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권파를 위한 진혼곡

 

진보가 죽었다고?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사회가 존재하는 한, 진보는 죽을 권리가 없다. 다만 진보그룹의 작은 부분집합 당권파는 죽었다.

그래서 “당권파를 위한 진혼곡”이다.

 

=============================

 

통합진보당(이하, 통진당으로 칭한다. 진보당이라는 이름은 또다른 세력에게 선점당했다.)을 장악하고 있던 소위 당권파들이 스스로 선택한 죽음에 이르는 길로 가고 있다.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는 당내에서 정당한 절차에 의해 벌어지는 두번째 최고 의결기구(최상위 최고 의결기구는 당연히 전당대회다.)인 중앙위원회, 500명이 넘는 중앙위원들이 모여 당의 안건을 처리하는 공식 의결기구이자 회의를 물리력으로 저지한다는 발상 자체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다.

그것도 단순히 구호를 외치며, 장시간 중언부언 발언을 하는 필리버스터를 벌이며 진행을 저지하기만 할 줄 알았다. 그러나 단상을 점거하기까지 했다. 자신들을 대표하는 당의 최고 의결기구의 가동을 막기 위해 자신들이 뽑은 당의 공동대표들이 회의를 주관하는 단상을 물리력으로 점거한다. 그것만 해도 이들의 행동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어진 것이다.

거기에 더해, 자신들을 대표하는 공동대표단에게 폭행을 가했다. 안경이 날아가고 옷이 찢어지는 와중에도 심상정 공동대표를 보호하고 있던 유시민 공동대표의 모습은 지켜보던 수많은 사람들을 분노케 하기에 충분했다. 저들은 지금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인가?

 

<폭행의 현장 : 출처 오마이뉴스>

 

어떤 방법으로도, 어떤 변설로도 이런 행동을 정당화 할 방법은 없다.

통진당 내부의 당권파, 그들에게 최소한도의 현실에 대한 “감”만 살아 있었다면, 그들은 이렇게 신속하게, 또 처절하게 죽음에 이르는 길로 접어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조차도 그들이 이렇게 신속한 자폭의 테크트리를 타게 될 것이라고는 감히 예측조차 하지 못했다. 적절한 선에서 타협안을 제시할 것이라고 봤다. 자신들이 독점하던 당의 의사결정권을 적절한 선에서 비당권파 연합에게 양보하고, 합의 가능한 테두리 안에 머물 것으로 예측을 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간 그 어느 진보그룹보다도 유연하게 현실과 타협하고 자파의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명분을 놓치지 않고, 사회 각 분야의 운동가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생존해왔고, 생존해 온 것 뿐 아니라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장시켜왔던 잘나가던 운동가 그룹이 이런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된 이유가 뭘까?

————————–

NL계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특히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그룹이 급속히 늘어나던 시점 이후의 역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범위내에 들어와 있다.

그들의 시작은 대략 86년 김영환의 구국학생연맹으로 봐서 크게 틀리지 않는다. 강철서신을 퍼트린 장본인이며, 대남 라디오 방송 “구국의 소리”를 듣던 시대의 상징이었기도 하다. 그러던 김영환은 결국 91년도에 남파공작원과의 접촉을 통해 북한을 방문하게 되고, 북을 다녀온 이후 민혁당(민족민주혁명당)을 만들게 되지만, 97년도에 이 조직을 스스로 해산시켜 버린다. 본인의 진술에 따르면, 실제로 북한에 가보니 주체사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걸 꼭 가봐야만 아나..

어찌되었거나 김영환과 민혁당 사건이 중요한 것은 그 와중에 생겨난 일종의 문화적 전통이 아직도 살아남아 있기 때문이다.

바로 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 상명하복의 위계질서, 조직이 결정하면 우리는 한다는 묻지마 충성, 회의하지 않는 반지성적 행동력,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런 것들이 거기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런 문화적 특성들은 다름 아닌 군부독재가 우리 사회에 심어 놓은 못된 전통에서 옮아온 것들이다.

