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륙을 준비하는 부산 갈매기, 김영춘을 만나다

2012. 4. 3. 화요일
물뚝심송

정치인들은 무엇을 먹고 사는가?

거창한 이상이나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 사람들의 지지와 애정어린 성원? 사실 다 소용없다. 정치를 취미로 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정치인은 공직선거에 출마해 당선이 되어야 먹고 산다. 물론 수많은 당원을 가지고 있는 공당의 당직자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정치인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정당업무를 담당하는 실무자의 성격이 강하다.

결국 당선되지 못한 정치인은 존재가치가 없다. 인정받지 못한다. 물론 한두 번의 낙선은 미래를 위한 투자일 수도 있고 흔히 말하는 병가지상사일 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당선이 되어야 한다. 그게 정치인이다.

그런데, 도저히 당선되리라고 보기 힘든 선거에 출마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공직선거에도 당선 가능한 사람만 출마하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누가봐도 낙선이 뻔한 사람들이 후보자 중에 끼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왜 거기에 끼어 있을까?

실제로 그들 중에는 출마에 중독되어 주변의 모두가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뿌리치고 출마를 해야만 하는 출마 중독자들도 있다. 평생에 걸쳐 이룩한 재산을 모두 날리면서까지 계속 낙선을 거듭하는 사람을 본 적도 있다. 이건 병이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어떤 정치적인 가치를 위해 출마를 거듭한다기보다는 당선되었을 때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력과 명예를 더 애타게 바라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 중에도 뭔가 우리가 봤을 때 이해하기 힘든 이유로 출마를 감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 그런 사람들을 만나 보고, 그들의 이유를 파헤쳐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강남을에 출마한 정동영을 만났고, 두 번째로 부산에 출마한 통합민주당 김영춘을 만났다.


김영춘은 어떤 사람일까?

 

두 가지 이름이 떠오른다. 삼촌들 세대는 다 기억하는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있어도 고뿌 없이는 못마심다~ 가갈갈갈” 하면서 사람들을 웃게 해 주던 돌아가신 코미디언 서영춘씨, 그리고 아직 안 돌아가신 정치인 김빙삼, 아니 김영삼 전 대통령.

(아.. 서영춘씨 개그는 괜히 친 거 같다. 너무 꼰대스러워~~)

 

이 사람도 김영춘(사진 = MBC캡처)

정치인 김영춘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이름만 비슷할 뿐 아니라 실제로도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이다.

– 1961년 부산 초량 출생

– 1981년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수석으로 영문학과 입학

– 고려대 총학생회장 출신

– 청와대 정무비서관 역임(김영삼 정부 시절)

그리고 16대, 17대 두 번에 걸쳐 서울 광진구에서 지역구 의원으로 활동을 했다. 이 정도 이력이면 중진급 국회의원이며, 상당한 정치적 비중을 갖추고 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정치인 김영춘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시선이 따라 붙어 있다. 정치인 입장에서는 참 듣기 거북한 “철새”라는 시선이 바로 그것이다.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에서 정치를 시작하고, 3당합당의 결과로 신한국당으로 옮겼다가, 한나라당 소속이 되기도 했고, 거기서 탈당해서 열린우리당으로 옮기는 독수리오형제 중의 일원이기도 했다. 그리고는 오늘날 다시 민주통합당으로, 심지어 그 사이에는 창조한국당의 문국현 편에 서기도 했었다. 이 정도면 원했든 원치 않았든 철새라는 소리를 듣게 마련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지역구인 서울 광진을 버리고, 부산으로 내려가 부산진 갑의 지역구에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예비후보를 거쳐 정식으로 출마를 해 버렸다.

왜 그랬을까? 비록 참여정부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고 18대 국회에는 아예 불출마를 선언하고 정계를 떠나기까지 했던 이력이지만, 이번 총선 같은 분위기에서 김영춘 정도의 비중이라면 서울 광진의 지역구를 다시 돌려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게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길일 텐데 말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걸 물어보러 갔다.

인터뷰 하는 날은 바로 “나는 꼼수다” 부산 콘서트가 있던 날이라 콘서트 현장에서 각종 물품을 판매하는 자봉팀과 함께 내려가게 되었고, 사진기자로는 정치인 이용, 아니 아외로워 기자가 동행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이었다.

지역구 출마자는 무척이나 바쁘다. 특히나 선거를 코 앞에 둔 시점에는 정말로 시간을 빼앗기가 미안해진다. 그래서 이런 저런 인사말은 최대한으로 줄이고, 본론으로 바로 들어갔다.

(이하 물뚝심송=딴, 김영춘=김)


운동권 학생 김영춘

딴 : 저희가 인터뷰를 할 때 다른 언론하고 다르게 가급적이면 격식을 배제하고 실제 얘기를 듣고자 하기에 질문도 약간은 격이 없이 하는 면이 있으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임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김 : 그렇다고 들어서 저도 편하고 즐겁게 한 번 선거 이야기를 해보려는 마음으로 왔습니다.

이야기는 진짜로 아주 편하고 즐겁게 진행되었다.

딴 : 과거로 돌아가서 81년도에 고대 영문과에 들어가신 거죠? 본인이 스스로 생각하시기에, 그 이전에는 어떤 학생이었습니까?

김 : 아주 내성적이고, 나서기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나서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런 문학 소년이었죠.

딴 : 문학을 좋아하셨군요.

김 : 고등학교 때부터 월요문학회라고 동고 안에 있는 유명한 문학동아리가 하나 있었어요. 그 문학동아리에서 3년 내내 시 쓰고, 우리끼리 개똥철학을 논하고, 그걸 살아가는 큰 낙으로 여기면서 고등학교 시절을 이겨낸 추억이 있습니다.

딴: 그 때 쓰신 작품 중에 지금도 갖고 계시거나, 외우고 있는 시가 혹시 있습니까?

김 : 잘 못 외워요.

딴 : 그러시군요. (웃음) 그런데, 특별히 영문학과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나요?

김 : 문학을 할 수 있으니까. 부모님은 법대를 가기 원하시고 저는 국문과를 가고 싶고, 그 싸움을 한 달을 했어요. 서로 밀고 당기고 하면서.

딴 : 대학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웃음)

김 : 그때 우리 형이 중재협상을 자처해서 중재안으로 내놓은 게 영문과였어요.

딴 : 법도 아니고 국문도 아니고 영문으로? (웃음)

김 : 부모님들은 국문과 가면 밥을 굶는다는 거였죠. 근데 영문과는 밥은 안 굶는다.

딴 : 아 미래에 산업이 발전하면?

김 : 그 때도 이미 영문과는 취직이 잘 되는 과로 알려져 있었으니까, 부모님한테는 ‘밥은 안 굶습니다.’ 라고 이야기 하시고 저한테는 ‘문학 할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해서 영문과를 선택했는데요.

딴 : 형님이 상당히 도와주신 거네요?

김 : 근데 저는 그 뒤에 후회 많이 했습니다. 계속 국문과를 우겨서 갔어야 된다. 나중에 고대 1학년 마치고 나서 국문과로 바꾸려고 했는데, 안 된다고 하더군요. 같은 문학인데 왜 안 되는지 몰라도, 학교에서 학칙상 안된다고, 자기들은 해주고 싶은데 나중에 문교부 감사가 들어오면 문제가 된다고 해서 불허판정이 났어요. 국문과 교수들은 다 OK하고 좋아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영문과를 할 수 없이 다니는 바람에 제 대학생활이 더 힘들었죠. 국문과는 시험보기가 그래도 좀 쉬운데,

예나 지금이나 자신이 원치 않는 학과에 들어가서 고생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넘쳐난다. 수험생들은 부디 신중하게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길 권하고 싶다.

딴 : 만약에 국문과를 들어가셨으면 지금쯤 정치가 아닌 문학을 하셨을 가능성도 상당히 있겠네요.

김 : 근데 사실 그렇진 않았을 거에요. 그저 학교를 좀 더 쉽게 다녔을 것 같은데…….

딴 : (웃음) 그때는 워낙 시대가 그런 시대였으니까 쉽지 않으셨겠죠. 대학 때 연대의 송영길 의원하고 학번이 같으신 거죠? 나이는 좀 위시고?

김 : 그렇죠. 나이는 저보다 두 살이 어리죠. 그런데 호적상 나이로도 실제로 그렇더라 구요. 내가 한 해 재수를 했고, 그 친구는 한 살 빨리 들어가 버렸고, 그런데 학교에서 같이 고생하면서 학생운동하고 같은 시기에 각자의 학교에서 학생회장하면서 할 수 없이 친구가 되어서, 지금까지도 제 친구들이 피해를 많이 봅니다. 광주 출신의 제 친구들이 연배로는 송영길 의원보다 선배인데, 나하고 친구니까 할 수 없이 친구를 먹어야 되는 이런 불쌍한 놈들이 있지요.

딴 : (웃음) 생물학적 나이와 학번의 문제 때문에 흔히 벌어지는 혼란이죠.

김 : 친구의 친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끌려와서 친구가 되는 거죠.

딴 : 음주상태에서 방송을 해서 화제가 됐던 신지호의원님도 81학번이시죠?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으십니까?

김 : 친분은 없어요. 소문을 들어보니 저와 같이 같은 시기에 인천에서 비슷한 노선의 노동운동에 종사했다고 들었는데, PD계열이라고 들었어요. 보통 PD계열 중에서 아무리 엇나가도 그런 사람이 잘 없는데…….

딴 : (웃음) 방송에 술 먹고 나가면 엇나간 건가요?

김 : 아니 노선자체가 뉴라이트 쪽으로 나가는 사람이 PD계열이 잘 없거든요. 주로 NL계열에서 뉴라이트가 많이 나왔잖아요. 주도하는 멤버들도 대부분 NL계열이고, 근데 PD계열에서 뉴라이트가 나온 건 아주 이례적인 일인데 그렇게 되었더라고요.

딴 : 상당히 비슷한 노선을 가셨었는데 이상하게 개인적으로는 인연이 없었다?

김 : 그렇죠.

딴 : 송영길 의원하고 당시의 학도호국단 체제를 마감하고 총학생회를 처음 만들 때, 그때 상황이 어땠습니까?

김 : 그때 저는 고대 총학생회 전체 학생 운동권에서 4학년 여름방학부터 2학기까지 책임지는 투쟁 위원장이었습니다. 비공개 위원장이었는데, 그래서 우리 학년들을 한 조 한 조씩 조를 짜서 데모주동을 시키고 감옥을 보내는 게 내 임무였어요. (웃음)

딴 : (웃음) 순번 정해주는 일?

당시엔 이런 식이었다. 학생들은 시위를 해야만 했고, 경찰들은 일정한 숫자의 학생들을 잡아 넣어야 하는 상황에서 암묵적인 협조가 벌어지는 것이다. 실제로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과 달리, 감옥에 가는 학생들을 사전에 정해놓고 모두 입을 맞춰서 진술하고, 경찰들은 그대로 지목당한 학생들을 잡아 넣는 식이다. 이것도 낭만이라면 낭만일까..

김 : 예, 회의를 같이 하면서 순번을 정하고 중이었는데, 서울대 쪽에서 연락이 왔어요. ‘학생회를 부활시키자.’ 저도 그때는 그런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던 터라 ‘그래 해보자.’ 그랬는데, 사실은 이정우(서울대)하고 송영길(연대)하고 제가 사전에 미리 만났어요. 만나서 그 구도를 같이 짰습니다. 그렇게 준비해서 우리가 출마하고…….

딴 : 당시에는 학생회는 불법이었죠?

김 : 예, 그 학도호국단이라는 게 대통령령으로 설치되어있는 기구거든요. 학교 학칙으로 설치되어있는 기구가 아닌 희한한 존재가 하나 있던 거에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대통령령도 법령인데 법령 위반이니까, ‘불법이다.’ 라고 하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투쟁자체가 워낙 그 시절로써는 상징성과 대중적인 설득력이 큰 투쟁이니까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꼭 이건 해주고 넘기자.’ 해서 원래는 저희보다 한 해 아래인 82학번이 총학생회장을 해야 하는 것이었지만, 82학번이 아닌 81학번이 불법 학생회를 부활시키게 된 겁니다. 어차피 되자마자 바로 감옥 갈 것 같으니까요. 그렇게 정리를 하고 ‘합법화를 시켜서 넘겨주자.’ 이렇게 된 거에요. 그래서 그런 논의를 같이 했던 세 사람(이정우, 김영춘, 송영길)이 논의 끝에 같이 출마하기로 하고, 그렇게 학생회를 부활시킨 거죠.

요즘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쉬운 일은 아니다. 학교에 학도호국단이라는 준 군사조직이 있는 것도 어이없지만, 실제로 있었다. 그리고 그런 대통령령으로 설치된 조직을 무력화시켜 버리고 불법 학생회를 구성한 주도자들은 감옥에 갈 것을 각오하면서도 학생회를 합법화시키려는 노력을 한거다. 그런 노력 끝에 그나마 정상적인 총학생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뭐 제대로 되어 있던 것이 하나도 없던 시절이었다, 라는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

딴 :  그리고 나서 정식으로 구속 되신 것은 그 ‘민정당 당사 사건’이죠?

김 : 그렇죠. 세 명이 다 비슷한 시기에 구속 됐는데, 다 이유가 조금씩 다르죠. 저는 당시에 민정당사 농성사건 일체의 알리바이를 나한테 맞추기로 이미 다 이야기가 돼 있었고, 제가 총학생회장일 때 고대가 그걸 제안하고 고대 투위원장이 거기 들어가서 행동대장을 했고, 울산에서 노동운동하다가 지금은 온양 산 속에서 도 닦고 있는 친구가 저한테 오더를 받고 가는 걸로 그렇게 정리가 되어있어서 제가 그건 책임을 질 수 밖에 없었고요. 또 초기에 저랑 이정우랑 송영길이랑 논의 과정에서 민정당사 농성사건, 청와대 앞 농성투쟁, 이런 것들을 같이 제안을 하고 토론을 했어요. 그래서 제가 이 건은 책임을 지고,  이정우는 서울대 학생회에서 불법집회문제, 프락치 사건, 구타사건 등을 책임졌던 거고, 송영길은 또 다른 사건을 이유로 구속됐죠.

이 사람들은 무슨 감옥 가는 것을 계획을 세우고 서로 분담해서 돌아가면서 간다. 좀 웃긴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에는 감옥에 간다는 것이 뭐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나 보다 하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지금보다 훨씬 더 살벌한 일이었다. 단지 이 사람들이 더 용감했던 거다.

딴 : 본격적으로 정치적인 문제로 얘기를 나누기 전에 잠시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검색을 해봤더니, 트위터에서 남희석 씨하고 굉장히 친분이 있으시더라구요? 언제부터 사귀신 겁니까?

김 : 벌써 한 10년 됐나요? 10년쯤 됐네요. 그 친구가 30대 초반부터 봤나 봅니다. 제 동생이 한 10년 전에 죽었는데, 그 친구랑 친분이 깊었어요. 그러니까 그 친구 무명일 때, 제가 한 15년 전에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했을 때 제 지역에 와서 도와주고 그랬어요. 나중에 뜨고 나서 다시 만난 거죠.

