로 이루기 전부터 사회전반적으로 매직과 실재를 혼동하는, 어떻게 보면 중세적 신비주의나 미신적 전근대성이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게된 현대화의 물결 속에서, 근대성에 대한 깊은 천착이 생략된 전근대(중남미인의 내면성)와 탈근대(세계적 현실)의 어중간한 타협의 산물일 뿐인데도,

즉, 서구의 포스트모던처럼 모순적인 근대에 대한 철저한 반성에서 나온 것이 아닌데도, 외형적 유사성만을 가지고 포스트모던한 문화라고 포스터모더니스트 자기들끼리 분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그런 안타까움은 오늘의 한국사회를 볼 때도 마찬가지랍니다.
어쩌면 그렇게 중남미와 유사한 점이 많은지…ㅡ.ㅡ;;
 
그리고 기본적으로 포스트모던 자체가 제가 보기엔 어떤 것도 제시해주지 못하며, 또 포스트모던 자체가 그런 제시 자체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것을 좀 허무스럽게 바라보고 있기도 하답니다.
 
혹시 포켓횽은 거기 계시면서 현실과 문화를 대비하여 그런 느낌을 받으신 적은 없으신지요.^^

포켓 :

궤홓/
가끔 다른 기회에서 언급했지만 근대성도 제대로 경험, 실천하지 못한 나라들에서 소위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엉켜 들어서 뒤죽박죽된 예가 많습니다.

중남미,,, 아직도 왕정적 사고방식(특히나 근대성의 전제조건인 종교에 대한 비판이 없는)이 지배하는 이 지역, 무삼 말해서 무슨 필요가 있겠어요?

포스트모던적 사유나 방식 자체는 결코 나쁜 것은 아닌데…. 한국도 마찬가지겠지만 일정부분 중남미에 기여한 것이 있을 겁니다. 중남미 나라들의 민주화로의 전반적인 추세, 좌파세력의 등장 등등…다만 개인의 인식의 전환과 사회구조의 변혁 두가지가 하나를 배척하지 않고 공존해 나가야 하는데, 중남미 현실을 볼 때 현재로서는 어렵다는 거지요.

한가지 더…매직 리얼리즘이 추구하는 이상은 근대에 이성 맹종에 대한 대안으로서는 더할 나위없이 바람직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만 그 사유나 그 사유를 표현하기 위한 언어수단을 누가 소유하느냐에 문제의 핵심이 있을 겁니다.

심송팬 :

깃또님/ 페리 앤더슨 (Perry Anderson) 의 포스트 모더니티의 기원 (the origins of postmodernity)이라는 책을 읽으시면, 깃또님이 좋아하지 않으실까 생각합니다.
 

그 책이 포스트모더니티의 기원에 관해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조금 분위기가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있거든요. 아 그리고, 남미와 포스트모더니티의 관계에 관해서도 대략 설명하고 있습니다.

궤네깃또 :

포켓횽/ 저도 포스트모더니즘이 기존지배이데올로기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현대인에게 탈구축의 인식이나 전략(?)을 제시하고자 했다는 의도는 가상하다고 생각한답니다.
 
그런데 그 실제 효과가 아주 웃기다는 거죠.
실제효과는 개인의 파편화와 상품화에의 몰입을 더욱 부추긴 면이 있으며, 결국 신보수적 이데올로기를 은폐 혹은 재생산해내고 있지 않나하는 혐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부르짖는 다양성이나 차이란 것도, 그 용어의 건전성과는 달리 실제로는 극단적 상대주의를 부추긴 면이 있어 보입니다.
 
가끔 황토방에서도 그런 현상을 보는데요, 자기들에게 유리한 말은 다양성으로 수용하면서, 불리해 보이는 충고 같은 것은 사람마다 다 생각이 다르고 누구의 관점이 올바른 것인지는 알수 없다는 이유로, 즉, 진리의 상대성을 이유로 배척해 버리는 거죠.
 
물론 황빠들이 포스트모던을 알고 그런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그런 풍조가 소위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대중에게 인터넷을 통한 일정한 발언권이 주어지면서 최근 수년래에 광범해진 것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대중의 발언권은 소중한 것이고 바람직하나, 이런 대화불능의 극단적 상대주의는 소통에는 아주 치명적 부작용이라고 봅니다.
 
기존 근대성이 극단적 절대성의 부작용을 가졌다면, 이런 포스트모던적 흐름은 상대성의 부작용을 극단화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균형감의 상실이랄까요.
 
아무튼 이런 것은 포스트모던이 낙오된 자들에게 근대의 경험을 면제해주는 구호로 악용되는 전형적인 사례로 보입니다.
 
그리고 포스트모던이 주장하는 바 다양성이란 것이 결국은 극단적으로 상대주의화 함으로써 더욱 더 현대인을 파편화 시키고 분열시키는 기제가 있는 것 만큼은 사실 같습니다.
 
문제는 대중은 파편화되는데 기존의 지배권력은 그대로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여전히 지배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래서는 포스트모던이 애초에 제기했던 문제의식(기존 지배이데올로기에서의 탈출)과는 서로 상충되는 결과가 아닐까 하는겁니다.
 
즉, 문제제기는 옳았으나 그 방법으로 쥐어준 도구는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는..그런 느낌이라는 것이죠.
 
포스트 모더니즘의 주장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김기덕의 영화를 보고 난 후의 불쾌감이랄까…아무튼 무책임함 같은 것이 느껴져서 난감합니다.
 
그리고 들뢰즈나 가따리 같은 경우 그들이 주장하는 리좀적 자아라는 것이 제가 보기에도 상당히 파시즘적 요소를 부추기고 있다는 생각에 많이 불편해지곤 한답니다.
 
아무튼 중남미의 그런 매직리얼리즘이 포스트모던이고 뭐고를 떠나서 그곳 인민들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작용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심송팬횽/ 책 추천 감사 ^^
근데 알아보니 그 책은 아직 한글판은 없나 봅니다.

