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핵 이야기

(이 글은 2007년 무렵에 썼던 글입니다. 뜬금없이 생각이 나서 블로그에 옮겨 봅니다. )

로미오알바의 젊은 날의 추억에 대한 글을 읽던 중, 결핵 얘기가 나오면서 결핵에 대한 추억에 약 이초간 잠겼다. 이 글은 그 얘기다.

결핵은 조낸 무서운 병이다. 사실 알고보면 별것도 아닌데, 뻔히 알면서도 치료를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가 있기 때문에 무서운 거다. 거기다가 21세기 들어서 그 흔한 암도 아니고 결핵에 당해 버리면 쪽팔리지 않는가.

보통 가슴에 엑스레이 사진 한방 찍어보면 바로 알 수 있단다. 일반인들이야 아무리 들여다 봐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의사들은 안다.

결핵균은 나름대로 생존방법이 잘 발달된 넘이라서, 어지간한 항생제로 잘 죽지도 않는단다. 만약 모든 종류의 항생제에 내성을 가진 수퍼 결핵균이 퍼진다면 인류는 멸종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 초기에는 “아이나”, “리팜피신”, “메탐프톨” 같은 약을 준다. 거기에 피라지나마이드 같은거 섞어서 한 두달간 먹고, 그 다음에 한 육개월 이상 꾸준히 항생제를 장복해야 된다. 사실 말이 쉬워서 그렇지, 내 경험으로 그 한주먹쯤 되는 약을 매일 아침마다 공복에 먹는거, 참 괴로운 일이었다.

의사말만 잘 듣고 정기적으로 엑스레이 찍어 가면서 약만 꼬박꼬박 먹어가면 단방에 낫는다. 확실히 낫는다. 환자가 끔찍한 주거환경에 살거나, 어쩔 수 없이 과로를 하면서 영양 공급도 안되는 상황에 처해 있다면 모를까, 병원 안가고 보건소에서 약만 타다 먹어도 결핵은 낫는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상상해봐라. 매일 아침마다 눈뜨자 마자 이만큼의 약을 삼켜야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저거 다 삼키면, 항생제 부작용으로 소화도 안되고 속 쓰리고 간에도 무리가 가고 난리가 난다.

그렇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결핵에 걸리고 저만큼의 약을 매일 육개월에서 일년넘게 먹고 결핵을 치료하게 된다. 내 경우도 그랬다.

최초 발병은 고1때였다. 난 굉장히 성장이 늦은 편이라서 중3때까지도 키가 143인가 그랬는데 고등학교 가면서 일학기 내내 상당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기억이 난다. 담임선생이 교련선생이었는데, 싸가지 없고 구속되기 싫어하는 내 성격과는 정반대라서, 내가 그렇게도 눈에 거슬렸었나 보다. 일학기 내내 거짓말 안보태고 하루에 열대이상씩 얻어 맞으면서 다닌 기억이 난다.

키도 조그만 놈이 몸도 약하면서 음식도 가려먹고 싸가지만 없더니 결국은 여름방학 끝나고 9월초에 덜컥 쓰러진거다. 지금도 기억에 나는게 학교 끝나고 몇대 또 얻어맞고 집에 가는 길에, 발바닥에 불이 붙은 듯이 화끈거리고, 집에가자마자 오한이 나는데 9월 날씨에 그렇게 추울수가 없더라. 집에 가자마자, 솜이불을 막 꺼내서 덮고 드러누워 있는데 열은 내릴 생각을 안하고, 억지로 일어나서 동네 병원에 갔더니 (그것도 소아과였다. ) 감기 몸살이라는 거다. 그러면서 한웅큼 주는 해열제만 먹고 왔는데 밤새도록 열이 안 내려간다.

결국 마포 공덕동 사거리에 있는 녹십자 병원(YH 여공사건인가? 그걸로 유명한 건물이다.)에 가서 검사를 받는데, 집에서 걸어서 십분거리인 그 병원까지 걸어가는데 도대체가 숨을 못쉬겠는 거다. 한 십미터 가다가 쉬고, 또 가다가 쉬고를 반복하면서 병원까지 가서 결핵성 늑막염 판정을 받았다. 잠복해있던 결핵이 발병하면서 그 효과로 늑막에 염증이 생기고, 결국 폐를 감싸고 있는 막에 물이 고이면서 폐를 압박하는거다. 그러니까 숨쉬기가 그렇게 고통스러웠지..

바로 입원하고, 제일 처음 취한 조치는, 일단 폐에 고인 물을 뽑는 거였다. 직경이 이미리는 되어 보이는 이따시만한 주사바늘을 엑스레이 사진 봐가면서 갈비뼈 숫자를 세어서 물이 고인 부분에다가 꽂고, 호스를 연결하니까 누런 물이 조르르 흘러 나온다. 그것도 한번에 너무 많이 뽑으면 문제가 생긴다고 나눠서 뽑겠단다. 그거 꼽으니까 막 구역질이 나고 어지럽고 하여간 나름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육백미리 정도의 물을 뽑고 나니 한결 숨쉬기가 편하고 사람이 살것 같아 졌다. 물론 아직도 열이 안내려간다. 그 때 발병한 날 부터 병원에 입원해서 이틀정도, 즉 삼일 정도를 40도에 육박하는 고열에 시달렸는데, 가뜩이나 조그만 넘이 살이 쭉 빠져버렸다. 땀을 하도 흘려서 옷을 한 수십벌 갈아 입은 것 같다.

