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프레카리아트인가?

 

통계청에서 발간한 작년 12월 연간 고용 동향에 관한 자료중에서 한 페이지를 잘라왔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디에 속하는가?

일단 15세 이상 인구 4,127만명에는 모두 속하실 거다. ( 아, 해외에서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분들은 거기에도 안 속하시겠구나. )

그렇다면 당신은 그 아래칸에 있는 “경제활동인구”에는 속하시는가?

소득이 있는 노동에 종사해서, 최근 일주일 이내에 한시간이라도 유급 노동을 한 적이 있다면 “경제활동인구” 밑에 있는 취업자 2,412만5천명에 속하게 된다. 단 한시간이라도 말이다. 지난 주말에 친구 대신 대타로 편의점 알바 네시간 뛰고 이만원 정도 받았다면, 당신은 취업자다. 축하한다.

그러면, 지난 일주일간 단 한시간도 유급노동을 못했으면 실업자인가? 그것도 아니다.

최소한 지난 4주, 즉 한달이내에 단 한번이라도 “구직활동”을 했어야 실업자가 된다. 실업자도 아무나 못되는 고귀한 존재다.

당신이 지금 취업을 위해 토익 학원이라도 나가고 있으면, 당신은 “비경제활동인구”로 빠지게 된다. 구해도 구해도 직업을 못 구하고 자소서를 몇백장을 쓰다가 지쳐서 한 두어달 쉬고 있다면 당신은 비경제활동인구다. 당신이 아부지께서 하시는 식당에서 무급으로 접시를 닦거나 치킨 배달을 하고 있다면 당신은 비경제활동인구다.

우리나라 공식 실업율 3%의 비밀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거다.

경제활동인구중에 실업자의 비율로 실업율을 따진다는 논리적 구조를 이용해서, 어지간한 사람들을 몽땅 비경제활동 인구로 빼 버리는 수작을 통해 실업율을 낮추고 있는 거다.

물론 이 실업율을 조사하는 방식은 국제기준을 명목상으로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실업율 조사로는 우리 사회의 젊은 세대가 느끼는 체감 실업율을 확인할 방법은 없다.

우리 사회의 실업율, 특히 젊은 세대가 피부로 느끼고 있는 체감 실업율은 50%를 훌쩍 넘는다. 새로 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할 나이가 된 청년들 중에 반수 이상이 일자리를 찾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 상황은 매우 심각한 것이다.

—————————–

유급 노동, 즉 일자리를 구해서 일을 할 의지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취업을 할 수 있는 상태, 즉 개인적인 문제로 인해 일을 할 수 없는 상태가 아닌 사람을 제외하고 누구나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상태를 “완전고용” 상태라고 한다. 물론 완전고용 상태에 있는 사회라도 실업자는 존재한다. 일자리를 바꾸기 위해 임시로 실업 상태에 놓인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 사회가 이런 완전고용 상태에 있었다면 문제는 한결 쉬워진다. 실제로 이삼십년 전의 대한민국 사회는 거의 완전고용 상태에 가까왔었다. 어지간한 대기업들이 매년 대졸자 신규 사원을 수천명씩 선발하고, 중소기업들도 덩달아 엄청난 규모의 신규채용을 하던 시절 말이다.

그런 사회라면 우리가 걱정할 문제는 과연 그 많은 일자리들이 노동자에게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고 있는가, 최저임금은 얼마로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고민하고, 그런 노동소득에 세금을 얼마나 물려서 그 세금으로 뭘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면 된다.

당연히 그 세금에는 개인적으로 일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생존을 돕기 위해 사회가 지출해야 하는 복지비용이 포함되면 된다. 또 일을 하다가 갑자기 사고가 생겨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 대비한 보험제도가 있어야 한다. 고용보험 같은 사회보험들 말이다.

이런 사회라면 “사회민주주의”가 가장 정확한 해결책이 된다.

완전고용상태 하에서 고용되어 일하는 수많은 유급노동자들이 자기 소득중의 상당한 비율을 세금으로 납부를 하고, 그 세금을 통해 의료, 교육, 등의 서비스를 사회가 제공하면 된다. 거기에 아주 작은 비율로 존재하는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사회보험적 성격을 띤 복지가 존재하면 된다. 이러면 만사 오케이.

바로 이런 형태의 “지속 가능한 복지사회” 모델을 만들어 낸 것이 북구의 스웨덴 같은 복지사회들이라고 할 수 있다는 거다.

그러나…

상황은 이보다 훨씬 더 나빠졌다.

—————————————

우리도 그렇고, 스웨덴도 그렇다. 아니 전세계가 그렇게 되어 버렸다.