포켓 :

궤홓 의견에 대부분 동감.. 그래서 참 어려워요.. 그렇다고 다시 거대담론 세계로 회귀할 수도 없는 거고… 다양성이라는 것으로 개나 소나 다 떠들고, 두화니도 알고 보면 나쁜 넘이 아니었다.. 이런 개소리들도 버젓히 나오는 거고…

근대성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아니 계몽주의도 겪어보지 못한), 오로지 근대화(modernization)만  조금 맛본 한국인이 지고 가야할 족쇄이자 굴레입니다.

참고로 심송팬님이 추천한 책은 우리도 이전 같이 공부했던 책인데 아마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았을 겁니다.

궤네깃또 :

포켓횽/께서 동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
 
그래서 저도 나름대로 어떤 균형감 있는 새시대의 이론을 접해볼 요량으로 이것 저것 뒤져보기는 하는데…

아직까지는 마땅해 보이는 것이 눈에 안 띄는군요.
 
분명 과거의 거대담론으로의 회귀는 이미 그 부작용이 검증되다시피 했고, 새로운 것은 안보이고…

그런 걸 비록 실천은 못하더라도, 좀 알고나 죽고는 싶은데 말입니다. ㅎㅎ

궤네깃또 :

아..그리고…혹시 이거 이미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촘스키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 대해 쓴 글인데요.
안보셨으면 심심하실 때 한 번 보세요.
 
저는 촘스키에 대해서도 일부분(언어학적인 부분)은 다소 비판적입니다만, 이 글은 촘스키적 입장에서 상당히 적확해 보입니다.^^
 
—————-
 
Z에 기고한 촘스키의 글


행을 가서 강연을 마치고 – 제 대부분의 생애를 이것으로 보내지요 – 돌아와보니 “이론”과 “철학” 에 대한 토론과 관련해서
계속 글들이 올라오고 있군요. 제가 보기에는 다소 기묘한 논쟁입니다만 말입니다. 여기 제 반응들을 몇가지 올립니다. 단, 미리
인정하겠지만, 솔직히 지금 무슨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 이 논쟁은 처음에, 저와 마이크[Michael Albert; “Z”의 편집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아무런 “이론”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여러가지 사건들이 왜 일어나는가에 대해 어떠한 설명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난에서
촉발되었지요.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이해하고 해결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이 점에서 약점을 가지고 있고, 이 약점을 고치기
위해서는 “이론”과 “철학”과 “이론적 구성물들”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굳이 마이크를 대변할 필요는 없겠지요.
 
지금까지 저의 응답은 제가 35년전, 그러니까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이 지성계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기 오래 전부터 이미 활자화했던 주장들을 거의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이 말했지요:
 
“만약에 시사 문제들을 다루거나 국내외의 분쟁들을 해결하는데에 적용할 수 있고, 충분히 시험을 거쳤으며 잘 검증된
이론이 있다면, 누군가가 그런 이론의 존재를 지금까지 비밀리에 잘 감춰왔음이 분명하다. [그런 이론이 있다는] 수많은 사이비
과학적 허세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제가 아는한 이 말은 35년전에도 맞는 말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더구나, 제가 한 말은 인간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모든 연구들에 확장되며, 35년전 이후부터 지금까지 나온 “이론”들에
대해서도 물론 단 하나의 예외없이 적용됩니다. 제가 아는 한 그동안 바뀐 것이라면, 이른바 “이론”과 “철학”을 제안하는 사람들
사이에, 스스로에 대한, 그리고 서로에 대한 존경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사실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사이비 과학적 허세”이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찾을 수 없지요. 제가 에전에도 썼지만, 조금이나마 찾을 수 있는
것들중 가끔 꽤 흥미있는 것들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것들도 제 시간과 정력을 바치고 있는 실제 세계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함축을 가지고 있지 않지요. (가령, 예를 들어달라는 구체적인 요구와 관련해서 제가 언급한 것으로,
롤즈(Rawls)의 중요한 작업이 있습니다.)

자기네들끼리에 대한 존경심의 폭발적인 증가라는 현상은 이미 주목받고 있습니다. 가령 상당히 괜찮은 철학자이자
사회이론가 (그리고 또한 활동가이기도 하지요)인 앨런 그라우바드 (Alan Graubard)가 몇년전에 롤즈에 대한 로버트 노직
(Robert Nozick)의 “자유지상주의적”인 응답, 그리고 그 응답에 대한 반응들과 관련해서 흥미있는 논평을 썼었지요.

 
앨런은, 노직의 응답에 대한 반응들이 아주 열광적이었음을 지적했습니다. 논평을 썼던 사람들마다 노직의 논변들이 가지는
파워 및 그밖의 여러 점들을 극찬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누구도 실제 세계와 관련된 노직의 결론들중 그 어느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 중 이미 그런 결론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예외로 하고 말이지요). 앨런의 지적이 맞습니다. 더불어
이런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그의 논평도 맞구요.

“이론”과 “철학”을 지지하는 이들은, 자신들을 옹호하길 원한다면 아주 쉽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냥 저에게,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비밀”로 남아있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면 됩니다. 기꺼이 공부하겠습니다. 사실 이전부터 알려달라고
여러번 요구했지요. 그리고 여전히 답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답변하기 어려운 요구가 아닙니다:

 
마이크, 저,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이 (사실, 편협하고 놀랍게도 자족적인 지식인 사회를 제외한 대다수의 인류가)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들과 사안들에 “적용할 수 있고, 충분히 시험을 거쳤으며, 잘 검증된 이론”의 예를 보여주면 됩니다.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그리고 글을 쓰고 있는 문제들과 사안들, 또한 이들과 같은 종류의 문제들과 사안들에 대해서 말이지요.
 
조금 다르게 말해보면, 우리가 공부해야한다고 하고 또 적용해야 한다고 하는 “이론”이나 “철학”의 원리들이, 우리 및
다른 이들이 다른(또는 더 나은) 근거에 의해 이미 다다른 결론들을 타당한 논변을 통해 이끌어낸다는 점을 보여주십시오.
 