딴 : 제가 트위터에 ‘김영춘 김영춘 후보님하고 인터뷰하러 간다.’ 고 하니까 어떤 분이 물어 보시더라고요. ‘자기 기억에 80년대 대학시절에 참 멋있었던 기억이 나는데, 두루마기를 입고 활동하시는 모습을 봤는데 진짜 멋있었다. 지금도 그렇게 멋있는지 그걸 확인해 달라.’ 하셨고, 남희석씨하고 트위터를 하면서도 ‘내가 당신보다 잘생겼다.’ 이런 이야기도 하시더군요. (웃음) 스스로의 외모가 상품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김 : 글쎄 저는 외모가 잘생겼다. 상품성이 있다.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다만 다른 분들이 ‘나쁜 사람 같이는 안 보인다.’ 고 하시는 면에서는 그렇게 보이는 것도, 특히 대인관계를 하는 데는 실제 제 속마음은 조금 위선적인 데도 있고, 욕망도 강하고, 욕망이 또 권력욕뿐만이 아니라, 이런저런 기초적인 욕망도 많고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저를 그렇게 안 보는 게 어떤 때는 손해가 되지만 또 어떤 때는 득도 보고 그러죠.

딴 : 외모가 결점들을 가려주고 있다?

김 : (웃음) 예

사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얘기였지만, 정치인의 입장에서는 쉽게 하기 힘든 얘기이다. 자신의 외모가 자신의 내부에 있는 좋지 않은 측면들을 가려주고 있어서 다행이다.. 스스럼없이 자신의 내부에 뭔가 좋지 않은 것들이 있다고 먼저 털어 놓는다. 좀 특이한 부분이다.

딴 : 학생운동 시절을 넘어 정치활동 하셨던 얘기로 넘어가야 하는데, 그때 당시 구속되고 풀려나신 게 어제쯤이십니까?

김 : 그 바로 직후에 우리가 민정당사 농성투쟁을 하게 되는데, 85년 2월 달에 예정되어있는 총선을 겨냥하고 그 사건을 기획을 했었거든요. 민정당에 타격을 주겠다는 정확한 목적을 갖고 한 겁니다. 단순히 농성하는 게 타격이 아니라, 총선에서 민정당 이미지를 폭로 하겠다는, 당연히 다 알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국민들은 몰랐던 것들을 폭로하려고 했던 겁니다. 그때 실제로 우리가 그때 요구했던 민주적인 요구들, 예를 들면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라, 노동삼권을 보장하라, 학원의 자율성을 보장하라, 등 아주 초보적인 민주주의적 요구들을 제기하면서 농성했던 건데, 바로 세 달 뒤에 있는 총선에서 이런 것도 안 해주는 그런 정부, 그런 정당이 어떻게 민주주의 정당이냐, 이걸 이야기하려고 그랬던 거죠. 그래서 소기의 성과를 거둔 셈이죠. 이후의 총선에서 야당이 아주 약진을 하고 민정당이 초토화 됐으니까요.

1985년 2월 13일자 조선일보

당시 85년의 2.12 총선은 신민당 돌풍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대단한 총선이었다. 졸저 <정치가 밥 먹여준다>를 보면 바로 이 총선을 지켜보면서 물뚝심송이라는 정치덕후가 탄생하는 과정이 잘 그려져 있다. 뜬금없이 책 광고를 하려니 무지 민망하다.

김 : 그러면서 당시 민정당 대표였던 권익현 씨가 민정당사에 농성하러 들어갔던 학생들을 폭도라고 부르면서 강경하게 대처하다가 그 이후에 총선이 끝나자마자 바로 사퇴를 하고 노태우 씨가 새로 대표를 맡아서 유화책을 펴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저희가 바로 풀려났어요. 그전 분위기로 우린 그때 최소한 3년형 이상이다, 아마 5년 정도를 각오하고 있었는데, 일심재판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어요.

딴 : 대단한 유화책이었군요.

85년 총선 결과에 크게 놀란 전두환 정권은 각 분야에서 상당한 유화책을 펴기 시작한다. 그 흐름에 힘입어 그 삼엄했던 시절, 정부 여당의 당사에 쳐들어가 농성을 하던 폭도(?)같은 학생들을 집행유예로 풀어주기까지 했던 거다. 이래서 총선 승리가 그렇게 중요한거다.

상도동계의 막내가 되다

딴 : 그 뒤로 본격적으로는 87년부터 활동을 하신 걸로 기록에 나오는데요. 제가 확인한 바로는 상도동계 김동영씨의 권유를 받으셨던 것 같습니다.

김 :  그 때 김동영 의원이 YS의 비서실 실장이었어요. 민정당사 농성사건 구속자들이 풀려났을 때 김영삼, 당시에는 민추협(민주화 추진 협의회)의장 이었겠네요. DJ와 YS가 같이 공동의장이었는데 밖에서 활동할 수 있는 분은 YS였으니까 김영삼 민추협 의장이 구속자들을 초청해서 감사의 뜻으로 식사를 한번 했어요. ‘당신들 때문에 우리가 이겼다.’ 이런 식으로. 그 자리에서 이야기를 같이 하고, 바로 직후에 ‘같이 한 번 일을 해보지 않겠냐.’ 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때는 전혀 그런 건 관심이 없었으니까, ‘No’ 라고 하고 전 인천으로 갔던 거였고요.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할 때에, 사실은 노동운동이라고 제대로 한 것도 아닙니다. 그냥 주변에서 공부도 같이 하고, 작은 공장 다니면서 준비도 하고, 또 큰 공장을 들어가 보려고 노력을 하다가 잘 안 되고 이러면서 서클 활동을 많이 한 거죠. 그런 과정에서 직선제 개헌운동이 일어났어요.

근데 야, 저게 우리나라 정치의 미래를 보장해 주는 건 아니지만, 민주주의를 전면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를 들면 우리가 지금 노동현장에서 애쓰고 있는 노동삼권을 보장하는 사업, 그땐 노조설립조차도 잘 안 됐으니까. 그런 노동삼권을 보장하는 일조차도 저 직선제 개헌투쟁을 성공시켜내면 전면적으로 실현이 되겠구나, 그런 일점 돌파를 통한 전면적 민주주의 확장. 그게 중요한 전선이다, 그래서 그 투쟁을 같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침 그 때 또 함께 제가 제안했던 게 사적 유물론을 수정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맑스, 레닌주의의 교리, 이런 것들을 기계적으로 따라가던 시기였으니까. 요즘엔 그렇지 않지만, 그래서 저 교리로는 안 된다, 이미 현실 사회주의 안에서 저게 실효가 별로 없는 이념이라는 게 판가름 났지 않는가, 이런 얘길 했었죠.

딴 : 그렇지만 당시로썬 굉장히 많은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겠어요. ‘변절이 아니냐.’ 이런 얘기들이요.

당시 운동권에서는 이른바 교조주의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조금이라도 사상 자체에 의심을 가지는 발언을 하거나 행동을 하는 것은 바로 변절자로 낙인찍히는 길이었고, 모두가 두려워했다.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도 두려워 하지 않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 운동권 학생 김영춘은 그런 면모를 지녔던 것이 확인된다.

하지만 이런 행동들은 또 다른 측면에서는 언제나 자신의 판단을 중심에 놓고 주변의 동료들과 화합하지 못하는 독불장군의 면모일 수도 있다. 특히나 정치인이라는 측면에서는 이런 사고방식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기 마련이다.

아마도 이런 측면이 계속 당을 바꿔가며 정치 활동을 해 온 정치인 김영춘의 과거 경력을 이해하게 되는 단초가 될 것 같기도 하다.

김 : 그렇죠, 진짜 과학적 사회주의, 현실을 개선하는 유용한 도구로서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저걸 수정해야 한다, 그런 주장 두 가지를 동시에 했더니 저는 이제 그 내부에서 수정주의자 비슷하게 낙인이 찍혔죠, 그러니까 토론을 해달라. 토론을 하고 내가 그 토론결과에 대해 승복하겠다, 했는데도 토론을 안 붙여 주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미리 ‘토론 안 붙여주면 난 탈퇴합니다. 민주주의라는 게 조직 안에서 살아있어야 하는 데 토론조차도 불허한다면 탈퇴합니다.’라고 경고했는데도 불구하고 토론을 안 붙여주는 바람에 결국 탈퇴하고 서울로 올라왔어요.

그러면서 제가 김동영 의원을 찾아갔던 거죠. 찾아가서 ‘일전에 했던 제안이 여전히 유효하냐?’하니까, ‘당연히 유효하다.’ 하더군요. ‘그럼 내가 지금부터 직선제 개헌운동을 돕겠다.’ 그래서 김영삼 총재 비서로 들어가게 된거죠.

딴 : 그러니까 바로 들어간 게 아니라,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에는 일단 그걸 보류했다가 이쪽(인천)의 활동이 여의치 않아서 그 제안을 다시 한 번 검토해서 스스로 들어가신 거 라고 봐야하는 게 맞네요.

김 : 그렇죠.

딴 : 근데 그렇다 하더라도 알려져 있기로는 YS계, 상도계의 막내, DR(김덕룡)계 뭐 이런 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류를 좋아하진 않으시죠?

김 :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아주 혐오합니다. 그런 분류는, 뭐 무슨 계보니, 뭐 누구의 부하니 하는 소리, 아니, 부하일 수는 있지요.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조폭문화 비슷한 이런 식의 계보문화, 이런 건 제가 아주 혐오를 해요. 제가 YS비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뭐 그런 의미에서 ‘상도동계’ 이렇게 분류한다 그러면 그 당시로써는 받아들였지만, 무슨 가신 이런 식의 분류는 아주 극렬하게 ‘나는 아니다. 나는 YS를 도와주러 온 동지다.’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고 그랬습니다. 마찬가지로 김덕룡계라는 표현도 저는 아주 싫죠.

계보, 조직, 이런 문화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감. 좌파적이기 보다는 자유주의적인 태도이다.

김 : 김덕룡 의원하고 저하고 아주 가깝게 지낸 선후배 사이입니다. 그분이 아주 뛰어난 점이 많아요. 예를 들면 비서실장과 비서인데, 제가 YS한테 처음 들어가서는 직접 이야기하기도 하다가 어떤 경우에는 그래도 조직이니까 실장을 통해서 이야기 해야겠다 싶어서 그 분을 통해서 이야기하면 ‘야, 너도 비서고 나도 비서인데 네가 직접 이야기하면 되지 왜 꼭 나를 거쳐서 하려고 그러냐?’ 고 한다든지, 굉장히 뛰어나고 개방적으로 민주적인 리더십이 있어요. 그리고 제가 정치인이 되고 난 뒤에 한나라당 안에서 아무리 봐도 나는 이회창 씨보다는 김덕룡 씨가 더 한나라당을 위해서 필요한 사람이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지지했던 거고, 물론 당선가능성은 이회창은 99% 김덕룡은 1%였지만 김덕룡계의 일원이라서가 아니라 이회창보다 김덕룡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지했던 거죠.

김덕룡 전의원

딴 : 개인의 인연에 따른 판단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봤을 때 우수했기 때문에 도왔을 뿐이다.

김 : 그렇지요. 한나라당을 위해서도 그게 좋다는 거였죠.

딴 : 그렇기 때문에 계보라고 부르는 것에는 동의 할 수 없다. 이런 말씀이시네요.

김 : 총재선거, 대통령 후보선거를 한 3번을 같이 치렀어요. 제가 계속 그 선거 때 다른 사람들이 ‘넌 왜 그러냐?’ 고 할 정도로 김덕룡 의원을 지지했죠. 특히 이회창 후보랑 계속 충돌하는 과정에서.

딴 : 그런 점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충분히 오해를 살만한 상황은 맞네요.

김 : 글쎄 오해인지는 몰라도, 표현 자체가 아예 틀린 개념규정을 한 거지요.

딴 : 알겠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를 하겠구요. (웃음) 현실적으로는 그게 풀기 힘든 오해를 생성 할 수 있는 그런 구도가 된 거구요. 그 부분 해명 많이 해보셨지요? 해명 하셨었는데 잘 안 먹히는 거 아닌가요?

김 : 뭐 굳이 해명할 이유도 없고, 그렇게 물어보면 ‘뭐 김덕룡계라 그러던데, 그건 아니다.’ 내가 그렇게 이야기 해줬죠.

딴 : 그걸 또 강하게 부정하다보면 그게 김덕룡 의원이나 YS한테 반대하는 뉘앙스로 들릴 수 있기 때문에 그것도 조심스러우셨을 거고,

김 : 강하게 부정하고, 그건 아니라고 분명히 얘기하는 게, 그분들도 절 잘 알기 때문에 그것 갖고 기분 나빠하진 않아요.

딴 : 알겠습니다.

이 부분은 결국 정치인 이전에 인간 김영춘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는 남들과 다른 기준, 남과 다른 자신만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게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스스로 세운 기준에 맞춰 행동을 하고, 남들의 비난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물론 자신은 자신의 기준이 훨씬 더 정확한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겠지만, 그로 인해 오해를 받고 비난을 받게 되는 것이다.

계파에 관한 부분이 바로 그런 케이스인데, 자신은 단지 김영삼이나 김덕룡이 가치가 있어서 함께하고 지지한다고 주장을 한다. 그런 행동은 남들에게는 당연히 계파에 소속되었기 때문에 하는 행동으로 간주가 되지만, 본인은 극구 부인하는 것이다. 계파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계파라는 개념을 혐오하며, 정치적 동지라는 개념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다.

이런 규정의 차이가 바로 일반적인 정치인들과 김영춘을 구분하는 결정적인 차이점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 차이가 오늘날의 정치인 김영춘의 행동을 해석하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부분으로 작용하게 된다.

딴 : 그러시다가 총재 시절의 김영삼의 비서를 하셨죠? 그리고 당선된 다음에 청와대 정무비서까지 하시게 되는 거고요. 그때는 밖에서 운동권시절 활동하던 때하고 굉장히 다른 환경일텐데 어떻게 다르던가요?

김 : 야당 총재비서를 할 때는 그래도 그 갈등이 별로 없었어요. 그래도 정치와 운동권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그 역할도 다르고 기대도 다르고 하니까, 갈등이 있긴 했었으나, 제가 워낙 젊었기도 했고. 87년 대통령 선거 같은 시기에는 제가 YS비서를 하면서도, 동교동 뒤에 있는 모 비서, 저 밖에 있는 단일화 운동본부에 있는 누구, 이렇게 모여서 어떻게 같이 단일화를 시킬 것인가, 같이 작전도 짜고 그랬었습니다.

딴 : 그때 나이가 20대 후반으로 굉장히 젊으셨을 시절인데요?