어쩌면 상식이었을지도 모르는 “완전고용”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아니 오히려 완전고용 상태는 초고속으로 경제규모가 성장하던 자본주의의 “고속성장기”에나 일시적으로 가능했던 특이한 상태이며, 실업율이 치솟고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현재 상황이 보다 더 일반적인 상태였는지도 모른다.

우리도 거의 완전한 고용 상태를 팔구십년대에 겪어 봤다. 그 당시에는 우리도 조금만 더 경제를 발전시키면 복지사회를 구현할 수 있을 것으로 봤고, 수많은 진보 운동가들은 사회민주주의, 즉 사민주의를 그 대안으로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혀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가 없는 국제적인 경제위기, 금융위기등이 휩쓸고 지나간 다음, 우리의 현실은 겨우 사민주의 정도로는 해소할 수 없는 거대한 벽이 생겨나고 만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용이 되어 열심히 일을 하고, 그 노동소득에서 절반에 가까운 세금을 부담하고, 그 세금으로 다시 모든 사람들에게 교육,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뭐 이런 시스템을 기대했는데, 고용 자체가 안되어 버리니 말짱 도루묵이 된 것이다.

세금을 내고 싶어도 일자리를 못 구하는데 어떻게 세금을 낼 수 있단 말인가.

이 일자리 문제, 자본주의 구조에서 소득을 발생시키는 중요한 통로인 일자리가 감소하면서 이 모든 설계는 무너져 버리고 만 것이다.

이 상황은 무척이나 심각하다. 얼마나 심각하냐면, 거의 모든 정치세력들이 일자리 공급 문제를 제1순위 공약으로 내걸 만큼 심각한 문제다. 일자리를 늘리겠습니다~ 일자리를 만들어 내겠습니다~ 일자리를 만들어서 꿈을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일자리, 일자리, 일자리..

그러나 일자리를 우리의 의지로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것이 에러다.

——————————–

일자리라는 것은 결국 뭔가를 만들어 내는 자리라는 것이다. 일을 함으로써 가치를 생산하고, 그 가치중의 일부를 임금으로 받는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생산한 가치가 팔릴 수 있는 시장이 존재해야 한다는 점이다. 뭔가를 팔 곳이 있어야 물건을 만들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시장은 우리의 의지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우리나라 같이 수출 의존적인 경제구조를 가진 경우에는 해외 시장이 늘어야 우리 사회의 일자리가 증가하게 된다. 그런데 해외 시장을 어떻게 우리 맘대로 만들어 낸단 말인가? 미국이고 중국이고 모든 외국들이 경제위기로 인해 소비가 감소하고 있는 마당이다.

물론 이 경제위기가 자본주의의 결함으로 인해 발생한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고, 일시적인 위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국제 경제위기가 일시적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일자리 문제에는 보다 더 근본적인 위기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바로 기술의 발달로 인한 노동력의 필요성 감소. 수만명의 사람들이 컨베이어 벨트에 매달려 하던 작업을 이제는 수천만원, 수억짜리 로봇이 대신하고 있다. 제아무리 강경한 노조가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하더라도 기술의 발전은 일자리의 원천적인 갯수를 줄이고 있다. 도로를 내기 위해 수천명의 사람들이 삽을 들고 달려들던 시대는 예전에 끝나 버렸다. 초대형 굴삭기와 첨단 장비들이 동원되어 수천명의 삽보다 더 빠르게 일을 해치우고 있다.

일자리는 감소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현대 기술문명 사회의 패러다임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일자리를 만들어 낸단 말인가? 공공근로 같이 의미없는 일을 시키고 푼돈을 나눠주는 사업이라도 계속해야 하는 것인가?

이렇게 일자리가 감소하기 시작하면 사태는 더욱 더 빠르게 악화된다. 일자리가 줄어들고 취업을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면 사람의 값이 떨어진다. 동일한 일을 시키면서 예전에 줬던 만큼의 임금을 주지 않아도 그 일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몰려온다. 이런 악순환이 시작되면 똑같은 일을 하는 일자리도 그 품질이 급격하게 떨어지게 된다.

그 결과로 생기는 현상이 바로 비정규직화, 알바들의 고용인 것이다. 이제는 예전같이 큰 실수만 하지 않으면 장기적인 고용이 보장되는 귀족 정규직은 그야말로 천연기념물 만큼이나 희귀해지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언제든지 해고될 수 있고, 같은 일을 하면서도 임금은 훨씬 적게 받는 비정규직이 대세가 되어 버렸고, 그마나 비정규직도 못되는 시간제 알바 같은 일자리들만 남게 된다.