이 “다른 이들”에는,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도 포함됩니다. 왜냐하면 이들 또한 “이론적” 모호함 같은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상호 관계를 통해, 또는 곧잘 스스로들, 제가 말한 그런 결론들에 다다르니 말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은 간단한 요구입니다. 이런 요구를 전에도 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여전히 그 비밀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지요. 저는 이러한 사실로부터 몇가지 결론을 끌어냈습니다.

요즘 진행되고 있는 (그리고 논쟁에서 언급된 바 있는) 이른바 “해체(deconstruction)”과 관련해서는
논평을 할 수가 없군요. 왜냐하면 그 대부분이 저에게는 횡설수설인것처럼 보이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만약에 이것이 심오함을 깨닫지
못하는 저의 능력부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신호라면, 다음으로 여러분이 해야할 일은 분명합니다:

 
그 결과들을 제가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들로 다시 서술해주고, 이 결과들이, 세음절 이상 나가는 단어, 비정합적인
문장, (최소한 저에게는) 거의 아무런 의미도 없이 남발되는 수사, 이런 것들 없이도 이미 오래 전부터 다른 사람들이 이해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인 결과들과 왜 다른지, 또는 왜 더 나은지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제 능력부족이 치료가 되겠지요. – 물론, 치료가 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말입니다. 어쩌면 치료가 안될지도 모르지요. 이 가능성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건 만족시키기 아주 간단한 요구입니다. 그렇게도 대단한 열정과 분노로 제기되는 주장들에 어떤 근거라도 있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단순한 요구를 만족시키려고 노력하는 대신, 답변들을 보면 잔뜩 화만 내고 있지요: 이런 요구를 제기하는 것은
“엘리트주의”, “반지성주의”, 또 그밖의 다른 범죄들을 범하는 것이라고 하지요.

 
— 반면에, 스스로에 대한 존경과 상호간의 존경이 가득한 지식인 사회에 머무르면서 자기네들끼리만 얘기하고 제가 있기를 더 선호하는 종류의 세계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엘리트주의”가 아니라고 하는 듯 합니다.
 
제가 더 선호하는 세계에 대해서라면, 제 강연 및 집필일정만 봐도 제가 뭘 의미하는지 예시가 될 겁니다. 물론 이 토론
참가자들이야 다 알고 있거나, 쉽게 알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 저는 그 세계에서 어떤 “이론가”들도 본적이
없으며, 그들이 하는 회의나 파티에 가본적도 없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저와 그들은 그냥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의 세계가 아닌 제 세계가
“엘리트주의”적 세계인지는 알기 힘듭니다. 더 이상 논평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그 반대가 사실이라는 것은 자명한듯이 보이지요.


다른 면을 덧붙이자면, 저에게는 강연 요청들이 너무나 많이 밀려들어와 도저히 제가 원하는만큼 다 수용을 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런 경우 저는 다른 사람들을 제안하지요. 하지만 기묘하게도, 저는 “이론”이나 “철학”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절대 제안하지
않습니다.

 
대중 모임과 활동가들의 모임및 단체, 일반 단체, 대학, 교회, 노조, 등등, 또 국내외 청중들, 제3 세계 여성들,
난민들, 등등, 이들과 관련된 제 자신의 (상당히 광범위한) 경험에서, 그런 사람들과 (또는 그들의 이름조차도) 우연히
부딪히거나 한 적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궁금합니다.

그래서, 게시판의 이 모든 논쟁이 기묘하다고 하는
것이지요. 한편으로는, 성난 비난과 탄핵을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비난과 탄핵을 지지할만한 증거와 논변을 보여달라는
요구에 대해 더한층 분노로 가득찬 비난으로 응답을 합니다. — 하지만 놀랍게도, 어떤 증거나 논변도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왜 그럴까를 물어보게 되지요.

제가 뭔가를 놓치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도 전적으로 가능합니다. 또는 어쩌면 과거 20년동안 [프랑스] 파리의 지식인들과 그 추종자들이 밝혀놓은 심오한 사실들을 이해할만한 지적 능력이 저에게 부족한 것이지도 모르지요.

 
저는 그런 가능성들에 대해 전적으로 열려있습니다. 비슷한 비난들이 쏟아진 수년간 계속 그래오고 있지요 – 하지만 제 질문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답변도 들을 수 없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제 질문들은 간단하고 답변하기 쉬운 것들입니다 – 답변이 있다면 말입니다: 제가 뭔가를 놓치고 있다면, 그게 뭔지 보여주십시오. 제가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들로 말이지요.
 
물론, 그것들이 완전히 제 이해를 벗어나 있는 것이라면 – 그럴 수도 있습니다 -, 그렇다면 체념해야지요.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제가 이해할수 있는 것 같은 일들을 계속해야지요. 또한 이 일들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으며 관심있어하는 것 같은
사람들과 계속 다녀야지요. (물론 저로서는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자기 자족적인 지식인 문화에 대해서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아무도 제가 뭘 놓치고 있는지 성공적으로 보여준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남은 것은 두번째 가능성인 것 같습니다:
제가 이해를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 가능성이 참일지도 모른다는 점은 기꺼이 인정합니다만, 저로서는 계속
미심쩍어할수밖에 없군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말이지요: 제

 
가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 가령, 중성미자(neutrino)가 질량을 가지고 있는가에 관한 최신
논쟁, 또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최근에 어떤 식으로 증명되었는가에 대한 지식. 하지만 저는 이쪽 동네에 50년간을 있으면서
다음과 같은 두 사실을 배웠지요:

(1) 관련 분야에 있는 친구들에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설명해달라고 부탁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특별한 어려움없이 내 부탁을 들어줄수 있다.

(2) 내가 관심있으면, 좀 더 공부해서 이해할 수도 있다.

자,
이제 데리다(Deridda), 라캉(Lacan), 리오타르(Lyotard), 크리스테바(Kristeva), 등등 – 심지어
푸코(Foucault)도 말이지요. 비록 제가 그를 알고 있고 좋아했으며, 이 부류의 다른 이들과는 조금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말입니다 – 은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글들을 쓰지요.