김 : 그렇죠. 작전도 같이 짜고 심지어는 밖에서 학생 운동하는 후배들을 통일민주당사에 농성조로 들어오라고 일부러 전화해서 ‘야 빨리 들어와서 농성 좀 해라.’…

딴 : 애들 불러라? (웃음)

김 : 그래서 농성도 하게 하고요, 무엇보다도 단일화는 시켜야 할 것 같으니까요. 그런 정도로 운동권과 야당 총재의 비서로써의 저하고는 심리적으로 큰 간격 차이가 없었어요.

딴 : 외적인 형식만 다를 뿐이지 내부는 거의 동일했나요?

김 : 같은 목적을 가지고 일하는 상황이니까요.

딴 : 근데 청와대를 가면서 완전히 달라지는…

김 : 그쵸. 청와대로 가니까 달라지는 거죠. 국가 운영이라는 큰 틀을 갖고서 그 속에 속한 일원으로 일을 해야 되는 입장과, 밖에 운동권이나 진보진영이 요구하는 기대와 충돌하거나 불일치하는 게 참 많죠.

딴 : 굉장히 높은 벽이 사이에 있는 거겠죠.

김 : 그래도 제가 처음 일했던 한 2년 동안에는 그렇게 크지 않았었어요. YS개혁들이 워낙 쎘잖아요. 한 2년 동안에는 하나회도 척결하고, 금융실명제 하고, 공직자 재산 공개시키고, 이러니까 처음에는 운동권이나 재야 쪽에서도 잘 한다고 그랬지, 크게 비난을 하거나 하는 건 없었는데, 그 다음부터 점점 간격이 벌어지기 시작하고…

그래도 청와대 있을 때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는데, 제가 청와대에서 나와 정치인으로 투입되고 나서는 중간에서 굉장히 힘든 상황이 계속되었죠.

딴 : 청와대를 언제 나오셨던 거였죠?

김 : 93년, 94년, 두 해를 청와대에 그러고 있다가 95년에 나왔죠. 1월 달에.

김영춘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아주 인기있던 시절에 청와대에 있었다. 지지율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고, 연이어 터지는 깜짝 개혁들이 줄을 지어 환영을 받던 시절이었다. 운동권 출신 비서관으로는 행복한 시절이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렇게 넘어가기 전에, 매우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다.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기 이전에 벌어졌던 아주 큰 사건.

바로 역사를 뒤흔든 김영삼의 3당 합당이다. 그 문제를 빼놓을 수는 없었다.

3당합당에 대한 김영춘의 자세

딴 : 시간을 약간 거슬러 올라가서 여쭈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야당 총재시절 YS의 비서를 하다가 겪으셨을 것 같은데요. 아마 요즘의 젊은 계층, 딴지 독자들이나 이런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노무현의 가치 중 손꼽히는 것 중 하나가 3당 합당을 반대했다는 가치입니다. 근데 후보님은 그때 YS밑에 있었고, 3당 합당에 동조하고 따라 갔던 걸로 보이는 거죠. 역사적으로 봐서는요.

김 : 그렇게 된 셈이죠.

딴 :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 : 아주 뼈아프게 느끼는 지점입니다. 저는 그때 사실 88년에 김영삼 총재 비서를 그만두고 학교에 제적 되어 있던 것을 복교를 해서 마치고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어요.

딴 : 대학원은 영문학이 아니라 정치외교학과 나오셨더라구요.

김 : 예, 대학원 석사과정을 다니고 있던 중에 3당 합당이 일어났죠. 그래서 김영삼 총재한테 찾아가서 얘기했습니다. 그분 논리는 그거거든, ‘나하고 김대중 씨하고 둘이서 니가 지난번에도 봤지만, 우리 둘이는 단일화 하자! 그래도 단일화 안 되고,’

딴 : 어쩔 수 없다? (웃음)

김 : ‘둘 다 안 되는 케이스로 간다, 이렇게 되면 내(김영삼)가 들어가서 저기서 승부를 해야지 정리가 된다. 그래야 이 숙명적인 대결이 정리가 되고 끝이 난다.’ 이러면서 간 건데, 저는 ‘그 말씀을 이해를 하겠습니다만 제가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앞으로 저를 찾지 마십시오’ 라고 한 겁니다. 그전에 대학원을 다니면서도 가끔씩 만났어요. 김영삼 총재가 부르시기도 하고, 제가 ‘이건 이렇게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하고 찾아가기도 하고, 그렇게 두세 달에 한 번씩은 꼭 만나 뵙고 그랬는데, 제가 그렇게 결별하자는 이야기를 하러 간거죠.

딴 : 그러면 따라가신 건 아니네요?

3당 합당에 대한 정치인 김영춘의 입장은 매우 명확하다. 이해는 하지만 따라갈 수는 없다, 라는 거다. 이해라는 것도, 당시의 김영삼이 처해 있던 정치적 환경과 그 환경으로 인해 내릴 수 밖에 없던 결정이라는 감성적 이해인 것이지, 3당 합당이 정치적으로 옳지 않은 결정이라는 점은 잘 알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결정에 대해 온 몸을 던져 거부한 사람도 있는 반면, “따라갈 수는 없다” 라는 정도의 반응만 보인 것은 정치인 김영춘의 유약함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똑같은 표현으로 난 정치인 김영춘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이해는 가지만 동의할 수는 없다는 말을 하고 싶다. 물론 당시에는 아직 스스로 정치인이라는 자각이 없었고, 학교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점은 참작하기로 하자.

김 : 그렇게 해서 한 일년 반인가 지나간 건데, 그 때 제가 대학원을 마칠 때 쯤인데, 석사 논문을 쓰고 있을 때, 한 번 보자고 연락이 왔어요.

딴 : 그때 그 석사학위는 그냥 일반적으로 돈 많은 사람들이 돈 내고 따는 가짜 말고 진짜 공부해서 따신 거죠?

이런 가짜 학위는 지금도 무수히 뿌려지고 있다.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학위 과정에 맞춰 공부하고 논문 쓰고 하는 일 없이 그냥 이런 학위를 장식품으로 몇 개씩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이런 풍습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이 사람은 그런 학위를 딴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 두고 넘어가자.

김 : 그렇죠, 제가 풀타임으로 다른 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대학원을 2년 꼬박 다니면서 쓴 논문이죠. 그리고 그때는 공부를, 학부 때는 수석으로 입학한 장학생이면서도 학점이 안 되어서 거의 장학금을 못 받았는데, (웃음) 대학원에서는 입학할 때만 못 받았고, 나머지 세 학기는 전부 성적으로 장학금을 타서 학교 다녔어요.

딴 : 공부를 무척 열심히 하셨나 보네요. 학부 때 못하셨던 공부를……

김 : 예, 밀린 공부를 아주 열심히 했었죠. 그때 단지 공부를 하고 싶었던 차원이 아니라 제가 아까 사적 유물론을 수정해야 된다고 주장했다고 했잖아요? 80년대 후반 내내 그런 이념적인 갈등이 확인되는 과정이 있었어요. 뭐 페레스토로이카라던가 동구권이 몰락하는 과정이라던가 하는 게 다 겹치면서, 제가 대학원을 간 게 89년에 갔으니까, 89년, 90년 이런 과정을 다 겪으면서 공부를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었어요. ‘왜? 현실 사회주의는 무너질 수 밖에 없는가?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한국 사회에 적용할 만한 시사적인 대안점은 뭔가?’ 이걸 죽도록 고민할 때니까 공부를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었죠.

딴 : 그 고민자체가 학업에 투입이 된 거네요. 고민의 열정이,

김 : 그래서 석사논문도, ‘소련 페레스토로이카’, 소련 개혁체제에 대해서, 왜 나왔으며, 문제는 무엇이고, 앞으로의 전망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런 걸 썼었죠.

딴 : 당시 최대의 시사 현안을 주제로 석사논문을 쓰신 거네요.

김 : 그런 셈이죠.

이 사람, 학구파다. 다른 표현으로는 먹물 되겠다. 당시는 소련이 붕괴하면서 사회주의 자체에 대한 회의가 전세계적으로 널리 퍼지던 시점이었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를 포기하기도 했고, 정치인들은 소속 진영을 바꾸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시절에 주어진 이런 고민들을 학술적으로 소화해 낸 것이다. 이 논문이 어느 정도의 학술적 성취를 보여주는 것인지 판단할 근거를 내가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저 흔한 석사논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분명히 인간 김영춘의 고뇌의 흔적은 담겨 있을 거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딴 : 그렇다면, 정리해보면, 대학원 생활동안 YS의 곁을 떠나있는 사이에 3당 합당이 발생한 거고, 실제로 그걸 그 자리에선 찬성하지 않았고, 어떻게 보면 결별까지 한 셈 인데, 결과적으로 다시 대통령이 된 다음에 청와대를 들어가신 것 아닙니까?

김 : 아니요. 대학원을 마칠 때 쯤 YS가 저를 불렀어요. ‘한 번 보자’ 그래서 그땐 저도 화가 좀 많이 가라앉아 있던 상황이었고, (딴 : 감정이 가라앉은 다음에,) 근데 그때 상황이 박철언 씨한테 막 두드려 맞으면서, 김영삼 대표가 당시 대표였는데, 후보에서 아웃되는 분위기였어요. 내각제 각서 파문이 생기면서 박철언씨 김종필 씨가 협공을 해서 김영삼 총제가 아웃되는 분위기였어요. 실제로 민자당 안에서 지분이 20%밖에 안 됐거든요. 한 80%가 민정당계, 공화당계였으니까 아웃되는 거였죠. 그 시점에 두드려 맞고 있던 상황에서 저를 보자고 그러신 거죠. 그래서 가서 뵀더니, ‘영춘아, 니가 나를 한 번 도와줘야 되겠다.’

딴 : 직접적으로 도와달라고 표현을 하시던가요?

김 : ‘제가 도울 게 뭐있습니까?’ 그랬더니 ‘내가 이번에 이 싸움으로 마지막이다. 내가 이번에 여기서 일전에 이야기했던 호랑이 굴에서 호랑이 잡는 싸움에 실패한다면 내가 은퇴한다. 이 싸움이 정말 두 번 다시 없는 마지막 싸움이니까 이 싸움만 니가 나를 좀 도와줘라.’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거였죠. 저는 뭐 논문 쓰고 있었고, ‘논문 쓰고 나면 대학 박사과정을 외국으로 가서 할 생각입니다.’ 그땐 그런 계획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렇게 말씀을 드렸더니 ‘논문 석사까지만 쓰고, 박사논문은…’ 그때부터 대선이 한 1년 6개월쯤 남았을 때 같은데. ‘…조금만 미뤘다가 써주면 안 되겠나? 내가 마지막 싸움을 하는 건데 니가 좀 마지막으로 도와주라.’ 이렇게 인간적으로 이야기하셨거든요.

딴 : 총재 비서하시던 시절에 굉장히 YS가 신뢰하는 부하 중에 한 명이셨나 보네요.

김 : 그 시절에 상도동 안에서 제 별명이 YS의 셋째아들이었어요.

딴 : 셋째아들? (웃음)

김 : 둘째아들이 김현철씨고, 셋째아들이 저라고 상도동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저한테는 화도 잘 안 내고 그러면서 김덕룡 의원이나, 최기선, 그런 분들이나, 쉽게 말하기 힘든 게 있으면 저를 시켜서 하면 화를 잘 못 내니까요. 저는 뭐 막내아들 정도밖에 안 되니까…

딴 : 귀엽고, 예쁘고, 이런..

김 : 예, 그런 어려운 얘기는 저를 시켜서 하고 그랬어요. 어디든 저를 데리고 다니시려고 하기도 했고요.

딴 : 그러니까 3당 합당 이후로 YS가 대선 후보로서 위기에 빠진 시점에 직접적인 구조요청이 왔다?

김 : 그렇죠. ‘영춘아, 니가 내 이 마지막 승부를 1년 반만 좀 도와다오.’ 그렇게 부탁을 하는 건데, 그때 저는 고민이 참 됐어요. 이건 제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3당 합당에 대해서 내가 동의하는 게 되는 건데, 고민을 하다가 ‘하자’고 마음 먹었던 것은, 제가 그분하고 인간적인 관계, 또 사랑을 받았던 그런 관계에 대한 마지막 정리라고나 할까요? 저는 그때 김영삼 총재가 대통령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딴 : 실패할 것이다?

김 : 예, 구조상 될 수가 없다. 그때 박철언씨가 실세였는데, 박철언씨가 김영삼 죽인다고 그러고 있는 상황에서 김영삼 총재는 그때 일종의 할복 전술밖에 없었어요. ‘정 안 되면 내가 나가서 김대중이 손을 들어주고 이 판을 다른 판으로 만들어 버리겠다.’ 고 이야기 하셨었어요.

이 부분,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새로운 이야기이다. 보통은 노태우가 김영삼에게 차기 대권을 약속하고 3당합당을 제시한 것이고, 김영삼은 그것을 받아들여 3당합당에 나선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나 또한 그렇게 알고 있었고, 합당 이후 김영삼은 자연스럽게 대선후보로 자리매김 하게 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 또한 그냥 공짜로 된 것은 아니라는 증언이다. 당시 정권의 내부에서 박철언의 위치는 상당했으며, 그 박철언이 김영삼을 정치적으로 무력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었다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 합당을 깨고 다시 김대중에게로 돌아간다는 극단적인 카드까지 사용했어야 했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다.

만약 그 카드가 실제로 사용되었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김 : 그러니까 나는 그때 대통령은 안 된다, 이미 안 되는 상황이고. 그렇다면 이 양반이 정치를 마무리하는 과정을 내가 도와드려야겠다, 고 생각을 했어요. 한편에서는 보은을 하는 거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정치적으로 사망을 한다고 치면 그 장례를 내가 치러줘야 안 되겠나, 그 상도동계의 막내로서 의무감 같은 것도 느꼈습니다.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자기가 모셨던 보스의 목을 쳐주는 역할을 자기가 사랑하는 측근한테 시키는 것 아닙니까? 그런 걸 위해서라도 내가, 그 양반이 그 역할을 나한테 맡긴 건 아니지만, 내 심정은 그 양반은 이제 안 된다. 라고……

딴 : 일반인들이 잘 몰랐던 거는 아마 그거겠네요. 그러니까 성공할 거라는 기대를 하지 못했다. 실패할 것이라고 봤다는 부분.

김 : 예, 실패할 거다. 실패할 건데, 그 정치적 마무리는 내가 해드려야겠다. 나는 그때 속으로는 정치적 장례라고 생각했어요. 장례를 제대로 치러야겠다.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 그때 안 된다고 그러면은 그냥 떠나는 게 아니라 민정당 정권을 완전히 깨버리면서 DJ를 도와준다는 가정이었어요. 내가 그것까지 같이 하는 게 맞다. 라는 생각을 한 거죠. 그때는 그렇게 예측을 했죠.

딴 : 이건 3당 합당이라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복원해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었던 거네요

김 : 그렇죠. 근데 뜻밖에 내 예상과 다르게 대통령이…

딴 : 너무 잘해버렸어. (웃음)

김 : 할복 전술이 통했던 거죠. 그게 겁이 났던 겁니다.