결국 세번에 걸쳐서 육백미리씩, 1.8리터를 뽑으니 좀 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결핵치료가 시작된 것이다. 늑막의 염증은 순식간에 치료가 된다. 항생제 먹고, 직접 투입하고 하니까 별 문제없이 가라앉았다. 사실 물이 고인 양만 많지 않다면 염증만 치료하면 물은 저절로 흡수가 되고 말라서 붙는다고 한다. 난 너무 물이 많아서 위험하니까 강제로 뽑은 케이스라는 것이다.

그러고 입원 오일째 되는날 퇴원을 하는데, 의사가 불러 앉혀놓고 하는 얘기가, 넌 앞으로 공부한다는 생각 하지 말고, 음식 가려먹지 말고, 고기 많이 해달라고 그러고, 잘 놀고 잘 자고, 운동해라..

그렇지 않으면 너 죽는다!!! 

그 말이 가슴에 팍팍 와서 꽂히더라. 진짜 고열에 시달리면서 잠도 못자고 헛소리 하고 그러는 동안 머리속에 이러다가 진짜 죽는거 아닌가 모르겠다는 원초적인 공포에 시달렸던 거다. 그 어린나이에 죽음의 공포를 맛보는 기회는 쉽지 않을 거 같다. 하여간, 난 그 순간에 건강해야 겠다는 욕구로 충만해졌었다.

그 전까지 거의 채식주의자였던 내 식성도 그 순간을 기점으로 바뀌었다. 사실 퇴원하기 전날 밤에 좀 살만해졌다 하니까 큰누님하고 매형이 어디 고기집 가서 고기 구운걸 포장해서 싸왔었다. 무슨 고기를 어떻게 구운건지도 기억이 안난다. 마포 동네에는 최대포집도 유명하고 주물럭도 유명하고 유명한 고깃집이 많으니까 그중 어디서 싸왔겠지..

그거 한 삼인분 되는거 다 먹었다. 몇일동안 링겔주사만 꼽고 산 후유증이기도 했겠지만 진짜 그야말로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 다 먹어치웠다.

결핵이 소모성 질환이라서 단백질 공급이 원활해야 치료가 된다는 설명도 있다. 그거 이전에 상식적으로 잘 먹어야 병이 안걸린다는 수준의 이해만으로도 난 고기를 꺼리던 습성을 가볍게 버려버렸다. 사실은 닭이나 돼지, 소가 불쌍해서 안 먹던 건데, 내가 더 불쌍해질 판이 되니까 그런거 보이지도 않더라.

결국 퇴원하고서는 부모님이 시골로 농사지으러 내려가면서 남겨놓으신 낡은 한옥집 팔아버리고 안양에 아파트를 사서 이사까지 했다. 통학시간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주거 환경을 새롭게 하고, 냉장고 큼지막한 거 사다놓고 사시사철 고기가 안 떨어지게 해 먹여야 한다는 부모님의 의무감 섞인 결정이었다.

학교에서는 드디어 악질 교련선생의 마수에서 벗어났다. 고입 연합고사에서 한문제 틀리고 전교2등으로 입학한 넘이 고1 첫 월례고사에서 반에서 30등하는 엽기적인 행동을 보였으니 밉살스럽기도 했겠지만, 담임선생은 아쉬우면서도 애를 잡을 수는 없으니까 더이상 나에게 공부하라는 닥달을 하지 않게 된 것이다.

난 그날로 아침 산책부터 시작해서 조깅으로 (당시에 감명깊게 본 영화 “록키”에서 주인공이 고통을 참고 새벽 조깅에 나서는 모습을 보고 따라한 것이다.), 나아가서 농구, 수영 닥치는대로 운동을 시작했다. 물론 새벽마다 한웅큼씩 약을 먹는 생활도 같이 따라왔다. 아직은 위가 싱싱하고 간이 싱싱하던 시절이니까 남들 다 먹는 간장약도 안 먹어도 되고 위를 보호하기 위한 것도 필요가 없었다.

새벽 네시에 일어나서 한웅큼 항생제를 집어 삼키고 우유 오백미리 먹고 아침운동 하고 오면 새벽 다섯시, 그 때 쯤 첫차타고 학교가고, 수업 끝나면 다들 하는 야자(야간자율학습)고 뭐고 없이 바로 집으로 와서 또 나가서 운동하고, 저녁 잔뜩 먹고 또 나가서 뛰어다니고, 여덟시 아홉시면 잠드는 생활이었다.