 
하지만 [이들의 글과 관련해서는] (1)과 (2)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해했다고 하는 어떠한 사람도 저한테 그걸 설명해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사실 그런 저의 이해불능을 어떻게 극복해야할지 조금의 실마리도 찾을 수 없습니다.그렇
 
다면, 다음의 두가지 가능성중 하나가 맞겠지요. (a) 지성계에 무엇인가 새로운 진보가 이루어졌다 (아마도 어떤 종류의
갑작스러운 유전자 돌연변이에 의해서이겠지요). 그 결과 그 깊이와 심오함에 있어서 양자역학, 위상수학, 등등을 뛰어넘는 형태의
“이론”이 탄생되었다. 또는 (b) . . . .자세히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이 지식인
세계라는 데에서 50여년간을 살아왔고, “철학”과 “과학”이라고 불리우는 영역들 및 지성사 분야에서 제 자신의 일을 상당량 해
왔습니다. 아울러 자연과학, 인문학, 사회과학, 그리고 예술 분야에서의 지식인 문화에 대해 상당한 개인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지요. 이런 경험을 통해, 저는 지식인들의 생활에 대한 제 자신의 결론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자세히 쓰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간단히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여러분들보고 “이론”과 “철학”의 경이로움에 대해 말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해줄 것을 요구하십시오.
물리학, 수학, 생물학, 언어학, 그 밖의 다른 분야들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군가가 그들보고 진지하게 그들 이론의 원리들이
무엇이고, 그 원리들이 어떠한 증거들에 바탕해있고, 그것들이 설명하는 것들이 이미 명백한 것들이 아닌지 등등을 물어볼 때 기꺼이
답해주겠지요.
 
이건 누구나 해야하는 공평한 요구들입니다.
이 요구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면, 그렇다면 저는 비슷한 상황에서 흄(Hume)이 제시한 충고를 받아들이라고 제안하겠습니다: 그 “이론”과 “철학”을 불속에 던져버리십시오.

이제 몇가지 세부적인 논평을 하겠습니다: 제가 “파리 학파들”(Paris Schools)과 “포스트모더니스트 종파들”(Postmodernist cults)을 말할 때 어떤 사람들을 가리키는 건지 페틀랜드(
P.h.e.t.l.a.n.d)가 물어보았지요. 위에 든 사람들이 그 일례들입니다.


다음에 페틀랜드가, 당연하게도, 왜 제가 이들을 “무시”하느냐고 물어보았지요. 가령 데리다를 들어볼까요. 우선, 저는 이제부터
제가 하려는 것과 같은 종류의 논평을 아무 증거도 제시하지 않고 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점을 밝힙니다.

 
하지만 여기 이 게시판에 참가한 사람들이, 가령, 소쉬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원하는지 의심스럽군요. 그리고 어쨌든
저는 그런 분석을 하지 않을 겁니다. 페틀랜드가 제 견해를 명시적으로 물어보지 않았다면 이제부터 할 얘기를 하지도 않을 겁니다.
그리고 만약 제 견해를 뒷받침하라고 요구받는다면 저는, 그런 일은 시간들여서 할만한 가치가 없다고 답변할 것입니다.


쨌든 데리다를 보겠습니다. 나이많은 저명한 사람들 중 하나이지요. 저는 최소한 그의
<그라마톨로지(Grammatology)>는 이해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은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읽으려고
시도했지요.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가령 제가 매우 잘 알고 에전에 거기에 관해서 논문도 쓴 적이 있는 고전적 문헌들에
관한 비판적 분석같은 것 말이지요. 우스꽝스런 오독에 근거한, 형편없는 스칼라쉽이었습니다.

 
아울러 그 논변이라는 것이, 제가 사실상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익숙해왔던 정도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지요.
글쎄, 아마 제가 뭘 놓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위에서 말한대로 의심은 여전히 남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아무런 근거도 대지 않은 논평에 대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 견해를 물어봤으니, 답변을 하는 겁니다.


종파들 (제가 보기에는 종파들처럼 보입니다)에 있는 사람들 중 몇몇은 저도 만나보았습니다: 푸코 (우리는 심지어 몇시간씩 토론도
했지요. 활자화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동안 매우 즐거운 대화를 했지요. 실질적인 사안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 그는
불어로, 저는 영어로).

 
라캉 (여러번을 만났고, 재미있는, 그리고 자신도 잘 알고 있는 사기꾼 (charlatan)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종파를 형성하기 이전인 그의 초기 연구는 사리에 맞는 것이었고 이에 대한 제 논의도 활자화되어있지만 말입니다). 크
 
리스테바 (그녀가 열광적인 마오주의자였을 때 잠깐 만난적이 있지요). 그밖에 다른 사람들도 있습니다. 만나보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지요. 저는 제 선택에 의해 이들 써클을 멀리 했고, 전혀 다르면서 훨씬 광범위한 써클들을 더 선호했으니까요
– 제가 강연하고, 인터뷰하고, 운동에 참여하고, 매주 몇십장씩 긴 편지들을 쓰고 하는 써클들 말입니다.
 
저는 호기심에 이끌려 그들의 저술에 손을 댔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이유들 때문에 진도를 많이 나가지는 못했지요:
제가 본 것은, [이들이] 극단적으로 허세를 부리면서도, 검토해보면 그 허세중 대부분은 단순히 그 분야에 대해 기본 소양이
없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제가 잘 알고 있는 (때로는 제가 논문을 쓴 적도 있는) 문헌들에 대한 엄청난 오독, 기본적인 자기-비판도 수시로
무시한다는 점에서 지독하게도 형편없는 논변, (복잡다단한 말들로 치장되어있지만) 사소하거나 거짓인 많은 진술들, 이런 것들에
근거한 허세이지요. 더불어 상당부분은 그냥 횡설수설(gibberish)입니다.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분야들에서 중간에 막힐 경우에는, 저는 위에서 말한 (1)과 (2)에 관련된 문제들과
부딪히지요. 어쨌든 위에서 말한 사람들이 제가 애초에 염두에 둔 사람들이고, 또 제가 왜 진도를 많이 나가지 못했는가에 대한
이유입니다.
 
혹시 불분명하다면 더 많은 이름들을 나열할수도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하지만
내부인으로서의) 관찰에 대한 문학적 묘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데이비드 롯지 (David Lodge)의 소설들을
권하겠습니다. 제가 판단할 수 있는 하에서는, 정곡을 찌른 것 같습니다.