딴 : 그게 판이 깨지고 다시 김대중한테 가버리면 완전히 민정당은 괴멸되는 거니까요.

김 : 김영삼 총재님은 굉장히 독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쪽에서 안기부나, 박철언 씨 같은 사람들은 그래도 죽여야 된다고 했는데, 노태우 씨가 마음이 약한 사람이니까 겁을 먹은 겁니다.

딴 : 파국이 오면 곤란하니까

김 : 그렇죠. 파국을 겁냈던 거죠.

딴 : 그런 일이 있었네요. 그런 얘기는 다른 매체에서는 하신 적이 별로 없으신 것 같습니다.

김 : 잘 안 했죠. 굳이 제가 모시던 어른과 저 사이에 있었던 일이도, 또 지금 같은 맥락의 이야기들은 쉽게 함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제가 안 했죠.

딴 : 저희 딴지일보는 이런 거 무척 좋아합니다. (웃음) 괜찮으시겠어요?

김 : (웃음) 이제는 공개돼도 영향 없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나름 딴지일보와 본 기자의 특종이라고 하면 오바일까? 어찌되었거나 흘러간 역사의 한 단면을 들여다 보게 되는 경험이어서 매우 즐거웠다. 정치인 이용을 안고 펄쩍 펄쩍 뛰고 싶었다.

딴 : 그렇게 전혀 예상 밖으로 YS가 대통령이 당선이 됐습니다, 그때 도와준 공로로 청와대에 같이 들어가시게 된 건가요?

김 : 아니 공로로 되고 그런 건 아니죠. 저는 저한테 프리핸드가 주어진 사람인 거지, 제가 뭐 어디 구속된 사람도 아니고, 내가 그냥 도와준 거지, 그럼요 전 항상 자유인입니다.

딴 : 그 부분을 계속 중요하게 말씀하시네요. 누가 시킨 게 아니라 내가 선택한 길이다.

김 : 자유의지로 쟁취도 하고, 뭘 하는 사람이지. 누구한테 구속되고 끌려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딴 : 이 대목에서 또 한 번의 질문이 또 나올 수가 있습니다. 이 부분이 3당 합당, 그 잘못된 행동에 대한 원위치 작업이라고 예상을 했을 수도 있는데, 결과적으로 YS가 대통령 당선됐다는 것은 3당 합당이 그대로 이어져서 가는 겁니다. 이거에 대해서 내가 또 도구로 들어간다는 판단은 3당 합당에 대한 거부감이 완전히 희석되어버린 상태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요?

김 : 의무감이 더 생긴 거죠. 그렇게 해서 뜻밖에 집권을 했는데, 여전히 권력구조 안에서 보면 20% 대 80%이 유지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소수정권인 거죠,

딴 : 내부에선? 밖에서 보면 한 덩어리로 보이니까 상관없는데, 내부에선 항상 소수였던 거다?

김 :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이 개혁 드라이브를 간다고 말씀하시면서, ‘잘 할 자신 있다.’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내가 볼 땐 굉장히 불안불안한 거죠. 소수파로서, 맨 파워도 약하고, 사람을 통해서 일을 하는 건데, 또 옛날 그 민정당계들을 많이 써서 이 개혁 드라이브는 성공 못하는 거고, 그런 상황에선 딜레마에 빠진 거죠. 다시 공부를 하러 돌아가야 하는 건데. YS 그때 외국유학 가겠다고 하면 유학도 보내준다고 그러셨어요. 대통령이 이미 됐으니까. 훨씬 좋은 조건에서, (웃음) 그땐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야 너 유학가면 내가 다 도와줄 텐데, 조금만 기다려라, 기다려라’ 그런 식으로 얘기하시곤 했어요. 대통령이 되었으니 이제 더 좋은 조건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그땐 이제 의무감이 생겼어요. 이 소수파 정권을 어떻게든 성공 시켜야 된다. 특히 김영삼 개혁 드라이브를 성공시키지 못하면 ‘우리가 역사에 죄를 저지르는 거다.’ 그런 생각, 의무감이 생겨서 잔류하고 청와대에 들어가서 일을 하자, 그렇게 마음먹었죠.

딴 : 실례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면에서 봤을 때, 청와대 정무비서라고 한다면,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은 누구나 욕심낼 만한 자리거든요. 그 자리에 대한 욕심이 한쪽에서 작용한건 아닐까요? ‘한 번 해보고 싶다.’라는…

김 : 그런 게 아주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제가 처음 들어갈 땐 행정관으로 들어갔어요. 나이도 30대 초반이었고, (웃음) 아무리 비서 출신이라고 하지만 공무원들도 있고 거기에 30대 초반에 비서관이면 너무 위계에 위화감이 생긴다. 그래서 처음엔 행정관으로 들어갔죠. 그때 욕심이라고 한다면 비서관에 대한 욕심은 아니고, 그 안에서 세상을 한 번 보고싶은 욕심이 있었죠.

딴 : 청와대 안에서 보이는 세상.

김 : 예, 국가 권력을 바라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죠. 그것보다 더 큰 것은 제 나름대로의 책임감, 의무감, 이 정권을 결코 실패하는 정권으로 만들면 안 된다. 그런 생각으로 그 일을 시작했던 건데, 큰 틀에서 보면 그 작업 자체가 저는 우리나라 역사발전에 도움이 되는 역할이 많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한 측면이 있다. 보통은 이럴 경우, 역사적 사명을 얘기하면서 개인적인 욕심으로 한 일은 아니라고 강변하는 경우가 많다. 정치인들이라면 더 그렇다. 하지만 정치인 김영춘은 자신의 내면에 당연히 포함되어 있는 욕망이나, 그 밖의 아름답지 못한 측면들을 있는 그대로 얘기하곤 한다. 별다른 주저함도 없이 말이다.

솔직함은 정치인에게는 그다지 프로답지 못한 측면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솔직함은 아주 긴 관점에서 일반적인 정치인들의 수준을 넘어선 역사적인 반열에 올라간 정치인들에게 항상 있어왔던 장점이다. 과연 김영춘의 솔직함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인가 궁금해진다.

 

<스페인에 있는 가우디의 성가족성당 사진이다. 정치인의 선거캠프에서 이런 액자를 발견하는 게 예사로운 일은 아니다.>

딴 : 전체를 천천히 봤을 때, 남는 일이었다? 못한 일은 아니었다?

김 : 예, 군부 정치계열을 완전히 차단해냈고, (하나회 해체) 실명제라든지, 해서 우리나라 경제와 정치의 유착관계라든지, 또 행정과의 유착관계, 이런 것도 끊어내는 중요한 고리가 되었고요.

딴 : 어떻게 보면 천천히 발전시킨 게 아니라, 징검다리처럼 점프 점프를 했던 시절이었다고 저는 보고 있거든요.

김 : 예, 3당 합당이 아니고, 다른 선택, 그러니까 우리가 87년에 양 김씨가 단일화 되면서 형 먼저, 동생 먼저 하는 식으로 했으면 훨씬 좋았겠지만 그게 실패하고 말았던 그 이후의 국면에서는 김영삼 정권이 있었기 때문에 김대중 정권도 있지 않았겠나, 그런 한 번의 징검다리를 거쳐서 김대중 정권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저는 그런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딴 : 그런 관점도 가능하겠군요.

부산에 출마하다

김 : 제가 이제 부산에 이번에 돌아와서, 선거를 서울 광진구에서 하지 않고, 여기서 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공개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그 이유입니다.

딴 : 부산이 대한민국 남한에서 상당히 수준 높은 야권의 도시였는데, 그게 이제 완전히 한나라당의 텃밭이 되어버린 이유가 바로 3당합당에서 시작된 것이지 않습니까?

김 : 예.

딴 : 그 피해를 지금 본인께서 받고 계시는 거라는 거죠. 여기 출마를 결심하시면서요. 그것도 책임의식인가요?

김 : 피해를 받는 게 아니라, 제가 부산출마를 결심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를 반성했는데… 오래 심사 숙고한 겁니다. 몇 년 이상 숙고를 하고 난 결론인데, 우선은 첫째, 부산 때문이고, 부산이 이런 식으로 일당 독점으로 고인 물 썩어가듯이 죽어가는 것은 안 된다 라는 거였고, 두 번째가, 부산이 바뀌면 한국 정치 지도가 바뀐다, 그런 차원에서 이번 총선과 대선 전체의 운명을 부산에서부터 바꿔보고 싶었던 욕심이 있었던 거였죠.

딴 : 그건 좀 부연설명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부산이 바뀌면 한국이 다 바뀐다?’ 왜 그렇죠?

김 : 영남의 균열, 영남을 한나라당이 독식하는 그런 구조, 그런 정치적 정서와 상태를 유지하고서는 절대 민주당이 다수당이 될 수가 없어요.

딴 : 지역구도 같은 걸 말씀하시는 건데요.

김 : 지역 분할 구도를 깰 수 있는 부산이라는 겁니다. 대구에선 못 깨요. 부산이 깨지면 경남이 깨지고, 울산이 깨지고, 그리고 그게 대구 경북까지 치밀어 올라갈 수 있는 거지, 다른 식의 접근은 생각할 수가 없거든.

딴 : 그 해결의 순서를 그렇게 보고 계신 건가요? 그렇게 되면 부산이 키포인트가 되는 거구요?

김 : 예.

딴 : 그런 부산에 출마하는 것도 굉장히 오래 고민하셨을 텐데, 그게 다르게 보자면 삼당합당으로 인한 피해를 해결하는 첫걸음이 될 수도 있는 거네요.

김 : 저는 ‘내가 안 하면 안 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어요. 결국 삼당합당 문제로 돌아가는데, 그것 때문에 지금 부산이 20년 동안 한나라당한테 구속돼있는 셈 아닙니까? 저는 이미 10년 전에 그 한나라당을 박차고 나왔지만, 2003년이죠, 10년 전에 박차고 나왔지만, 이건 안 되는 거다. 한나라당의 욕심, 건강한 보수의 탄생, 이런 거는 이제 불가능한가 보다, 저 같은 사람은 그런 미궁에서 나와서 다른 운명을 개척했지만, 부산은 그렇지 못하고 있다는 거죠. 3당합당이라는 게 순기능도 있었다고 하지만, 역기능도 컸던 건 분명한 사실이고, 그 역기능 중에 하나가 부산 경남의 완전한 한나라당화, 한나라당 일당독점 지배 상태가 된 겁니다.

딴 : 사실은 3당합당이 역기능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순기능은 거의 알려져 있는 게 없습니다.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3당합당을 통해서 DJ까지 이어질 수 있는, 그러니까 판을 흩어 버리는 셈이죠. YS가 먼저하고 DJ까지 이어지는 이런 과정을 심지어 순기능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사람도 그렇게 많지는 않을 거예요.

김 : 그렇게 말하면 부정하거나 욕할 사람들도 많을 겁니다. 하지만 큰 역사의 흐름을 봤을 때는 그렇다 이겁니다.

딴 : 그 말씀에 다분히 동의를 합니다. 그 순기능은 그렇다 치고, 역기능을 해결하는 첫걸음을 부산에서 하고 싶다. 그래서 출마하셨다. 이런 얘기가 되겠네요.

김 : 그렇죠. 제가 김영삼 총재 비서를 했기 때문에, 나중에 삼당합당을 하고 난 뒤에 김영삼 정권의 탄생에 제가 일조를 했기 때문에, 그렇다면 제가 결자해지, 제가 YS는 아니지만 그 부하였던 사람으로서, 총애를 받았던 사람으로서 김영삼 총재는 전혀 동의하지 않으시지만 저는 내가 결자해지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하고 생각을 했던 겁니다. 어떤면 에서는 그 역기능, 역사적 역기능에 대한 보속이라고나 할까요? 내가 설령 이게 떨어지더라도, 내가 제단에 바쳐져서 조금이나마 보속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도 먹어 봤구요. 그런 마음으로 돌아왔는데, 잘 모르겠어요. 부산시민들에게 어떻게 전달이 될 것인가. 사람들이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여기에 달려있는 것 같아요. 근데 제가 돌아와서 보니까 한나라당 지지자 중에서도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동의하는 분들도 꽤 있습니다. 제가 1월 1일 날 상도동에 세배를 갔었는데 김영삼 대통령은 여전히 저에 대해서 못마땅해 하세요.

딴 : 그 때 탈당할 때부터 못마땅해하셨죠?

김 : 예. 탈당할 때부터 그때 저를 몇 시간을 말리셨는데, ‘제가 갑니다. (한나라당은) 도로 민정당입니다. 제가 총재님을 따라서 김영삼 개혁정권을 만들어 왔던 것이 도로 민정당하러 온 거 아닙니다. 그리고 이미 김영삼 정권 말기부터 이 민정계들이 이회창 후보 탄생하는 과정에서 김영삼 이념 두드려 패고, 그렇게 당신을 해친 정당인데, 뭘 그렇게 미련을 갖습니까?

딴 : 그때 (김영삼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김 : 그러면 그 양반 그 이야기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계시면서도 “야 그래도 노무현은 아니잖아, (웃음) 김대중은 아니잖아” 이런 식인 거죠. 근데 “제가 노무현 대통령을 위해서 간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이 도로 민정당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에 다시 옛날 그 야당의 뿌리, 개혁적인 정치를 위해서 이 나라 지역주의 정치구도를 깨보고 싶은 겁니다. 이 판을 깨야겠습니다.” 이랬더니 그 양반이 정치는 현실이다. 니 생각이 다 좋지만 떨어질 꺼다. 안 된다, 안 돼도 좋습니다. 영감님도 옛날에 26살에 초선 국회의원을 하다가 그때 이승만 씨가 사사오입 개헌 하자마자 바로 반박하고 탈당했거든요.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거제도에서 떨어졌어요.

딴 : 그렇죠, 똑같은 경험이 있으신 거죠. (웃음)

김 : 그때 총재는 왜 그랬습니까, 그랬더니 “야, 그때는 50년 전이었고, 이승만이가 하도 그래서 그랬잖아.” 그래서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도로 민정당이 되어버렸는데 내가 도로 민정당에서 어떻게 정치를 합니까?” 했더니 “떨어진다니까!” 해서 “총재님도 떨어졌잖아요.” 그러면서 갑론을박을 하다가 제가 마지막 결론을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저는 정말 자부심을 크게 가지고 있는 것이, 그렇게 젊은 정치를 했던 청년 YS정신, 염산테러를 당하면서도 박정희한테 굴복하지 않았던 그 김영삼의 정신,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야당 총재를 제명시키던 정권과의 그 험한 싸움을 감당했던 70년대 말의 그 김영삼 총재의 정신, 이게 내가 자부심으로 갖고 있는, 내가 김영삼 대통령의 비서였다는 자부심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청년 YS의 제자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 정치인 김영춘이 스스로를 어떤 위치에 놓고 있는가가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지금은 비록 정신이 혼미해졌다고 볼 수 있지만 청년 김영삼의 정치적 기개는 대단했고, 김영춘은 그 모습을 통해 정치를 배운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정치인들이 스스로 어떤 가치를 품고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인지 물어보고 싶어졌다. 과연 이런 정도 수준의 뜻을 품고 정치를 하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김 : 그러면서 “제가 그런 정치를 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했더니 이 영감님이 “알았다.” 그러더니 “나 더 이상 니 안볼란다. 니 힘들 꺼다. 각오는 해라.” 그래서 “각오합니다.” 그러고 내려왔는데, 이 영감님이 그렇게 자기 말을 안 듣고 자기 속을 썩이고 떠나간 놈인데도, 그러면 (나갈 때) 안 내려오는 게 보통 그 영감님의 손님 접대 방식인데, 내가 내려와 차를 타고 떠나는 길에 뒤를 돌아보니까, 밖에서 계속 손을 흔들고 계시더라고.