그 생활을 하다 보니까, 이학년이 되었다. 사십키로가 채 안되던 체중이 오십키로를 넘어가게 되고, 키는 십센치가 넘게 자랐다. 가슴둘레가 진짜 어지간한 여자허리보다도 못하던 인간이 슬슬 조금씩 사람꼴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후로 고교 삼년간 키가 거의 매년 십센치찍 자라서 오늘날의 키를 갖추게 되었고, 꾸준히 운동한 결과는 대입 체력장때 오래달리기 전교 기록 보유자가 될 정도였다. 덕분에 오래달리기 못 뛰면 만점 못먹는 친구들을 위해서 하루에 오래달리기 측정을 번호갈아 붙여 가면서 세번이나 대리로 뛴 기억도 난다.

결국 결핵은 의사가 놀랄 정도로 순조롭게 치료가 되어 버렸고 난 어느새 평균이상으로 건강한 청소년이 되어 버렸다. 이학년 되어서도 “저는 병이 좀 있어서, 공부보다는 건강을 우선으로 해야 됩니다~” 라는 주장이 먹혔고, 진짜 편하게 고교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결국 고3때 대학이라는 곳을 한번 가봐야 겠다고 맘먹고, 공부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거의 교과서랑은 담을 쌓고 지냈고, 시간만 나면 이리뛰고 저리뛰고 아얘 체육학과를 가볼까 하는 생각까지 할 정도의 몸이 되었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그래도 나름대로 책을 좋아하던 버릇 때문에 한국문학이고 세계 고전이고를 안 가리고 읽어치우는 덕분에 이나마 잡식이라도 유지하는 것이다.

결국 지나고 생각해보니 나한테는 결핵이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잘해야 허약하고 선병질적인, 잘해야 공부좀 잘하는 약골이 될 수 있었던 내가 오히려 나름대로 건강하고 힘있는 인생을 살게된 것이 어쩌면 역설적으로 고교때 겪은 결핵과의 만남 때문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결핵과의 만남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나중에 사회 나가서 사업한답시고 몸을 막 굴리다가 또 한번 만나게 된다. 그 때는 결핵성 기흉이었다. 하필이면 폐의 막 부분에 결핵이 퍼져서 찢어진 거란다. 그 사이로 공기가 새서, 허파의 바깥쪽, 막의 안쪽에 공기가 들어가서 폐를 압박하는 상황이었다. 단순히 공기 빼고 약 주입해서 치료할 수 있는 간단한 병인데, 문제는 그 원인이 또 결핵발병이라는 것이었다.

두세번 기흉이 재발하고서야 그 원인을 알고, 본격적으로 수술을 해서, 폐의 헐은 부분을 잘라내고 꼬매버렸다. 무지 고통스러운 수술이었는데, 더 고통스러운 것은 그 수술 이후에 찌그러진 폐가 제 위치를 잡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폐활량 테스트였다. 찢어지도록 아픈 폐를 가지고, 숨을 빨아들여서 일정량 이상, 일정 속도 이상의 성능을 보여줘야만이 완치로 인정되는 것이고, 그래야만이 정상 폐활량을 복구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무슨 장난감 처럼 생긴 도구에 입을 대고 숨을 빨아들이는 훈련을 했다.

그리고 나선 또 다시 육개월(실제로는 좀 더 걸려서 팔개월 정도 먹었다.)간의 결핵 치료기간..

결국 결핵은 나와 평생을 같이 가는 친구가 된 모양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 다시 사업을 조절좀 하고, 인라인 마라톤에 등산, 수영, 스킨스쿠바 다이빙까지 폐활량에 도움이 되는 운동이라는 운동은 다 해봤다. 아마 다시 피우게 된 담배에 쩔은 지금에도 일반인 평균 폐활량 보다는 클거 같은데.. 살이 너무 쪄서 그것도 모르겠다.

이제는 벌써 당뇨에 고혈압을 조심해야 될 나이가 되어 버렸다. 남은 인생에서 진짜 결핵이라는 친구를 또 만나기는 싫다. 술도 좀 줄이고, 담배도 끊고, 운동량을 좀더 늘이고 해야 겠는데.. 배스 낚시만으로는 도저히 안될거고, 수영장 일년티켓이라도 끊던가 해야지 도저히 안되겠다.

말하다 보니까 또 겁이 덜컥 나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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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낚시 안한지도 (아니 못한지도) 오래 되었고, 대신 산에 다니면서 살도 꽤 빼긴 했는데, 술 담배는 여전히 못 줄이고 있다.

운동량을 좀더 늘려서 체중도 좀 더 줄이고, 근육량도 좀 늘려야 되긴 하는데.. 그게 또 막상 쉽지 않은 일이라 걱정이 되긴 한다.

 







1 thought on “결핵 이야기

  1. 살빼는건 식사조절이라지요..
    그렇다고 술마시는 즐거움을 없앨수는 없으니..
    산은 계속 다니면서.. 술은 계속 드시면서..
    안주와 식사를 지금의 반에서 3분의 2 가량 줄이시면..
    제가 볼때 한 5킬로는 빠지실껍니다..

    술은 ㅊㅈ누나처럼 매일 드시면 안되고 1주일에 두번 정도가 적당하겠죠??? ㅎㅎ (러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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