그래서 나온 말이 바로 “프레카리아트” 이다. 이 말은 ‘불안정하다.’(precario)라는 말과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를 합친 신조어이다. 불안정노동자 정도로 번역될 수 있겠다. 앞서 얘기한 대로 사회의 경제구조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고용이 극도로 불안정한 노동자층이 전 세계적으로 급격히 불어나며 생겨난 말이다. 생산수단인 자본을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라는 의미의 프롤레타리아보다도 못한 계층인 것이다.

당신은 프레카리아트 인가?

만약 당신이 스스로 곰곰히 생각해 본 결과 당신이 프레카리아트라면 당신이 직면하고 있는 미래는 무척이나 어둡다. 당신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프레카리아트가 되어 버렸는가?

———————————–

생각해보자.

90%가 통과하는 시험을 봤는데, 내가 통과를 못했다. 그러면 나는 뭔가 문제가 있는 10%인 것이다. 지적, 육체적 결함이 있거나, 아니면 보통 이상으로 나태했거나, 아니면 뭔가 다른 것에 빠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50%가 통과하는 시험을 봤는데 떨어졌다면 당신의 책임은 훨씬 더 감소하게 된다. 왜냐면 어차피 50%는 떨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남들보다 더 부지런하게 준비를 했다 하더라도, 뭔가 당신의 의지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 작용하면서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10%가 통과하는 시험에서 당신이 떨어졌다면 당신은 지극히 정상인 것이다. 무죄다. 오히려 통과한 10%가 비정상인 것이다.

이제 막 사회에 진출한 청년들이 일자리를 얻게 되는 확률이 50% 이하로 떨어진지는 오래다. 그러나 그 50%의 확률로 얻은 일자리중 80%가 불안정한 일자리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우리 사회에서 새롭게 사회로 진출하는 청년들의 90%는 프레카리아트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프레카리아트가 되는 것이 정상이다.

나머지 10%는 부모를 잘 만났거나, 천부적인 재능이 있거나, 보통 사람을 할 수 없는 노력을 했거나 하는 경우가 된다. 내가 프레카리아트가 되었다고 해서 낙오했다고 좌절한다거나, 자격지심을 갖는 다거나, 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당신 잘못이 아니다.

이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일 뿐이다. 이 사회를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앞선 세대가 죽일놈들인 것이다. 절대 당신들 잘못이 아니다.

————————————

팔구십년대는 노동운동의 전성기였다. 그들은 프레카리아트가 아니고 프롤레타리아 들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은 귀족노조가 되어 버렸다. 그들은 자신들이 잡고 있는 귀족 정규직 일자리를 놓칠 수 없는 노동 기득권층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들은 같은 회사에 소속된 사람들끼리만 연대하면 노동운동을 할 수 있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싸울 수가 있었다. 그 흔적이 오늘날의 민주노총이나 각급 노조들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프레카리아트에게는 연대할 동료조차 없다. 내가 알바뛰러 나가는 편의점에는 동료가 둘 밖에 없지만, 그나마도 교대하기 때문에 얼굴을 마주볼 시간이 십분도 안되는 상황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프레카리아트들은 새로운 방식의 연대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과거의 노동연대와는 다른, 개방적이고 글로벌한 연대가 필요하다. 과거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보호받기 위해 사측하고만 싸우면 됐었지만, 오늘날의 프레카리아트에게는 심지어 사측도 없다.

어째야 할 것인가.

남은 길은 이것 뿐이다.

먼저 스스로가 프레카리아트라는 자각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 사회의 대다수가 프레카리아트가 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내가 지금 고립되어 있듯이 그들 역시도 모두 고립되어 있고, 내가 지금 불안하고 초조하듯이 그들 역시 불안하고 초조하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열린 연대의 길에 나서야 한다. 기존의 노조들이 소속이 같은 노동자들과 연대하여 사측과 싸우면서, 자신들의 경계 밖의 사람들은 배척하던 형태를 답습하지 말고, 이 사회의 모든 프레카리아트들과 함께 열린 연대에 나서야 한다. 그들이 바로 당신이며, 당신이 바로 그들 중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그 연대를 구성하고 이 사회가 구현해야 할 새로운 대안을 찾고, 그 대안을 이룩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 이것이 유일한 길이며 가능한 길이다. 그 대안으로 가능한 것들 중 하나가 바로 “기본소득”이 된다.

다시 말하지만 프레카리아트인 당신, 당신은 절대 혼자가 아니다. 새롭게 사회에 진출하는 청년계층의 90%가 프레카리아트가 되어 가고 있다. 한 사회의 90%를 차지하는 계층이라면, 당신들은 이미 이 사회의 주인인 것이다. 좌절하지 말고 자신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당신이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다니까!!

 

이 사회는 당신들의 손에 달려있다. 

 

 

 

 

=========================================

@murutukus 팔로우하기
Tweet to @murutukus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