 

딴 : 문앞에 서서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김 : 마음이 짠하셨던 거지, 그런데, 점점 상태가 나빠져서..(웃음)

노무현에 대한 김영삼의 시각

딴 : 아 이건 완전히 다른 질문인데요. YS는 노무현을 왜 그렇게 싫어합니까?

김 : 글쎄 잘 모르겠어요. 김영삼 대통령은 그냥 정치인입니다. 이 양반이 말을 하고 판단하는 걸 보면, 여전히 현역 정치인으로 판단하고 생각을 하시는 거지. 대통령 퇴임 이후에도 여전히 현역인 겁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그래도 전직대통령으로서 YS를 예우를 해주고 그러면, MB에 대해서도 그 사람 칭찬을 하다가 안 그러면 가차없이 욕을 하고 그러는 스타일이신거죠. 노무현 대통령도 그러지 않았을까? 전직 대통령으로나 정치 선배로서 예우를 깍듯이 하면서 ‘대통령께서 전에 하실 때 어땠습니까?’ 라던가 자주 전화를 해서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묻고 했으면 안 그랬을 거 같은데…

딴 : 그럼 단순히 섭섭하고 서운해서?

김 : 그런 거 같은데.

딴 : 그래도 일국의 대통령인데…

김 : 그거 아니면 김영삼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을 그렇게 싫어할 이유가 없죠. 물론 이제 당신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젊었을 때보다 훨씬 더 보수화 되고, 그러면서 노무현 정치를 못 받아들였을 수도 있어요.

딴 : 노무현 정치가 정도가 아니라고 판단하셨을 수도 있겠죠.

김 : 김영삼 대통령이 한 50대 까지 그 다음에 70대 이후, 퇴임 이후에 그분의 사고를 보면, 아주 많이 보수화 됐죠.

딴 : 갈수록 보수화되는 게 드러나죠.

김 : 그런 면에서 근본적인 철학의 불일치 같은 것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은 정치인인 겁니다.

단순히 자신에 대한 대접이 소홀해서 싫어했다고 보기에는 그런 대통령을 가졌던 우리들 자신이 너무 민망하고 부끄럽다. 아무리 김영삼이라 해도 말이다. 차라리 나이가 들어가면서 보수화된 정치인 김영삼의 시각에서 노무현의 정치철학은 용납이 안 되었던 것이 이유라고 생각해 두기로 하자.

열린우리당의 창당, 영광과 실패

딴 : 그렇게 해서 원래 처음 국회의원은 그쪽에서 먼저 하셨죠? 청와대에서 나와서 국회의원 하신 거죠.

김 : 예, 한나라당으로 당선이 됐죠.

딴 : 그때도 광진구에서 하셨었고, 그러고 나서 그 임기가 끝나기 전에..

김 : 당선이 2000년이니까 2003년에 탈당을 했지요.

딴 : 4년 임기가 완료 되기 전에 한나라당을 탈당, 당시에 말하던 독수리 오형제로 나오신 거죠? 그때 나올 때의 심정은 아까 그 YS 설득하던 그 심정으로?

김 : 여기서 죽는다. 정치를 그만 두는 한이 있더라고 싸운다, 하는 생각이었죠.

딴 : 나와서 열린우리당 창당에 같이 참여를 하신 거죠?

김 : 우리 다섯 명이 나와서 창당을 하자고 제안을 했죠. 거기서 민주당 사람들이 좀 당황하고 그러다 처음에 몇 달이 시간이 갔는데, 그분들은 처음에 안 나오고 싶어했어요. 노무현 대통령도 반대했어요. 그래서 민주당 개혁 논쟁이 붙었는데 그게 이상하게 가버리더라구요. 참 그 사람들이 어리석은 사람들인 게, 민주당이 개혁되는 과정에 갔으면 우리가 거기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근데 그게 논쟁이 막 붙으니까, 엉뚱하게, 이번에 야권통합 논의에서 와서 깽판치고 하는 것처럼, 그렇게 돼버린다는 거에요. 그래서 막 머리끄댕이 잡는 사건, 난닝구 사건 이런 게 생기니까 이건 뭐 민주당 개혁파들이 ‘도저히 불가능하구나, 민주당을 바꾼다는 게.’ 그러면서 어쩔 수 없이 그 사람들이 나올 수 밖에 없게 된거죠.

딴 : 그 부분은 상당히 아쉬웠던 부분이죠.

김 : 그러니까요. 그게 민주당 안에서 정리가 안 되는 바람에 우리가 새로 당을 창당하자고 깃발을 꽂은 상태에서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 민주당 개혁파들이. 그런 면에서는 민주당의 잔류파들이 잘못한 거죠.

딴 : 상대적인 잘못… 서로의 잘못이겠죠.

김 : 예, 체제 내 개혁으로 갔으면, 그 사람들이 나올 명분도 없고, 우리가 들어갔을 텐데, 체제 내 개혁에 밀리니까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려든 겁니다. 안 나오면 완전히 망하는 상황으로 간 거지, 그 사람들이…

딴 : 그 사실 열린우리당이 만들어지고 나서도 탄핵이라는 도움이 없었으면 상황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르는 거죠. 우리당이 이렇게 확 성장을 하기 힘들었을 테니까요.

김 : 일당은 안 됐죠. 그때 창당 주역들의 기본 계산은 일단 1단계는 3당이다. 나중에는 조금 욕심이 생겼어요. 탄핵 이전에 갑자기 2004년 1월부터 여론조사가 확 올라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탄핵이전에 이미 호남에서는 우리가 1당이었고, 기존 민주당을 압도를 했지요. 영남에서도 심지어는 한나라당 지지율에 육박해 가는 지지도로 나타나는 거죠. 저는 탄핵이 그래서 발생했다고 봅니다. 이건 국민들은 잘 인식 못하고 계시는 포인트인데, 호남에서 민주당이 완전히 위기감에 빠져버렸고, 탄핵이 3월 초였고, 2월 중순쯤에 영남에서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과 비슷해졌어요. 부산 경남에선 비슷해졌고, 대구 경북도 막 올라가는 거야, 깜짝 놀랬지. 이 사람들이 이게 뭐냐, 그러면서 싹을 죽여야 한다고 하면서, 결국은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와 민주당 조순형 대표가 둘이서 합의를 한 겁니다. 탄핵하자고.

이런 거였다.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이라는 사건이 발생한 원인이 바로 노무현의 집권과 열린우리당의 창당, 그리고 그 우리당의 지지율이 급속도로 상승함으로 인해 한나라당, 민주당 두 보수정당의 기득권 체제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그들의 방어심리가 작동한 것이라는 점이다. 대통령의 잘못? 뭐 그런거 없다. 새롭게 등장한 비주류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할 때, 주류의 저항은 이렇게 강력하게 나타나기 마련이다.

딴 : 그 악의 근원을 제거하기 위해서 탄핵을 했는데, 오히려 당해버린 거죠.

김 : 그 위기감이 결국은 자기 발등을 찍어버린, 도끼를 내리쳤던 셈이죠. 자승자박이라는 거지요.

딴 : 나름대로 나무뿌리 끊겠다고 도끼로 쳤는데 자기 발을 찍었군요.

김 : 국민들이 그렇게 화를 낼 줄은 몰랐지.

딴 : 그때 상당히 정국이 크게 요동을 쳤던 기억이 납니다.

김 : 2월 달 시점쯤에서 우리는 내부목표가 상향수정 됐어요. ‘2당한다.’ 처음엔 3당이었는데 2당을 하겠다. 내부목표가 100석이었어요. 근데 이게 탄핵발언에 50석을 더 보태주고 올라간 거죠.

딴 : 최종적으로 선거 끝났을 땐 152석인가? 그랬죠?

김 : 그것도 노인 발언만 아니었으면 180석 된다고 다들 그랬거든요. 근데 그 바람에 한 30석 빠진 거지.

딴 : 그 노인 발언은 기억이 나는데, 사실 그 노인 발언이 그렇게 크게 영향을 줬을까요?

김 : 예, 심하게 영향을 받았죠. 역풍을 만들어 준거지.

딴 : 어떤 의견은 울고 싶은데 뺨때렸다는 표현으로, 결국 그 사람들은 기표소 들어갔으면 한나라당 찍었을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긴 있거든요.

김 : 그래도 그렇게 자기를 정당화시킬 순 없죠. 확신하는 사람들이야 어차피 저쪽에 표 주는 사람들이지만, 중간에서 갈등하는 사람들은 그런 기제가 없으면 그래 이번에 한번 바꾸자고 맘 먹었을 겁니다. 부산만 하더라도 그 노인발언 있기 전까지는 열린 우리당 후보들이 10% 20% 씩 앞섰어요. 그게 한 20% 빠져버린 겁니다. 며칠사이에…

제 가 노인 발언 파동 이후에 부산에 지원 유세하러 갔는데, 가보니까 말을 못 붙이겠더라니까요. 그전에는 한나라 사람들이 내려가서 말을 못 꺼냈는데, 그 발언 이후에는 우리가 가서 말을 못 꺼내게 하는 거야. 어디만 가면 노인들이 벌떼같이 나와서 “우리보고 죽으란 말이지? 젊은 놈들끼리 다 해봐! 나라가 뭐! 니들은 엄마 없이 나왔어?”, 하여간 말을 못 붙이게 하는 거야.

딴 : 그 정도였군요.

이 부분, 앞서 있었던 정동영과의 인터뷰에서도 똑같이 나오던 바로 그 부분이다. 이 무서웠던 실수, 노인 발언의 주체는 바로 그 정동영이다. 하지만 요즘의 정동영은 또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진짜로 변한 것일까? 아니면 변한 척 하는 걸까? 진짜로 변했다면 앞으로 이런 실수는 더 이상 없을 것이고, 변한 척 하는 거라면 이보다 더한 실수를 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더욱 더, 졸라 궁금했고, 인터뷰를 통해서 자세하게 알아봤던 부분이다.

딴 : 근데 어쨌든 간에 열린우리당으로 옮기신 거는 성공을 하셨습니다.

김 : 예, 예상보다 훨씬 성공을 했죠.

딴 : 성공을 했고, 전체 형세가 굉장히 급변하면서도 좋은 쪽으로 바뀐 거라고 볼 수 있는데, 결국 우리당이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그 실패의 원인은 뭐라고 보십니까?

김 : 우리 역량보다 너무 큰 성공을 거둔 거죠.

딴 : 그 의견이 가장 많은 것 같습니다.

김 : 우리가 100석 목표로 했던 정도가 그때 당시의 우리 실력, 그러면서 우리 당을 한 번 차근차근 만들어 가보자. 그러면서 백년 정당을 하자고 결의를 했던 건데, 당을 제대로 만들어가는 그 과정에서 정책도 만들고 당의 정체성도 서로 공유해가면서, 싸워가면서, 그렇게 갔으면 정말 우리나라 정치사에 획기적인 그런 탄탄한 정당을 만들 수 있었을 거라 생각을 하는데, 이게 갑자기 150석을 넘어서다 보니까 자기 실력 이상의 과도한 기대와 주문을 받고, 그 내부는 내부대로 논쟁을 거쳐가면서 쌓아가는 과정 없이 갑자기 여당인데다가, 거대 여당에게 쏟아지는 주문을 한꺼번에 다 수행해야 되니까, 청와대로부터도 계속, 국회에서 법을 통과시켜라 그러고, 이게 우리당 내부가 그걸 소화하고 수용해가면서 가야하는데, 그 토론의 과정도 생략된 채로, 과제를 수행해 가기도 급급한 그런 상황으로 내몰려 버렸어요.

딴 : 우리당 실패를 굉장히 아쉬워 하시는 것 같습니다.

김 : 그럼요. 그래서 제가 불출마 선언까지 하게 된 거죠.

딴 : 상당히 마음이 아프셨겠습니다. 그때 당시에는요.

김 : 정말 그때 백년 정당을 만들 수 있었는데, 구성 인자들도 괜찮았고, 당원도 좋은 당원들이 참 많이 들어 왔었어요. 근데 그 뒤로는 도로민주당이 되어버리면서 젊은 당원들이 많이 떠나버린 정당이 됐고, 그러면서 당 자체의 장기적인 생명력이 소진이 많이 됐죠.

딴 : 근데 그게 사실 한 기수 해보신 건데, 2004년부터 시작해서 2007년도에 떠나신 건가요?

김 : 예.

딴 : 한 3년정도 해보시고 탈당하신 건 너무 빠르게 포기하신 건 아닌가요?

김 : (웃음) 그렇게 볼 수도 있지요.

딴 : 지나고 나서 보기에, 기간으로만 보자면 그렇게 실수를 하고 분에 넘치는 성과를 올렸고, 내부에서 기초를 다지기 이전에 너무 많은 임무가 주어졌고, 그 무게감을 못 이겨서 내부에서 붕괴해가는 과정을 다 보셔놓고, 그걸 3년 만에 포기하신다는 건 포기가 너무 이른 게 아니냐 라는 지적은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김 : 저나, 참여당, 젊은 당원들이나, 젊은 사람들의 호흡이 너무 급하다고 볼 수도 있는 거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제가 다른 사람의 입장까지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니까 제 개인만 말씀드리면, 국회의원 8년을 지냈는데, 그 8년 동안 이른바 개혁정권, 민주화 정권, 민주정부 16년을 거치고 저는 국회의원 8년을 했는데, 제가 여당 국회의원으로서 사 년을 또 해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딴 : 사실은 두 번 다 여당하신 겁니다.

김 : 그런 셈인가요?

딴 : 한나라당, 열린우리당, 두 번 모두 여당을 하신 거죠.

김 : 아니죠. 한나라당 때는 야당이었습니다.

딴 : 아, 한나라당 때는 야당이었군요. 제가 착각했습니다.

살다보면 이런 착각도 할 수 있지 뭘…

김 : 예, 다수 야당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 정치의 중간결산을 해보면, 왜 우리나라 국민들은 살기가 더 힘들어지고, 특히 중산층과 서민, 노동자, 자영업자들은 날이 갈수록 살기 어렵다고 죽겠다고 아우성을 쳐서 이명박 정부를 저렇게 대세를 만들어주고 그런 상황이었잖아요. ‘왜 이렇게 됐을까.’ 그 자괴감과 좌절감이 참 컸어요.