당시의 살벌하던 군부독재와 투쟁하는 과정에서 저런 부작용이 발생한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괴물과 싸우기 위해 괴물이 되었다는 얘기가 추상적인 얘기가 결코 아닌 실제 벌어진 일들이었다는 점은 너무 많이 얘기해서 지겨울 정도다.

심지어 김영환이 전향을 하는 순간, 그를 따르던 수많은 조직원들이 동반 전향을 해 버렸다는 웃지못할 사건이 바로 그들 사이에 어떤 문화가 공유되고 있었는가를 웅변해 주기도 한다. 어이가 가출할만한 일이다. 동반 전향이라니..

이런 웃기는 문화가 어떻게 현재의 당권파들에게 이어져 내려온 걸까?

바로 김영환이 민혁당을 해체시키긴 하지만, 그 조직 내부에 해체 결정에 반발하고 조직을 유지하려던 세력이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김영환과 함께 조직을 이끌던 하영옥이 그 대표인데, 경기남부나 영남위원회의 지지를 받던 입장이었다. 또 하나의 연결고리는 바로 이 경기남부 조직에 현재 통진당 비례대표 후보로 당선된 이석기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석기 또한 민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고, 참여정부에 들어와서야 특별사면으로 풀려나게 된 장본인이다.

그들의 문화는 이런 식으로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당시 민혁당 사건은 국정원에 의해 아주 훌륭한 존재감 과시용 소재로 사용되었었다는 점이다. 지금도 몇몇 주류 언론은 이 민혁당 사건을 재현하고 싶어하는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즉, 통진당 내부의 선거부정 사건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손을 대면서, 통진당 내부의 당권파라는 외피 밑에 “민혁당 재건을 위해 노력하는 용공세력”이 존재한다는 식의 그림을 그려낼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당연히 활동을 멈춘 하영옥이나, 현재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이석기가 그 핵심으로 묘사될 것이다. 북한과의 접촉, 혹은 지령접수등의 찬조출연도 있을 것이다. 

이런 공안권력의 본질은 단순하다. 주체사상이라는 철지난 종교 놀이를 하는 일부세력과 “공생관계”인 것이다. 때맞춰 소재를 제공하고, 소재에 맞춰 한건 실적을 올리고, 공안정국을 조성해서 주류의 집권을 돕고, 당하는 쪽은 탄압 코스프레를 하면서 우리가 이렇게 탄압받고 있는데 너희들은 우리를 안 돕고 뭐하느냐는 식의 존재감 과시로 이어진다.

지금도 이미 통진당 내 당권파의 비민주적 전횡을 고발하는 사람들에게, 조중동과 연합해서 색깔론을 떠들고 있다는 비난을 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판이다.  이런 색깔론 시비는 저쪽에서만 쓰이는 게 아니라, 반어법적으로 이쪽에서도 쓰인다는 점을 기억하자. 이런 악순환을 막기 위해서라도 국보법 따위는 진작에 없어졌어야 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조만간 “알고보니 이석기 간첩론”이 등장하더라도 너무 놀라지들 마시라. 장사 한 두번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이어져 내려온 문화가 바로 오늘날 통진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화의 충돌”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당헌에 의해, 대표단 회의에 의해 설치된 공식 조사위원회라 해도, 그 조사결과 보고서가 자신들의 이익에 침해된다면 적으로 규정된다. 적으로 규정되면 타도의 대상이고, 타도하기 위한 방법은 가릴 필요가 없다. 단상에 올라가 후려 패버려도 정당해진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시국의 엄중함을 모르는 철부지의 투정에 불과한 것이 되고 자신들은 숭고한 목적을 위해 싸우는 투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머리속에 이런 도식이 그려지는 순간 눈에서는 레이져가 나오게 되고, “충전하라~ 불법 티머니!(중단하라, 불법 중앙위)” 구호를 자연스럽게 외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황당한 한 무리의 사람들 앞에서, 끝까지 단 한마디도 진행을 방해하는 자들을 내쫓으라는 요구를 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다가 봉변까지 당한 심상정, 유시민, 조준호 등 대표단과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박수로 대표단을 옹호하던 수많은 통진당 중앙위원님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힘들더라도, 끝까지 민주적 절차를 지켜 주시라. 당신들이 희망이다.