페틀랜드는 또한, 제가 “뉴욕 타임즈의 허세와 혹세무민을 드러내는” 데에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이들 지식인 써클들에 대해서는 아주 “간단히 무시”하는 것이 “매우 당혹스럽게” 여겨진다고 썼습니다.

 
“왜 이 사람들에 대해서도 같은 식으로 취급해주지 않는 것이지요?” – 정당한 질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간단한 답변이
있지요. 제가 논의하는 (뉴욕 타임즈, 여러 저널들, 많은 학술책들) 텍스트들은 이해가능한 글들로 씌어져있고 세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사회같이 성공적으로 교설적인 (doctrinal) 사회에서, 생각과 표현을 담는 교설의 틀 (doctrinal
framework)을 제공하니까 말입니다. 이것은 세계 전역에 걸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주지요.
 
저는 이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지, 롯지가 (제 생각에는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세계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따라서 만약 일반적인 사람들과 그들의 문제들에 관심이 있다면, 제가 논의하는 텍스트들을 진지하게 다루어야지요.
 
페틀랜드가 언급한 글들은, 제가 판단하는 한, 전혀 그런 성격의 글들이 아닙니다. 분명히 그 글들은 세계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지요. 왜냐하면 이 글들은 단지 같은 써클들 내에 있는 다른 지식인들에게만 읽혀지니까요.
 
더구나, 이들 글들을 일반 대중들 (가령, 제가 강연을 하거나, 만나거나, 편지를 쓰거나, 또는 제가 글을 쓸때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별다른 특별한 어려움 없이 제가 말하는 것들을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비록 일반적으로 볼 때 이들 역시 제가 포스트모던 종파들에 맞닥뜨렸을때 가졌던 것과 같은 종류의 지적 장애를 그
종파들에 대해 가지는 것 같지만 말입니다)에게 이해시켜보려는 시도가 있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또한 저는 그런 글들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적용해보려는 시도가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제가 앞에서 언급한 의미에서, 이미 명백한 것이 아닌 뭔가 새로운 결론들을 뒷받침해주는 역할로서의 적용을 해보려는 시도
말이지요. 저는 지식인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명성을 부풀리고, 특권과 존경을 얻고, 일반일들의 투쟁에 동참하는 것을 점점
멀리하는가, 이런 것들에 대해 큰 관심이 없기 때문에 거기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 것이지요.

페틀랜드는 푸코에서부터 시작해 볼 것을 제안하는군요. 반복하지만, 푸코는 다른 이들과 두가지 이유에서 조금 틀리지요:

 
[첫번쩨로] 최소한 푸코가 쓴 글들중 몇몇은, 비록 그렇게 흥미롭지는 않습니다만, 저도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로, 푸코는 개인적으로 [대중들의 투쟁에] 멀리 떨어져있지 않았고, 같은 부류의 특권 엘리트 써클들안의 다른 이들과만 상호 교류하지도 않았지요.
 
 이어서 페틀랜드는 정확히 제가 요구했던 것을 답하려고 합니다: 페틀랜드는 왜 자신이 푸코의 저술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쓰고 있지요. 이것이 토론을 하는 제대로 된 방식입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는 여기에 대한 제 답변을 통해 왜
제가 이런 부류의 저술들에 대해 그렇게도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는지 이해가 되리라 봅니다 – 사실, 전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지요.

페틀랜드가 서술하고 있는 푸코의 “이론” – 올바른 서술이라고 확신하건데 – 은 제가 보기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론”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알고 있었던 것이니까요 – 사회사 및 지성사와 관련된 세부 사항들을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사실 이 세부사항들에 대해서도, 저라면 상당히 주의하겠습니다: 이 영역들 중 몇몇은 제 자신이 우연히도 꽤 광범위하게
연구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영역들과 관련해서는 푸코의 스칼라쉽이 별로 신뢰할만한게 못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요. 그 결과 제가
모르는 영역들에 대해서도, 별다른 조사는 하지 않았습니다만, 그의 작업을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1972년 이래로 활자화된 논의들을 보면, 이런 문제점들이 조금씩 불거지기 시작하지요. 17세기와 18세기에 관련해서 [푸코보다] 훨씬 더 나은 스칼라쉽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들과, 제 자신의 조사결과를 참고하지요.
 
하지만 다른 역사 관련 저술들은 제쳐놓고, “이론적 구성물들”과 설명들로 넘어가봅시다:
 
“가혹한 억압 메커니즘으로부터, 사람들이 권력이 원하는 것들을 (심지어 자발적으로) 하게 되는 보다 교묘한 형태의 메커니즘으로의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 설명은 진실입니다. 사실, 당연한 말이지요.
 
만약 이런 게 “이론”이라면, 저에 대한 모든 비판은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그런 “이론”은 있으니까요. 저는
정확하게 푸코가 지적하고 있는 바로 그 점을 지속적으로 주장해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이유와 역사적 배경도 제시했지요.
 
하지만 저는 제 견해를 “이론”이라고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론”이라는 용어를 붙일만한 것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헷갈리게 만드는 수사도 쓰지 않았지요 (왜냐하면 제 주장은 아주 단순한 것이니까요). 아울러 제 견해가 새로운 것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았지요 (왜냐하면 당연한 사실이니까요).
 
통제와 억압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력이 쇠락해감에 따라 20세기초 PR 산업 종사자들이 “대중들의 마음을 조종하기”라고 부른 것들에 점점 의존해야 될 필요성이 생겼다는 것은 오랫동안 인지되어온 사실입니다.
 
18세기에 흄이 말했듯이, 그 이유는, “사람들이 자신의 느낌과 욕구를 통치자들의 느낌과 욕구에 굴복하여 암묵적으로
맡겨버리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통치자들이 사람들의 견해와 태도를 조종하는데에 근거해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당연한 사실이
갑자기 “이론”이나 “철학”이 되어야하는지는, 다른 사람들이 설명해주어야지요. 흄이라면 웃었을 겁니다.