딴 : 열린우리당 한 번이 아니라 다양한 시도를 많이 해봤건만, 왜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의 삶의 질은 이렇게 떨어져 가는가?

김 :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내가 정치를 바라보는 시각, 그리고 이른바 개혁파나 운동권 출신이라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세상을 잘못 바라보고 있는 거구나, 그런 자각과 반성을 많이 했어요. 그 시점에서 그런데 여전히 한나라당은 뭐 두말 할 나위도 없고, 그땐 MB 된다고 다 그럴 때지만, 저 사람이 집권해봐야 우리 고통받는 국민들, 90% 국민들이 살기 좋아지기는 커녕 더 어려워질 거란 건 명약관화한 사실인데 왜 이렇게 되는 걸까, 그렇다고 이쪽 우리 세력도 우리가 정말 열린우리당을 잘못 운영하고 참여정부를 잘못 운영해서 이렇게 되어 버렸으면 국민들 앞에 석고대죄를 하고 정말 잘못했습니다, 반성을 하면서 지더라도 당당하게 지는 그런 싸움을 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도로민주당으로 달려갔잖아요. 호남 표에 얹혀서 똑같이 수도권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그런 기대감, 이게 호남 지역뿐만 아니라, 수도권의 이른바 386의원님들을 포함한 개혁파들까지 모두가 다 그랬어요. 어쩔 수 없이 끌려갔던 사람이건, 즉각적으로 그렇게 했던 사람이건 간에 아무런 시대적 각성과 반성, 국민들에게 내놓는 통렬한 사죄 없이 그냥 당장의 이익만 바라보면서 그렇게 달려갔다는 말이죠. 난 그게 너무 힘들고 괴로웠어요.

딴 : 근본적인 질문이군요.

김 : 당당하게, 국민여러분 죄송합니다. 저희가 정치를 잘못했습니다. 그 반성과 사죄 위에서 대안을 내놓고, 우리가 지난번 다수당 때는 이렇게 잘못해서 실패했다, 우리가 이렇게 한 번 철학을 바꿔보겠습니다. 정책을 바꿔보겠습니다. 그러고 대선, 총선을 치렀어야죠. 근데 그게 아니었죠. 그냥 정치공학적으로 그 잔류민주당하고 합쳐서 호남표 합치고 이러면 어떻게든 버텨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정도로. 이래가지고서는 우리가 국민들한테 길게 우리를 지지해달라고 할 수 있는 정치의 명분 자체가 다 죽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근데 그걸 우리 당 안에 있는, 저랑 생각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과 이야기 해봤으나 허사였고, 제가 오죽하면 2007년 1년 동안 일기를 썼어요 정치일기를.

딴 : 매일 쓰셨습니까?

김 : 예, 매일 써서 그걸 내가 책으로 출판은 아직 안 했고, 제 블로그인가 홈페이지에 그걸 메일 써놨더니 지지자들이 그걸 모아서 프린트한 책으로 하나, 남겨놓은 게 있습니다. 이건 역사의 기록으로 한 번 남겨야 하겠다. 언젠가 공개해야겠다. 라는 맘으로 써놓은 게 있는데, 그 과정에서도 쭉 기록을 해놨습니다만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잘 먹혀들지 않는 거죠.

딴 : 대부분이 아마 지금 그런 얘기 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 했겠죠.

김 : 그렇기도 하고, 그런 문제의식 자체가 별로 없었어요.

딴 : 음, 원래 정치는 그런 건데 왜그러냐는 식으로?

김 : 니가 너무 선비적인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거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 하고. 시대가 잘못됐다는 것이죠. 우리가 정치를 잘못했다는 반성은 별로 없는 거죠. 그때는 그런 반성이 노무현 대통령이나, 그 주변사람들도 별로 없었던 거 같아요.

딴 : 그런 고민을 통해서 뭔가 대안을 세우셨습니까?

김 : 나중에 저는 불출마 선언하면서 한편에서는 그런 책임, 이 당을 문 닫는 것에 대한 이 괴로움과 책임을 져야 되겠다. 그런 생각도 했지만, 또 한편에서는 해답을 찾아야겠다. 그 해답을 찾는 과정에서 문국현 지지도 했던 거고.

열린우리당 창당의 주역으로서 그 열린우리당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김영춘의 입장이 독자 여러분들에게 전달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 또한 그 입장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으며, 고통스럽게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실패를 통해 어떤 대안을 찾았는가 하는 부분이다. 실패에서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래가 없기 마련이다.

문국현을 지지하다. 그리고 성찰의 시간

딴 : 길은 맞는데, 문국현 지지는 왜 하신 거예요?

김 : 방금 이야기한 그거죠, 그 사람이 아니라, 난 문국현이라는 사람이 대통령이 될 거라는 생각은 한 적도 없고, 그 사람이 말하는 스피커가 맞는 거라고 생각을 했죠. 사람중심 세상, 사람중심 경제를 만들면 된다. 그게 제 문제의식과 일치하는 방향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이 목소리를 어떻게든 키워내야 된다. 나는 방향을 그렇게 가야한다고 생각했으면 ‘사람중심 경제’라는 이 한 단어로 내 모든 고민을 다 압축해서 들려주는 그게 난 복음처럼 들렸어요. 그래서 막상 각론이 모인 걸 보니까 진짜 각론은 없어. (웃음)

딴 : 당시에는 굉장히 목마른 상태에서 그게 하나의 대안처럼 들렸군요.

김 : 각론은 없으나, 그게 광야의 복음처럼 들렸고, 이 복음을 국민들은 널리 전파해야 된다, 그리고 구체적인 각론은 아직 없지만 이걸 만들어야 한다. 이 뼈대 위에서, 사람중심 경제라는 것을, 이걸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우리나라의 미래는 없다.

딴 : 결과적으로는 또 실패한 것 아닙니까?

김 : 절반은 실패, 절반은 성공했다고 봅니다.

딴 : 내용과 논리는 건졌을 수 있지만 정치적인 현실은 실패하신 거잖아요.

김 : 그렇죠. 현실정치인으로는 저는 실패한 거고, 창조한국당도 실패한 거지만 그러나 거기서 건진 것은 있습니다. 이제는 누구나 다 사람중심 경제를 말하잖아요. 거기서 얻은 게 있는 거죠.

딴 : 컨텐츠를 하나 건지셨네요 거기서.

김 : 당장 그 다음 해부터 민주당 원내대표가 연설하는데 사람중심경제라는 말을 막 쓰더란 말이죠. (웃음) 이제는 한나라당도 비슷하게 따라옵니다.

딴 : 다들 “사람중심”을 이야기 하죠. 시대의 화두가 되었어요. 그리고 나서 정계를 사실상 은퇴를 하셨던 거죠?

김 : 그렇죠. 그리고 해답찾기를 저 나름대로 해보려고 했던 거고요.

딴 : 공부를 하신 겁니까?

김 : 공부도 하고 세상을 돌아다녀 보기도 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해답을 찾아봤죠.

딴 : 자전거는 그때 타기 시작하신 거에요? 아님 더 오래 전부터 타신 거에요?

김 : 아니 그때 탔어요.

딴 : 전국일주?

김 : 예, 자전거 전국 여행, 도보여행도 해보고, 시골에 숨어서 책도 보고, 책 써보는 작업도 해보고, 그러면서 이게 해답이구나, 근데 그게 화두는 이미 주어져 있는 거니까, 사람중심 세상이라는 건, 이걸 경제로 어떻게 풀어내고 그 경제라는 게 국가 경제정책, 거시정책은 어떻게 풀어내야 되며 산업정책, 기업정책, 조세나 재정정책은 어떻게 가야 하는지, 이런 것들을 적용 시켜볼 수 있기도 하고, 또 사회나 문화를 바라보는 그런 시선, 정치를 바라보는 시선에 모두 적용될 수 있는 패러다임 아닙니까? 그러면서 왕도는 없는 거구나, 결국 철학의 문제고 세상을 어느 쪽에서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구나, 그런 결론을 내렸죠. 그리고 그걸 이제 심지 있게 밀고나가는 그런 의지력을 가져야지.

누구에게나 인생의 한 부분에 이런 과정이 있다. 여러번의 시도와 실패 끝에, 이 사람은 자신을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어떤 이는 그 과정을 통해 한단계 업그레이드 되기도 하고, 어떤 이는 그 과정을 통해 더 퇴보하기도 한다. 과연 정치인 김영춘은 어느 쪽일까? 그가 만들어온 것은 어떤 형태로 우리 앞에 보여지게 될 것인가 궁금하다.

김 : 우리는 특히 먹물들이 그런 근성이 더 있는 거 같아. 그런 습벽이 있는 거지요. 누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게 맞는 거 같고, 한시대가 신자유주의로 가면 그래 시장이구나! 그럼 시장 이야기하면 쪽팔리고, 열린 우리당 실제로도, 야 이거 아냐! 이를 테면 무슨 재래시장을 살려야 된다. 그러면 내가 생각했을 때 근본적인 해법은 재래시장을 근본적으로 붕괴시키는 대형마트를 규제하면 되는 건데, 역사적인 선례를 찾아보니까 유럽 국가들은 그걸 규제하고 있더라 이 말이지, 그래서 그 법안을 2000년대에 냈어. 근데 정말 배신감 느꼈던 게, 그 해당 상임의원회에 386 내 후배 의원 놈들이 ‘형, 그거 안 됩니다. 이거 시장에 반(反)합니다.’ 이런 거지.

딴 : 시장에 반하는 규제는 할 수 없다.

김 : 그렇죠. 내가 또 다른 자리에서 ‘이거 아니다. 국정운영 이렇게 되면 안 된다. 너무 시장, 효율, 경쟁 이렇게 하는 건 결국 나라를 좀먹는다.’ 이렇게 말하면 ‘역시 운동권 출신이구나.’ 어떤 의원은 “김의원, 김의원이 시장을 알어?” 이렇게 막 조롱하는 거지요.

딴 : 트렌드를 못따라 오고 있다고 조롱을 하는 거죠

김 : 조롱을 받는 거죠 제가. 그럴 때는 나도 이게 맞다고 생각은 하는데 전체로서 확신이 잘 안 서는 거죠.

딴 : 확신이 안 서니까 당당하게 주장을 잘 못하시는 거죠.

김 : 그렇죠.  이거 아니라고만 이야기하죠. 그럼 대안은 이거야. 라고 이야기해야 되는데, 그 대안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말을 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우물쭈물 하다가 참여정부, 열린우리당을 망하게 만들었다는 그런 자괴감. ‘우물쭈물 하다가 이럴 줄 알았지’ 같은 식으로 말이죠. 근데 우물쭈물 할 수 밖에 없었던 건 나한테 확신이 없기 때문에 그러는 거죠. 나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거의 대부분의 지식인들, 경제학자까지 포함해서, 정치인들, 다 그랬어요. 대통령도 그랬고, 대통령 주변 참모들도 그랬어요.

딴 : 결론은 몰랐던 거죠. 다들.

김 : 나중에 나도 그런 반성을 많이 했지만 내가 막 그렇게 대안도 없으면서 비판했던 대통령도 돌아가시고 나서 지금 ‘사람사는 세상’이나 그런데 나온 인터뷰를 보니까, 그 양반도 끝판에는 2007년, 8년 퇴임 후 과정을 겪으면서 나랑 똑같은 고민을 했다, 이거죠. 그래서 난 마음속으로 화해를 했어요.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노통하고 화해를 안 했어. 근데 돌아가시고 나서 그 책을 보고 인터뷰한 걸 보면서, ‘아 이 양반도 나랑 똑같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했구나.’ 그러면서 마음으로부터 화해를 했죠.

그걸 왜 꼭 사람 떠난 다음에 하나… 아쉽다.

딴 : 열린우리당의 집권기가 굉장히 많은 사람들한테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해준 그런 결과를 가져온 거네요.

김 : 그 정당의 껍데기를 놓고 보면, 이래저래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결국 정당의 형식이나 껍데기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작은 거라고 봅니다. 큰 틀에서 시대를 아파하고 그 안에서 책임 있는 정치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은 고민을 하면서 몸부림 치고 진통을 앓았던 시기가 열린우리당, 그리고 무너지는 과정, 그 뒤에 지금의 통합까지 다시 오고,  또 분담하고 가는 과정인 거 같습니다.

딴 : 그런 고통스런 과정을 겪으면 다 성장하는 건 맞는데, 과연 그 고통스러운 시간이 준 피해와 성장함으로써 얻은 이득과 어느 쪽이 더 클까요? 먼 미래에 보게 된다면, 그만큼 그 긍정적인 효과를 더 극대화시켜주실 필요가 있는 것 같은데요.

김 : 저는 그렇게 될 거라고 믿습니다.

손학규와의 관계

딴 : 알겠습니다. 손학규 전 대표하고는 어떤 관계세요?

김영춘이 다시 정계에 복귀하게 된 계기는 손학규가 당대표로 자리 잡으면서 최고위원직을 주면서부터이다. 앞에서도 계속 나왔던 얘기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김영춘은 손학규계 인물로 분류가 되고 있다. 물론 김영춘 본인은 그런 계보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김 : 아무 관계가 없었죠. 예전에는. 그분은 한나라당에 같이 있던 시절에는 별로 가깝게 안 지냈어요. 특별한 관계가 아니었고. 뭐 아주 스마트하고 젠틀한 양반이구나.

딴 : 요즘에 대권준비하면서 책을 많이 보신다고 얘기를 들었습니다.

김 : 옛날부터 책 좀 보라니까 이제 와서. (웃음)

딴 : 경제 책을 주로 많이 보신다고.

김 : 좋은 인상이야 있었지만, 거의 그 양반은 그야말로 한나라당 안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았던 분 아닙니까? 국회의원 세 번 하고, 복지부 장관도 하고, 도지사도 하고, 그래서 저 양반은 저렇게 해서 한나라당 사람으로 가는구나, 하고 나는 나와 버렸죠. 근데 2007년에 뜻밖에 탈당을 하더라고요. 저한테도 도와달라고 했었는데, 나는 못 도와준다고 그랬어요.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딴 : 그때 2007년 당시 대선후보로 경쟁을 할 때, 전혀 안도와 주신 겁니까?

김 : 아예 도와주지도 않았고, 탈당할 무렵엔 그 승부는 이미 정동영 쪽으로 나 있었던 상황이니까요. 제 생각엔 그랬어요. 그 분이 인상이 나쁜 것은 아니었으나, 한나라당 후보를 하다가 바로 탈당해서 바로 이쪽 후보를 한다는 게 타당한 거냐? 적어도 한 번은 쉬어야 하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못 도와준다고 했지요. 그리고 전 나와서 혼자 야인 생활을 한 거고 자기는 남아서 계속 여기서 정치를 한 거고, 근데 손대표가 춘천에 가 있을 때, 저를 보자고 해서 춘천 한 번 놀러갔죠. 전 양평에 방 얻어놓고 주말마다 가서 책 쓰고 그랬을 때인데, 주말에 한 번 갔어요. 그날 밤새 술을 먹었어요.