—————————–

“이기적인 유전자” 라는 걸출한 저서를 쓴 리처드 도킨스는 생물학적 유전자와 비슷한 문화적인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가설을 제기한 적이 있다.

이른바 “밈(meme)” 이라는 것인데, 화학적으로 존재하는 뉴클레오티드등의 실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간 사이에 모방과 학습을 통해 전달될 수 있는 문화적이면서 개념적인 존재가 된다.

당권파 혹은 주사파, 아니 그 이전의 NL, 그 이전의 반독재 투쟁을 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싸우던 대상, 즉 군부독재 세력들이 만들어낸 밈에 감염되어 버린 것이다. 수직적 구조, 조건없는 충성, 잘못된 수단을 정당화 하는 강렬한 목적의식 등이 바로 그 밈이다. 그 밈은 감염된 사람들의 행동을 지배한다.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한 운동을 하는 것은 좋다. 그 운동을 위한 조직을 건설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그 조직이 건설되는 순간, 상부에서 내려온 명령에 회의하지 않고 충성하는 것은 비민주적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기에 옳지 않은 일이라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정상적이다. 그리고 그게 민주주의의 시작이다.

하지만, 잘못된 밈은 숙주에게 회의하지 말고 충성할 것을 요구한다. 이 밈을 떨쳐내지 못한 사람들은, 그 밈을 본질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아니면 아직 그 밈이 전파되지 않은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기이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하게 된다.

중앙위원회 회의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그 몇안되는 당권파 중앙위원들과 눈에서 레이져를 쏴가며 아우성 치던 젊은이들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던 사람은 몇 안될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밈 조차도 진화의 원리, 자연선택을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시대가 바뀌면 밈도 변해야 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밈은 도태되어야 하며,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밈으로 대치되어야 한다. 이게 자연계의 원리이자 오늘날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근본 기전이다.

애석한 것은 어떤 밈이 자연선택에 의해 도태될 때, 그 밈에 감염된 숙주들도 역시 함께 순장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점이 나로 하여금 무려 “진혼곡”을 쓰게 만든 핵심적인 이유가 된다.

처음부터 나는 당권파의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면서도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된다고 주장을 해왔다. 그러나, 그들의 엄청나게 기이한 자살행동을 보면서 분노해버린 사람들의 귀에 그런 미약한 주변 얘기는 들릴 리가 없다.

그들의 머리속을 장악한 밈이 도태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현 시대는 그런 문화적 요소, 행동단위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정상적인 구성원치고, 작금의 당권파의 횡포를 보고 분노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자신들의 공동대표를 폭행하는 무리에게 주어질 자비는 없다.  그들은 이미 정치적으로 사망해버린 한 무데기의 시체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행동과 그들의 존재를 구분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요구가 된다. 겨우 말장난으로 들릴 뿐이다.

–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전통적인 격언)

– 죄가 무슨 죄가 있어, 죄를 짓는 사람새끼가 나쁜 놈이지. (넘버쓰리의 마동팔 검사)

당신은 어느 쪽인가?

——————————-

해방이후의 한국사는 모순으로 점철되어 있다. 아니 일제 강점으로부터 시작된 모순이 더 크다. 그 모순은 타의에 의한 분단, 민족끼리 벌인 강대국의 대리전으로 극대화 되어 버렸다. 거기에 이어지는 장기간에 걸친 군부독재로 인해 어찌 해결해 볼 도리도 없을 정도로 모순은 중첩되어 왔다.