푸코의 특정한 예들 중 몇몇 (가령 18세기의 형벌 방식)은 흥미있어 보이고, 그 정확성에 대해 조사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단순히, 남들이 별다르게 심오한 것이 있다는 허세없이도 간단하게 지적해놓은 것을 엄청나게 복잡하게 만들고 부풀려서 다시 진술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페틀랜드가 서술한 것 중 그 어느 것도 제가 35년간 써왔고 많은 자료들을 통해서 보여왔던 것들 – 이것들 모두가
명백하고 당연한 사실들이지요 -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습니다. 이런 사소한 사실들에서 흥미있는 것은 어떤 원리가 아니라 – 그
원리가 무엇인지는 명백하지요 – 어떻게 이 원리가 사람들에게 중요한 일들에 구체적으로 적용되는가 하는 점을 보이는 것입니다:
 
국가개입, 칩략, 착취, 테러, “자유시장”이라는 사기, 등등에서 말입니다. 이것들과 관련된 작업은 푸코의 저술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반면에 제가 이해할 수 있는 문장들을 쓸 수 있고 지성계에서 “이론가들”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사람들의 많은
저술들에서는 그런 작업을 찾아볼 수 있지요.

제 논지를 분명히 하겠습니다.

 
페틀랜드는 정확히 옳은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보기에 푸코가 발견한 “중요한 통찰들과 이론적인 구성물들”을
제시하고 있으니까요. 제 문제는, 그 소위 “통찰들”이라는 것이 이미 익숙한 것들이며, 더구나, 단순하고 익숙한 아이디어들이
복잡하고 허세에 가득찬 수사들로 치장되었다는 점을 뺀다면 어떠한 “이론적인 구성물들”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페틀란트는 제가 푸코의 작업을 “틀렸는지, 쓸모없는지, 또는 허세인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역사와 관련된 그의 작업은 때때로 흥미롭습니다. 비록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고, 하나하나 검증을 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겠지만
말이지요.
 
오랫동안 명백한 사실이었고 훨씬 더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점들을 재진술한 부분은 “쓸모없지” 않습니다. 사실 매우 쓸모있고, 그게 바로 저와 다른 활동가들이 늘 같은 점들을 지적하는 이유이지요.
 
“허세”와 관련해서는, 물론 제 견해로는 푸코가 쓴 많은 것들이 허세입니다. 하지만 특별히 그것 때문에 푸코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 허세는 프랑스 파리의 썩어빠진 지식인 문화에 아주 뿌리깊숙히 박혀있는 것이고, 푸코는 그냥 거기에
자연스럽게 빨려들어간 것이니까요. 오
 
히려 높이 사야 할 점은, 그가 그 문화에 거리를 두었다는 사실이지요. 파리 지식인 문화의 “부패”(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대해서는, 이건 다른 이슈이고 제가 다른 곳에서 논의한 적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여기 게시판의 사람들이 이 이슈에 대해 관심있어 해야할 필요가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별로 관심없습니다.
 
제 견해로는, 그들 자신들만의 편협하고 (최소한 저에게는) 별로 흥미롭지도 않은 써클들에서 엘리트 지식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들의 경력을 쌓았고 또 다른 것들을 추구했는지에 대해 검토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게 매우 성근 주장이라는 걸 압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아무런 증명없이 이런 논평을 한다는 것은 공정하지
않지요. 하지만 저에게 질문들을 제기해왔고, 저는 여러분들이 제기한 특정 이슈들만을 답했습니다. 제 일반적인 견해를 물어보면,
저로서는 그냥 제 견해를 말하는 방법밖에 없지요. 그리고 보다 특정한 이슈들에 대해서는 그것들 하나하나에 대해서만 답할 수
밖에요. 저는 제가 관심이 없는 주제들에 대해 책을 쓰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론”과 “철학”에 관련된 주장들이 제기될때 어떠한 합리적인 사람들이라도 곧바로 마음속에 떠올릴 단순한
문제들에 대해 누군가가 대답해줄수 없는한, 저는 제가 보기에 합당하고 계몽적인 작업들을 지속해나아갈 것이고, 또한 세계를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변화시키는 데에 관심있는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만날 것입니다.

존 (Johnb)은 “듣는 이가 준거틀 (frame of reference)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평이한 언어로 말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을 해주었습니다. 옳고 중요한 지적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 올바른 반응은, 있지도 않은 “이론”과 관련된 애매모호하고 불필요하게 복잡한 말과 허세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지요. 올바른 반응은, 듣는 이로 하여금 자신이 받아들이고 있는 준거틀을 의문시해보라고 요청하고, 그것 대신 고려해 볼 수
있는 다른 대안을 평이한 언어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저는 정식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혹은 어떤 경우에는 전혀 받지 못한 사람들과 늘 얘기하지만,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단 교육 수준이 점점 올라가서 지배 이데올로기에 단단히 세뇌되어 있고 알아서 복종하는 것 (엘리트 교육의 상당 부분은
이런 걸 가르치는 것이지요)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일수록 이해시키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존은 말하기를, 여기 게시판과 같은 써클을 제외한 “우리나라[미국]의 나머지 사람들에게 그(“그”는 저를 의미하지요)는
이해불가능한 사람이다”라고 했지요. 이건 제 많은 경험들에 완전히 위배되는 말입니다. 모든 종류의 청중들과 관련해서 말이지요.
오히려, 제 경험은 제가 방금 서술한 그대로입니다.
 