딴 : 아저씨들 단둘이서? (웃음)

김 : 예, 저는 주로 욕을 많이 했죠. 뭐 정치를 그렇게 하냐고. 욕을 많이 하고, 손대표도 그때는 그랬다, 고 하고, 기왕 이렇게 됐으니까 공부를 좀 많이 하셔라, 그리고 시대를 꿰뚫는 그런 화두를 하나 건져서 자기 정치로 나가셔라, 그래야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거다, 그런 주문을 제가 했어요. 그리고 한 6개월쯤 뒤에 또 먹자고 해서 춘천에서 술 한 번 먹고, 그 두 번밖에 제대로 이야기 해본 적이 별로 없죠. 근데 2010년 10월에 그 양반이 대표가 됐다고 보도가 나오고 바로 그 다음날 전화가 왔어요. 보자고해서 봤지요. 나는 준비를 좀 했어요. 민주당 대표로서 어떻게 해야 정치를 잘할 수 있는가, 어드바이스를 해달라는 거겠지, 싶어서 준비를 좀 했어요. 근데 그런 이야기는 안 물어보고 ‘들어와서 정치를 같이 하자. 최고위원으로 넣고 싶다.’ 고 하길래 왜 내가 대상이 되냐? 고 물으니 ‘민주당의 전국 정당화 그리고 진보화. 그 때 당시의 민주당보단 더 진보화시켜야 한다. 항상 이야기했던 것 아니냐 두 가지 다 당신이 부합되기 때문에 당신과 하고 싶다.’

딴 : 그러면 사실상 정치공학적인 선택 아닌가요?

김 : 공학적이라기보다는 손학규씨 나름대로 진지한 고민의 결과라고 봐야죠.

딴 : 김 후보님의 어떤 점을 보고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을까요?

김 : 제가 부산출신이고, YS계고, 열린우리당 시절에도 호남 인맥에 얹히지도 않고, 그렇다고 노무현 대통령에게 얹히지도 않고, 독자노선을 걸었던 것에 대한 인정이 아닐까 싶어요.

딴 : 그런 정도라면 몇 년 정계를 떠나있는 사람을 다시 불러 올리는 이유로는 좀 부족하지 않을까요? 뭔가 인간적인 교감은 없을까요?

김 : 인간적인 교감은 춘천에서 두 번 제가 욕해준 것 밖에 없죠.

딴 : 욕을 아주 제대로 하셨나 보네요.

욕을 두 번 하면, 야당 최고위원 자리가 생긴다. 역시 욕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며, 욕설신공을 좀 더 연마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욕 하는 건 몰라도 욕 먹는 건 내가 쫌 해봐서 아는데..

김 : 그 양반이야 저를 오랜 시간 보셨을 테니까, 주위에서의 평가도 많이 보셨다고 이야기 하십디다. 자기 가까운 사람들, 자기가 믿는 사람들이 추천을 많이 했다고 하시더라구요.

딴 : 그러면 그때 정계로 다시 돌아갈 준비가 돼 있으셨던 건가요?

김 : 그땐 안 돼 있었죠.

딴 : 그러면 갑자기 그렇게 일방적으로 지명을 당하신 것이군요. 민주당 최고위원이라는 지위가 그렇게 만만한 직은 아니지 않습니까? 현실적으로 제1 야당의 최고위층 자리인데,

김 : 근데 제가 당을 떠나기 전에도 직책은 최고위원이었어요. 그러니까 그 자리 자체에 대한 의미보다는 민주당을 과연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는데, 손대표가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혹시 부산에 출마할 생각은 없느냐? 이게 영입의 조건은 아닌데,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제가 그런 문제로 고민을 했던 것도 그 양반이 알아요. 2004년 총선부터 계속 요구를 받았거든.

딴 : 요구를 받았다는 건 부산으로 내려오라는 얘기였나요?

김 : 근데 그 때는 열린우리당 자체가 어떻게 될지 모를 때였거든요. 수도권에서의 전망이 불투명했어요.

딴 : 그렇죠. 모든 면에서 다 불투명했죠.

김 : 처음에 2003년 연말 시점에 조사를 해보니까. 수도권에 될 만한 데가 세 군데 밖에 없었어요. 서울에서. 수도권까지 쳐도 많이 해봐야 10개 정도?

딴 : 전국 다 해도 100개 안 되고?

김 : 현역의원 중심으로, 그때는 조사 나오는 게, 물론 더 올라가면 모르겠지만, 그때 당시로선 서울 3개 정도가 그나마 현역의원으로 승산이 있다. 그정도 밖에 안됐죠. 그러니까 부산에 요구를 받았을 땐 제가 정동영의장 비서실장을 했어요. 1월달 쯤에 가서 의논을 했더니 그땐 그래도 조금 더 상향 조정이 됐는데도 불구하고 ‘큰일날 소리다. 서울을 떠나면 안된다. 서울에서 이겨야지 전국적으로 내려가는 세력이 된다.’ 이랬던 거죠.

딴 : 당시엔 그말이 맞는 말이었죠?

김 : 이거 부산 가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확실히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서울을 떠나면 전략적 미스다. 라는 판단이 있었어요. 최고의원들 중에 내려가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요. 그래서 그때 포기를 했죠. 좀 미안하죠. 부산사람들한테, 또 그때 부산에 출마했던 사람들에게 미안하고, 초반엔 분위기가 좋아서 될 뻔 하다가 확 고꾸라져서 다 안되고 그러니까 미안했어요. 그러고 2010년 지방 선거 할 때 부산시장으로 선거하라는 권유를 받았어요.

딴 : 그때 김정길 장관 출마하기 전에.

김 : 예, 그 전에, 중앙당에서도 권유를 했고, ‘복당해서 부산시장으로 출마해달라.’ 내가 NO 그랬어요. 이유는 선거 임박해서 내가 부산 가서 시장을 해라? 이건 아니다. 국회의원은 국정을 다루는 일이니까.

딴 : 비록 국회의원을 지역구에서 선출을 하지만 사실은 국가 일을 하는 거고, 시장은 지역 일을 하는 건데.

김 : 그렇죠. 지역일인데, 내가 30년을 떠나있었는데, 몇 달만에 내가 부산시를 책임지겠다? 거기다가 죽어가는 부산을 내가 살릴 수 있다고 큰소리 치는 건 웃기는 이야기다.  그건 부산시민들에게 예의도 아니다. 그런 생각으로 거절 했어요. 1년만 시간이 더 있었으면 내가 1년 전부터 내려가 봐서 부산의 속살을 다 들여다보고 공부하고 육성을 다 들어서 내 것으로 만들어가면서 했으면 내가 나고 자랐던 동네니까, 1년만 시간이 있으면 그 작업을 할 수 있겠는데 지금은 불가능하다, 시민들이 내 진정성을 알아주지도 못할 거다, 이랬던 거죠.

딴 : 그건 맞는 선택이신 것 같습니다.

김 : 그래서 내가 놓아버리고 다른 분들이 경선을 하는 과정이었는데, 그렇게 계속 고민이 축적되는 과정이었죠, 부채가 축적되는 과정이었고, 그걸 손 대표가 대충 알고 계세요.

딴 : 술 드실 때 그 얘길 다 하셨나 보죠?

김 : 그랬죠. 그러니까 ‘부산에 가서 한 번 해봐라 했는데 조건은 아니다.’ 그 주문을 안 했으면 내가 안 했을 거 같아. 근데 그 주문을 하면서 ‘우리당 전국정당을 한 번 만들어 보자. 당신이 좀 앞장서달라, 광주사람들이 나를 대표로 만들었다.’ 손학규 대표 2010년 경선 때를 말하는거죠. ‘내가 정세균, 정동영 이 두 분에 비해서 조직도 약하고 돈도 없는 사람인데 내가 대표가 된 것은 광주 전남에서 밀어줬기 때문이다. 광주 전남사람들은 내가 민주당을 집권당으로 만들어주길 바랬던 거고, 그 작업을 소명받은 나로써는 당신하고 그 일을 같이 하고 싶은 거다. 그래서 내가 제안을 하는 거다.’ 라고 말할 때 내가 부산출마에 대해 그 때에는 확답을 안 했지만 속으로, ‘아, 이건 거부할 수 없는 숙명적 제안이구나,’ 하는 느낌이 딱 왔어요. 그래서 그 다음날 하겠다고 했죠.

딴 : 그렇게 해서 최고위원으로서의 역할을 하시다가, 꽤 일찍부터 그러니까 총선분위기 뜨기 한참 전부터 부산진에 내려오신 거네요? 언제부터 내려오셨습니까?

김 :  복당하면서 아예 부산 출마하겠습니다. 라고 발표를 해버렸어요. 그리고 출마해야 하니까 최고위원 하면서 처음에는 손대표가 전북으로 어디로, 그, 글마들 날치기 국회 하고 나서, 연말이 되자마자 몇 달은 전국 순회를 다녔죠.

딴 : 그때 상당히 강행군으로 다녔다는 얘기가 기억이 납니다.

김 : 장외집회를 하고 다니고, 전국 역이나 터미널 마다 가서 찌라시 돌리고 그랬죠. 그러면서 거의 부산을 못 내려왔고, 그리고 어느 정도 일단락 되고 나서는 일주일에 한 번쯤 짬 봐서 내려가서 준비를 했어요. 사람들 만나고, 출마할 지역도 고민하고, 그러다가 5월에 ‘부산진갑’을 빨리 해버려야겠다 싶었어요, 나도 딱 정해놔야지 부산도 자주 오고, 예비 작업들부터 시작해서 더 박차를 가할 수 있겠다 싶어서 빨리 결정을 해버렸어요. 부산 진갑으로 한다고 발표한 게 한 5월 중순쯤이었어요.

딴 : 작년 5월 중순이요? 여기서 마찰에 관한 문제가 있는데 부산에 기존에 있던 분들 조경태 의원 같은 경우도 그렇고 그분들은 자신이 전국 정당화, 영남 회복, 지명도 뭐 이런것들에 있어서 자신들이 더 적임자였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김 : 그렇죠. 그런 면에서 조경태 의원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고, 김정길 전 장관도 그렇게 생각을 했죠.

딴 : 근데 그게 사실은 특별히 정치적인 우선순위라는 게 고려되지 않은 상태에서 손학규 전 대표가 김후보님한테 갖고 있는 인간적인 관점, 자기 자신의 정치철학, 이라는 조금은 추상적인 이유로 선택이 되신 거란 말입니다. 그럼 그게 없었던, 손학규 전대표와 불행하게도 개인적인 인연이 없었던 두 분이 불만을 가지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 거에 대한 미안함, 죄책감은 없습니까?

김 : 그렇게 따지면, 섭섭하고 미안한 분들이 그분들 뿐이겠습니까? 부산만도 아니고 경남이나, 대구 경북이나. 영남권에서 관심 많은 분들이 여럿 있겠죠.

딴 : 그분들이 직접적으로 뭐라고 얘긴 안 하시죠?

김 : 나한테는 안 합니다. 안 하는데 손학규 대표한테 욕을 많이 했죠.

딴 : 그것 때문에 여쭤본 겁니다. 근데 제가 여쭤보면서도 뭐 어쩔 수 없는 문제 아닌가, 자리는 제한 되어있고 사람은 많고 해서 생기는 문제라고 보는 거죠. 근데 제가 여쭤보는 건 그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고 어떻게 봉합해 나가실 건지 하는 거죠.

김: 아니, 그 바로 직후에 제가 그분들을 다 찾아 뵈었어요. 김정길 장관도 찾아가고, 조경태의원도 방으로 찾아가서 이야기하고, 같이 잘해보자, 고 하니까 그분들도 나한테 개인적인 감정은 전혀 없다. 손대표한테 서운한 게 있어서 그런 거다 라고 해서 다 풀었어요. 굳이 제가 뭐 애써 같이 욕을 먹고 있을 이유가 없죠. (웃음)

낙동강의 상황

딴 : 약간 어색한 감정도 있을 수 있고, 그밖에 문재인 실장이나, 문성근이나 막 부산에 투입되어 가지고 낙동강벨트가 만들어지고 이러고 있는데 이 공동전선은 잘 형성이 되고 있습니까?

김 : 잘 안 되죠. 지금 친노그룹은 주로 낙동강 벨트 쪽에 포진해 있고, 최인호 위원장까지 포함해서 낙동강 벨트로 포진 되어 있고, 그 중심으로 부산 시당이나 친노 그룹의 핵심주력들이 다 올인하고 있는 셈이죠. 그리고 부산쪽 후보들은 아무래도 친노라고 하는 범주의 인사들이 많이 출마를 했고.

딴 : 정확히 말해서 친노는 아닌데, 친노라고 흔하게 불리우는 사람들 말씀이군요.

김 : 참여정부에서 같이 일했던 분들이 포진을 해있고, 그 중심으로 선거는 치러지고 있죠. 그런 면에서 저 같은 사람은 독립군이라고 할까 그렇습니다.

딴 : 벨트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김 : 그렇기도 하고 출신 성분도 그렇고, 여러 가지 면에서 독립군 역할을 하고 있지요.

딴 : 김정길 전장관하고 서로 연대하거나 하시는 게 있습니까?

김 : 아직까진 그런 게 없었어요.

이 인터뷰가 행해진 시점은 꽤 여러날 전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딴 : 각자 알아서?

김 : 지난주에 후보 확정이 됐으니까. 거긴 또 예비후보도 세 명이나 있었어요. 아직까진 공식으로 하기에 그랬고, 이제 같이 해야죠.

딴 : 거북할 수 있는 질문을 자꾸 드리는 이유는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민주당 전체만 보면 상당히 골치가 아픈 상황이고, 부산경남지역에서 민주당의 약진이 과연 성공할 수 있겠는가, 서로 색깔이 다른 사람들이 공동보조를 맞춰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 : 낼 수 있어요. 낼 수 있죠. 오히려 색깔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시너지라는 게 기대가 되는 거지, 색이 똑같은 사람들은 시너지라는 게 아예 없죠, 그런 면에서 저는 제가 친노 출신이 아니라는 게 같이 공동보조를 잘 맞추고 합심협력을 하면 시너지효과를 많이 만들어낼 수 있다고 봅니다.

딴 : 크게 어려운 점은 없습니까?

김 : 없습니다. 지금 문재인실장이나, 최인호 위원장이나 하고는 기본적으로 제가 과거에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비판하고 했었어도 그 핵심인사들이 저에 대해서 인간적인 불신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아요. 제가 제 사심으로 국회의원 또 한 번 더 해먹으려고 노무현대통령을 비판하거나 그러지 않았다는 걸 다 압니다, 그래서 조금 불편한 마음들이 있었지만 인간적인 측면에서 저 사람이 정말 당과 정부를 걱정해서 하는 소리다, 하는 정도는 인정을 하는 분들이기 때문에 전혀 거리낌이 없이 같이 대화하고 같이 협력하고 있습니다.