이러한 모순들은 누적되어 가공할 만한 “밈”을 양산해 버렸다.

그리고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열정만을 가지고 덤벼든 사람들 중의 다수가 그 몹쓸 “밈”에 의해 감염되어 버렸다.

이제 시대가 변하고 사회가 발전하며 정치가 발전하게 되면서 그렇게 생성된 밈들이 자연선택에 의해 도태되는 시점이 도래했다. 자연선택은 시간의 힘과 합쳐지면서 아무도 저항할 수 없는 준엄한 역사적 흐름이 된다. 역설적이지만 밝고 희망적인 발전을 기대할 만한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 잘못된 밈에 감염되긴 했지만 진보의 역사에 있어서 한 축을 담당해온 세력들이 그 추한 밈의 숙주로 함께 순장될 지경에 와 버렸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과연 지나친 온정주의일까? 불우했던 어린시절을 이유로 살인범의 형량을 감해달라고 호소하는 온정적인 국선 변호인의 무의미한 변호가 될 것인가?

어쩔 수 없이 함께 순장될 그 무리들에게 진혼곡을 불러줄만한 여유도 우리에게는 없는 것일까?

한발자국만 더 나아가서, 그들이 스스로에게 감염된 밈의 존재를 깨닫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밈으로 대치해 버릴, 전문용어로 “개과천선” 할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일까?

비록 이 모든 것이 헛된 기대일지라도, 증오하지는 말자.

증오는 언제나 증오의 대상보다 증오심을 가지는 주체를 더 해치는 무서운 감정이다. 그러니 증오만은 거두도록 하자.

——————————–

아쉽지만 역사는 돌이킬 수는 없다.

이미 간 사람들은 간 것이고, 살 사람들은 치열하게 살아가야 한다.

간 사람들이 애석하다면, 진혼곡을 불러주자. 만주벌판에 뿌려진 의병장 송수익을 애도하며 명창 옥비가 불러주던 진혼곡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애도를 해 주고 싶다.

 

그리고 우리 모두, 우리 스스로는 어떤 밈에 감염되어 있는지 따져보는 건 어떨까? 가급적이면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밈을 달고 다니는 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밈의 이름은 “민주주의”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 보면서 진혼곡을 마친다.

부디 모두들 극락왕생 하시라.

 

 

 

 

 







3 thoughts on “당권파를 위한 진혼곡

  1. 물뚝님.. 당권파에 대한 내재적 접근법 잘봤습니다. 특히 밈 개념으로 설명하신 부분 적극 동감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동의못할 부분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민주주의라는 밈에 감염된다 한들 이들조차 민주주의로 감싸안아야 한다 생각지 않습니다. 전후민주주의 개념은 수정되어 이른바 방어적 민주주의가 도입된 바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적조차도 민주주의로 보호할 것인가에 대한 이런 담론들도 곁들여 주셨다면 어땠을까 싶네요

    1. 비슷한 모순들이 많이 있긴 하죠. 홍세화선생이 널리 퍼트린 똘레랑스의 개념에서도 엥똘레랑스에 대해서는 똘레랑스를 적용하지 않는다, 뭐 이런 얘기들이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적들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해야 하는 게 맞습니다. 당권파들이 그 동안 보여준 행동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행동들이 맞습니다. 의사결정 구조를 왜곡시킨다거나 하는 거 말입니다. 그런 행동들은 단호하게 제지되어야 하고, 거부한다면 당 밖으로 쫓아 내는 것 조차도 고려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주사파라는 사상, 차마 사상이라고 분류하기도 힘든 유치한 사상을 가졌다고 해서 그들이 쫓겨 나야 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죠. 저는 주체사상은 더 이상 민주주의의 적이 못된다고 보고 있는 것 뿐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좀더 포괄적인 얘기를 해 보고 싶기도 하군요.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