가령, 라디오 대담을 보지요. 저는 라디오 대담에 상당히 많이 나갔는데, 억양등을 들어보면 청취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를 상당히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제가 끊임없이 발견하는 것은, 청취자가 가난하고 덜 교육받은 사람일수록 많은
배경지식이나 “준거틀” 문제같은 것을 제가 그냥 건너뛸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말하는 것들은 상당히 자명하고 모든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저는
그냥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들로 곧장 옮겨나아갈 수 있습니다. 좀더 교육받은 청취자일수록 이게 훨씬 더 힘이
듭니다. 수많은 이데올로기적 구성물들을 부숴버리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제가 쓴 책들을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건 그 안의 아이디어들이나 언어가 복잡해서 그런것이 아니지요. 강연장에서 자유토론을 할 때는,
정확히 같은 사안들에 대해, 심지어 정확히 같은 단어들을 써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요. 아마도
부분적으로는 제 문체 때문일 것이고, 부분적으로는 상당히 방대한 자료를 제시해야 될 필요 (최소한 저는 그렇게 느낍니다) 때문에
그 결과 읽기가 어려워지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제 책에서 특정 부분을 (어떤 때는 거의 그대로) 팜플렛 형태나 그 비슷한 것으로
만들어 배포하지요. 아무도 [이해하는데] 별 문제를 느끼는 것 같지 않더군요. 물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오히려 Times
Literary Supplement나 전문적인 학술 저널들은 도대체 제가 뭘 말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는 경우가 자주 벌어집니다만
말입니다. 어떤 경우에 보면, 정말 희극적이지요.

마지막 지적입니다.

이미 다른 데서도 썼습니다만 (Z에서의 토론, <501년: 정복은 계속된다>의 마지막 장등), 최근 지식인 계급의 행동에서 놀라운 변화가 있었지요.
 
60년전이라면 노동 계급 학교들에서 가르치거나 <백만인을 위한 수학> (제목 그대로,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수학을 이해가능하게끔 해주었지요)과 같은 책들을 쓰고 대중 조직들에 참여 및 강연을 했었을 좌파 지식인들이, 지금은 그러한
활동들을 거의 도외시하고 있습니다.
 
이건 조그만 문제가 아니지요. 지금 이 나라[미국]는 매우 이상하고 불길한 조짐을 보이는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분노하고, 환상에서 깨어나고, 회의적이 되고, 혼란스러워합니다. 마이크가 말한 것처럼, 이런 상황이야말로 활동가들이
꿈꾸어오던 것이지요.
 
그러나 동시에 이런 상황은 선동정치가들과 광신자들에게 비옥한 토양이 되기도 합니다. 그들은 비슷한 상황에서 그들의
선배들이 뿌려왔던 메시지들을 뿌려대면서 상당수의 대중적 지지를 즐길 수 있을 (그리고 실제로 벌써 즐기고 있는) 것이니까요.
 

우리는 과거에 이러한 상황이 어떠한 식으로 발전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날 수도 있지요. 과거에는
일반 대중들과 그들의 문제를 기꺼이 공유하고자 한 좌파 지식인들이 메어왔던 간극이, 현재는 엄청난 틈으로 존재하고 있지요. 제가
보기에 이러한 상황은, 불길한 함축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답변을 끝냅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앞에서 말한 명백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받지 못할 경우, 이 문제에 대한 저의 개인적 관심도 이것으로 끝을 내려고 합니다.

물뚝심송 :

장문 테러범이 장문테러의 거두가 행한 장문 테러를 퍼오니, 세상 만사가 장문테러로군화~~

심송팬 :

누릉지님/ 잘 지내시죠.
 
포켓님/ 이전에 공부하실때 그 책을 보셨다면, 최근까지도 공부하셨었나보군요, 제 기억으로 그 책이 1998년도 쯤 출판된 것으로 아는데….
 
깃또님/ 그 책이 아직 번역이 안됬군요. 한국에서도 포스트모더니티라는게 워낙 유행했고, 페리 앤더슨이 또 한 유명하는 사람이라 당연히 번역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 책에서 포스트모더니티에 대한 앤더슨의 태도가 펌해오신 글에서 프랑스 학자들에 대한 촘스키의 태도와 조금
비슷합니다. 시니컬하죠. 제 기억으로는 그 책에서 포스트 모더니티에 대한 하버마스의 주장에 대해서도 비슷한 태도를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펌해오신 글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펌해오신 것인지요? 그리고 z이라는게 무엇인지요? 저널인가요 포럼 싸이트인가요?
 
푸코 주장이 별반 새로운 것이 아니지 않느냐라는 촘스키의 비판을 들으니, 한편으로는 크게 틀리지 않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있을까 십네요, 특히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연구에서….
 
제 개인적으로는, 촘스키의 뉴욕타임즈 또는 미국 언론에 대한 일련의 비판서들도 전혀 새로운 것이 없었는데…. 물론, 푸코에 비하면 훨씬 읽기 쉽죠.

궤네깃또 :

심송팬횽/  Z라는 건 촘스키가 참여하고 있는 매거진인가 봅니다.
 
 
글고 푸코주장이 별반 새로운게 없다는 지적은,
새롭지 않아서 문제라는 말이 아니라,
별반 새롭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뭔가 엄청난 것을 만든 듯이 난리부루스를 추고 있는 허세가 문제라는 지적일 겁니다.
 
그것도…
분쟁들을 해결하는데에 적용할 수 있고, 충분히 시험을 거쳤으며 잘 검증된 이론도 아니것 같은데,
대중들은 알아듣지도 못할 말로 , 지들끼리 자화자찬하면서 말이지요.
 
그래서 촘스키가 보기엔 좀 같쟎다 하는 정도가 아닐까 싶네요.
그러니까 정확한 논평요청에 대해 위에처럼 잡담성의 글로 대응한 것 같습니다. 그냥 껌씹듯이 가볍게…ㅎㅎ

—————————–

편집자 주 :

이 대목에서 전혀 내용의 진행과는 상관없이 너무 길어진다는 이유만으로 끊고 다음편으로 넘기겠습니다.







1 thought on “매직 리얼리즘에서 소쉬르까지 – 2

  1. 지식 쌓기 보다는 지혜를 얻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의 올바른 주장은 계속 반복될 것이고, 반대자는 자취를 감출 것이다.
    계속하여 반복할수록 올바른 주장은 힘을 얻지만, 헛된 거짓 주장은 힘을 잃는 것이다.
    우리의 수학논리에 만약 잘못이 있다면 지적하고, 아니면 수학자들처럼 침묵하라.
    4CT& 페르마 정리 증명 심사오류 내부감사 직무유기 조사하라
    아펠과 하켄의 1976 년경 4색 구분 정리 증명은 1200시간 컴퓨터작업이 필요하고, 와일즈의 1997 년경 페르마 정리 증명은 200 쪽 방대한 분량으로서, 간단명료한 증명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으며, 우리의 간명하고 완벽한 4색 구분 정리 증명과 페르마 정리 증명을 부인하는 수학자는 국내외에 아무도 없다.
    심사의견 전체 오류임을 입증하는 다음 두 가지를 조사하라.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공익법인인 대한수학회의 반례를 요구하는 방법도 있고, 수학 기초지식을 가진 제3자에게 감정 의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첫째, 다음 세 가지 공식들은 모든 피타고라스 수를 구할 수 있다.
    X=(2AB)^(1/2)+A, Y=(2AB)^(1/2)+B, Z=(2AB)^(1/2)+A+B
    상기 공식은 c^2=A=Z-Y, 2d^2=B=Z-X 일 때 X=2cd+c^2, Y=2cd+2d^2, Z=2cd+c^2+2d^2 같이 된다.
    위 공식은 c+d=r 일 때 X=r^2-d^2, Y=2rd, Z=r^2+d^2 같은 기존 공식이 된다.
    둘째, [2^{(n-1)/n}+……+2^(2/n)+2^(1/n)](자연수)^{(n-2)/n} 과 (자연수)/(무리수) 는 항상 무리수가 된다.
    2006.3.3. 투고논문에 대한 2006.6.12. 심사의견이 전체적인 오류임을 지적하며 공익법인 내부감사를 의뢰하였으나 부당업무에 대한 감사도 아니하고 회신조차 아니 함에도 주무관청이 이를 방치하고 있다.
    * * * 09.11.17. 감사원장 조치내용 * * *
    “귀하께서는 감사원에 민원 (접수번호 제2009-08868, 08881, 08955호)를 제출하셨습니다. 검토결과, 위 민원은 교육과학기술부에서 조사할 사항으로 판단되어 교육과학기술부로 하여금 이를 조사 처리하고 그 결과를 귀하께 회신하도록 하였음을 알려 드립니다.”
    * * * 06.6.12.이후 공익법인 부당업무 * * *
    첫째, 논문심사의견 전체오류이며 편집장이 잘못된 주장만 반복하고 07.1.5.이후 회신도 없다.
    둘째, 부당업무 고발에도 자체 내부 감사를 실행하지 아니 한 잘못을 하고 회신도 없다.
    셋째, 주무관청의 성의를 가지고 답변하라는 요청도 무시하는 잘못을 하고 회신도 없다.
    4색 구분 정리 증명과 페르마 정리 증명 요약
    4색 구분 정리 증명
    [1] 한 점에 접하는 모든 지역들은 3색으로 충분히 구분된다.
    [증명] 한 점에 접하는 지역들 중에서 한 지역을 선택할 때, 이 선택된 지역에 접하는 주변의 모든 지역들은 2색으로 충분히 구분되기 때문이다.
    [2] 한 지역에 접하는 모든 지역들은 3색으로 충분히 구분된다.
    [증명] 한 지역 내의 한 점과 주변 지역들의 경계선들이 한 지역의 경계선과 만나는 점들을 연결할 때, 이 지역들은 결국 한 점에 접하는 지역들과 마찬가지로서 3색으로 충분히 구분되기 때문이다.
    [3] 한 지역과 한 지역에 접하는 주변의 모든 지역들을 구분함에는 4색으로 충분하다. 여기에서, 한 지역은 모든 모양의 무수한 지역들을 포함할 수 있다.
    [증명] 한 지역에 접하는 주변의 모든 지역들은 3색으로 충분히 구분되기 때문이다.
    2 가지 방법의 페르마 정리 증명
    Xn+Yn=Zn
    A=Z-Y, B=Z-X
    X=G(AB)1/n+A, Y=G(AB)1/n+B, Z=G(AB)1/n+A+B, X+Y-Z=G(AB)1/n
    {G(AB)1/n+A}n+{G(AB)1/n+B}n={G(AB)1/n+A+B}n
    n=1 일 때, G=0 이고, n=2 일 때, G=21/2>0 임.
    X=(2AB)1/2+A, Y=(2AB)1/2+B, Z=(2AB)1/2+A+B
    c2=A=Z-Y, 2d2=B=Z-X 일 때,
    X=2cd+c2, Y=2cd+2d2 and Z=2cd+c2+2d2
    c+d=e 일 때, X=e2-d2, Y=2ed, Z=e2+d2.
    페르마정리 증명 제1방법
    Xn+Yn=Zn
    (Xn/2)2+(Yn/2)2=(Zn/2)2
    a=Zn/2-Yn/2, b=Zn/2-Xn/2
    {G(ab)1/2+a}2+{G(ab)1/2+b}2={G(ab)1/2+a+b}2
    G=21/2>0
    Xn/2=(2ab)1/2+a, Yn/2=(2ab)1/2+b, Zn/2=(2ab)1/2+a+b
    Xn={(2ab)1/2+a}2, Yn={(2ab)1/2+b}2, Zn={(2ab)1/2+a+b}2
    홀수 n 에서 X, Y 와 Z 가 자연수일 때, 위식의 Xn, Yn 과 Zn 는 자연수이지만, 우변의 {(2ab)1/2+a}2, {(2ab)1/2+b}2, {(2ab)1/2+a+b}2 은 자연수가 될 수 없는 모순이 발생함으로 X, Y 와 Z 는 자연수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짝수 n 에서는 위와 같은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다. 한편, 짝수 n 에서는 모든 피타고라스 수가 거듭제곱이 될 수 없음으로 자연수 해를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페르마정리 증명 제2방법
    {G(AB)1/n+A}n+{G(AB)1/n+B}n={G(AB)1/n+A+B}n
    위 식에서 A=B 일 때, G=[{2(n-2)/n+…+21/n+1}n{2A(n-2)}]1/n 을 구할 수가 있고,
    상기의 식들을 이용하여, 모든 자연수 A, B에서
    G(AB)1/n 이 절대로 자연수가 될 수 없음이 증명된다.
    [증명인: 이재율과 이유진]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