딴 : 알겠습니다. 지금 전반적인 현재예측, 현황은 어떻게 됩니까?

김 : 지역을 특징해서 말하긴 그렇지만 여섯 석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딴 : 이 인터뷰의 개념 자체가 “적지에 뛰어든 출마자들”이라는 겁니다. 본인도 사실은 적지에 뛰어드신 거라고 볼 수도 있거든요. 근데 제가 와서 자세히 듣고 나니까 적지에 뛰어드신 게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고향에 돌아오신 거고, 보통 적지에는 죽으려고 가는데, 당선되려고 오신 거잖아요. 당선되실 것 같습니다.

김 : 그렇죠. 전 당선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딴 : 그래서 크게 적지에 뛰어든 것 같은 분위기가 안 느껴지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김 : 전 80% 이상 있다고 봅니다. 지금 현재는 제가 좀 지고 있을 가능성도 있는데, 우선은 당 지지도가 여기는 50 대 20입니다. 한나라당이 50이 우리가 20. 그리고 역대선거결과를 죽 보면, 당 지지도보다는 우리가 조금씩 더 나오긴 하는데 부산진 갑구가 사상구보다는 한 4~5% 정도 더 한나라당 표가 많아요. 그만큼 노령인구가 많고, 외지인구가 적고, 젊은 노동자들이 부족하고, 그런 지역입니다. 그 대신 이 지역은 삼당합당 이전에 오래 야당 국회의원이 나왔던 지역입니다.

딴 : 20년 이전에? 그 기억들은 노년층이 가지고 있겠네요.

김 : 그렇죠. 이미 그 노년층은 한나라당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다른 의식이 조금 있어요. 통일민주당 했던 사람들, 그전에 신민당 했던 사람들의 의식이 또 따로 있어요. 그런 분들에게 제가 남으로 느껴지지 않는 경향이 있어요.

딴 : 일종의 추억을 불러 일깨우는 건가요? 그 작전이 먹히고 있습니까?

김 : 아직까지 미지수긴 한데 일단 저에 대한 거부감은 없어요.

딴 : 말도 못하게 하는 상황은 아니다?

김 : 다녀보면 ‘김 의원은 우리가 잘 알지, 예전에 김영삼 비서 했고 말이야, 나는 예전에 정재문 의원 시절에 거기 부위원장 했고’ 이런 식으로 7~80년대 이야길 해요. 그런 식으로 부딪히면서 공감이라고 할까? 한나라당 대 민주당의 구도가 아닌, 조금 다른, 공감표가 조금 있어요. 두 번째는 제가 이 지역에서 초, 중, 고를 다나왔거든요. 이게 뺑뺑이 세대의 장점입니다. 시험세대는 내 형만 하더라도 초등학교는 여기 나오고, 중고등학교는 시험봐서 저 멀리 부산중고등학교를 다녔어요. 그런 학교를 나왔으면 여기 사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뺑뺑이는 인접지역에 다 다니니까 초중고 동창생들이 여기 많아 살아요.

딴 : 굉장한 우군이 되겠네요.

김 : 그 사람들도 기존엔 한나라당을 많이 지지했겠지만, 그러나 이 지역이 20년 동안 한나라당이 일방적으로 독주하면서 공천만 주면 되는 게임이니까, 상대적으로 지역에 어떤 기반이 있고 연고가 있고 하는 걸 안 따졌단 말이죠.

딴 : 훌륭한 국회의원이 없었단 말이네요.

김 : 아니 훌륭하던 안 하던 간에, 우선 국회의원들이 계속 바뀌었고요. 그리고 그 후보들이 이 나와바… 이 영역의…

딴 : 나와바리라고 하셔도 됩니다.(웃음)

김 : 저쪽 영역, 저쪽 사람들이 여기 와서 국회의원하고 그런 사람들이 많았어요. 이 부산진 갑구 안에서 보면 내가 한 20년 만에 돌아온 장고가 되는 거지요.

딴 : 나름대로 동네의 인물인 거네요.

김 : 그렇죠. ‘우리동네 출신이야 걔!’ 이런 식으로, 다녀보면 정치에 관심 있는 청년들이 술먹고 하다가, ‘야, 그 아 우리 동네 아야’ 이런 식으로 말한다는 거지요. 아직도 이 동네 사람들 중에 정치 관심있는 사람들은 제가 서울 국회의원이고 서울 놈인데 여기에 낙하산 온 것처럼 문성근이 그랬듯이, 절마도 그런 놈이라고 아는 경우가 있어요.

딴 : 아직 진상을 모르는 사람들 인거죠.

김 : 그런 술자리에서, ‘야, 걔 임마 우리 동네 출신이야’, 그러면 ‘진짜로?’ 그래서 내가 다니면서 명함을 보고 명함 뒤에다가 그런 걸 써놨죠. ‘진짜네?’ 하는 그런 식의 공감이 좀 있습니다. 사상구보다 불리한 4~5% 정도는 그걸로 극복할 수 있겠다, 그래서 이래저래 표를 모아나가고 제가 쎄빠지게 쫓아다니면서 얼굴과 이름과 백그라운드를 다 알리고 그다음에 혼을 다해서 부산을 위해서 일하기 위해서 돌아왔습니다, 라고 주민들에게 호소를 하면 마음은 통할 거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딴 : 그래도 당선 가능성이 80%라는 건 약간 과장인 것 같은데요.

김 : 아니, 그런 믿음으로 선거를 해야죠.

딴 : 아니 그건, 후보자 본인께선 99%라고 믿으셔야 되는 거고, 일단 죽으러 오신 게 아닌 건 확실하네요. 당선될 가능성이 충분이 있다고 판단하고 오신 거네요.

김 : 처음 올 때는 반반은 된다고 생각하고 왔죠. 떨어져도 어차피 아까 이야기 했던, 제가 책임져야할 ‘3당 합당에 대한 보속이다.’  그런 의미에서 떨어져도 그건 내가 감수해야 하고, 제물을 바치는 셈이다. 라고 생각하고 왔죠.

딴 : 3당 합당 이야기가 나오고 그거에 대한 보속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에 지역감정이나 지역구도에 대한 질문은 별도로 안 드리는 걸로 하고요. 그걸로 3당 합당이 지역구도 형성에 미친 영향에 대한 이야기가 충분히 나왔다고 보니까요. 그 다음에 준비 했던건 민주당 당 중앙에 대한 시각, 지금 아주 급속도로 당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됐으며 해결책은 뭘까요?

이 시점은 야권연대도 잘 안되고, 공천 과정에서 잡음이 터져 나오면서 지지율이 급락하던 시점이었다. 따라서 대화의 내용이 기사가 발표될 시점하고는 맞지 않는 측면이 있음을 양해해 주셔야 하겠다.

김 : 제 기대보다는 훨씬 못해주고 있는 지도부입니다. 복귀했을 때는 그 면면이 굉장히 버라이어티 쇼를 보는 것처럼 화려했는데, ‘아 저 정도 팀이라면 잘 되겠다.’ 라고 생각했는데, 한명숙 대표가 팀웍을 잘 살리는 분이고, 화평의 지도자니까 저 팀을 잘 이끌어 가면 아주 잘 되겠다, 라고 생각은 한 거에요. 그런데 왜 이렇게 중심도 없고, 원칙도 없이 기득권을 지키는 정당인 것처럼 그렇게 되어 버리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딴 : 지금 지역에 신경쓰느라 아직 잘 파악을 못하신 거네요. 근데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르고 있습니다. 어디다 물어봐도 답이 안 나옵니다. 근데 무지하게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니까요. 도대체 왜 그럴까요?

김 : 그러니까요. (한숨) 그게 중앙당에서 잘 해줘도 여기선 힘든 싸움인데, 여기서 안 찍고 싶은 사람에게 핑계를 주는 계기란 말이지요. “당신들 말이야 공천 개혁도 못하고, 기득권이나 나눠먹고 말이야, 그따위로 하면서 무슨 부산을 가꾸겠다는 거냐?” (웃음) 아이거 참 갑갑한 노릇이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고,

딴 : 그 문제도 완전 일방적으로 피해를 보고 계시는 중이네요. 지역에서,

김 : 아 그래서 이걸 막 들이대고 박을 수도 없고, (딴 : 웃음) (한숨)

딴 : 대차게 한 번 박아보시죠. (웃음) 그게 들이 박는다고 해결이 되진 않을 거 아닙니까?

김 : 한명숙 대표라는 분이 참 착한 분이거든요.

딴 : 아 그거야 뭐 널리 알려져 있죠.

김 : 착하고, 다른 사람들 배려를 하고,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이런 분인데……

딴 : 오히려 너무 착해서 문제가 아니냐는..

김 : 그래서 문제가 되는 거 같아요. 이사람 저사람 입장을 다 헤아려 주다보니까,

딴 : 정작 엉뚱한 결론이 나오게 되는……

김 : 독할 땐 독하고, 자를 땐 잘라버려야 하는데, 그걸 못하시는 게 아닌가 싶어요.

딴 : 뭐 지금 정확한 문제의 원인을 잘 모르시니까, 대안까지 여쭤보는 건 무리가 있겠네요.

김 : 한명숙 대표가 좀 더 독해져야 되겠네요.

딴 : 강력한 리더십?

김 : 예, 그리고 인정과 구연에 연연하지 말고, 단호하게 원칙을 세우고 그 속에서 욕을 먹고 아픔이 있더라도, 속으로 눈물을 흘리더라도 딱 엄정하게 국민을 바라보고, 원칙을 세우는 그런 공천을 하고, 경선 붙일 곳은 붙여버리고, 이 시대에 맞지 않다 싶으면 아무리 원로고 당에 기여가 있어도 잘라 버리고, 죄송합니다 울면서 호소를 하더라도, 커트시켜주시고, 그런 지도력을 발휘해 주셔야지 당이 살지, 안 그러면 당이 이대로 가다가는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국민들 기대에 못 미치면서 총선도 패배로 귀결되는 그런 책임을 질 수 밖에 없지 않겠나 싶습니다.

딴 : 이 부분은 그대로 써 드리겠습니다.

김 : 예, 진짜 한명숙 누님에 대한 충언으로 꼭 좀 써 주십시오. 좀 독해지십쇼. 제발. 저도 그런 걸 참 못하는 사람인데, 독한 말 해야 할 때는 이를 악물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한 대표도 좀 그렇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결과적으로 민주당의 한명숙 대표는 이 부분에 있어서 그다지 성과를 올리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한명숙 대표는 야권연대를 성사시켜 냈다.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잘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딴 : 이건 좀 짧게 답해주세요. 총선에서 민주당이 상당한 성과를 올릴 거라는 건 누구나 예측을 하지 않습니까? 그게 얼마만한 성과냐가 문제인거지, 워낙 집권당, 정부가 못해왔기 때문에 상당부분 성과를 올릴 것 같은 데, 그 이후에 대선까지의 과정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김 : 저는 총선에서 이기고 지고 하는 기준이 우리가 그냥 선전하는 정도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딴 : 어지간히 선전해선 패배다?

김 : 예, 이런 분위기, MB정부에 대한 심판, 국민적인 심판의 분위기 속에서 그냥 선전해서 2당하는 거? 이것만으로는 절대 승리라고 말할 수 없죠, 1당이 되어야지 승리죠. 과반수는 못하더라도,

딴 : 아 과반수는 못하더라도 1당이 되어야 한다?

김 : 한나라당을 이겨야 승리를 하는 거죠.

딴 : 한나라당 보다 의석이 많아야 승리다?

김 : 그렇죠. 그런 승리는 수도권 압승과 함께 영남 지역, 특히 부산경남 지역에서 일정 균열을 이뤄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부산경남의 싸움이 중요한 거고, 그렇게 해서 1당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하는 것은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손님 실수로, MB가 워낙 잘못하니까 그 심판 여론 때문에 1당을 먹는, 이런 정도로 가면 전 대선 진다고 봅니다. 손님 실수가 아니라 실력으로 이겨야죠.

딴 : 근데 반대로, 총선을 너무 크게 이겨도 대선에 불리하다는 판단은?

김 : 크게 이기고 지고가 문제가 아니죠, 제가 말하는 것은 설령 총선에서 그런 식으로 1당이 못되더라도, 국민들 가슴속에 ‘아, 절마들 제대로 한다.’ 이 울림이 남게 되면 그걸로 우리는 대선에서 이길 수 있다고 봅니다.

딴 : 스스로의 힘으로 먹어야지 남의 덕으로 먹으면 아무소용이 없다?

김 : 손님 실수로 먹지 말고, ‘저놈들 정치를 제대로 하려고 하는구나. 아직은 서툴고 삐그덕 거리기도 하고 똥도 밟기도 하고 그러지만 저놈들이 진정을 가지고 아픈 국민들을 달래고 대변하는 역할을 하려고 몸부림을 치는구나.’ 그 공명을 주는 선거를 해야 되는 거죠.

딴 : 그러면 이기는 것이다?

김 : 그러면 져도 이기는 겁니다. 그 울림을 갖고서 설령 이번 선거에서 부산만 하더라도 국민들이 지역주의 갖고 또 돌아가서 1번 찍고 그런 일이 있더라도, 저는 그 울림이 남아 있으면 대선에서 이긴다라고 봅니다.

딴 : 그게 진짜 어려운 일이지요

김 : 그런데 그 울림이 전달되는 순간에 총선에서는 우린 무조건 압승합니다.

딴 : 당연히 그렇죠, 그 울림이 있는데,

김 : 지역주의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거지요. 그 힘이 부산의 서민들, 노동자들, 불안에 떠는 중산층들, ‘야 절마들이 진짜 우릴 시원하게 대변해주는구나, 대변하려고 애를 쓰는구나.’ 힘은 없어서 관철은 못시키지만 ‘기를 쓰는구나.’ 라고 딱 느낄 때 지역주의가 무너지는 거지, 그게 아니라 ‘이명박이 저거 아우~ 쫓아내야 되는데, 싶다가도 박근혜가 나타나면 그래, 니는 이명박이랑 다르지. 한 번 더해봐라.’ (웃음) ‘이명박이 정권하고 박근혜 정권은 다른 정권이야. 새누리당 정권은 한나라당하고는 다른 정권이야~ 새누리당이야.’ 그렇게 돼버리는 순간 우리는 망하는 거야.

딴 : 결론은 그거네요. 지금 이 타이밍에 민주당의 역할이 가장 중요한 거네요.

김 : 그렇죠.

딴 : 제대로 해야 한다?

김 : 예, 제대로 해야죠. 그게 공천에서 나타나야 되고, 공천에서 과거의 목소리가 아니라 지금 현재 고통 받는 우리 국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그런 후보들이 더 많이 공천돼야 하고, 또 그게 다양한 경로로, 공천 과정에서도 그렇고 당의 공약을 정하고 내 놓는 과정에서도 그렇고, 정해진 후보들이 지역에서 돌아다니면서 떠드는 목소리도  그게 다 실려야 되고, 온 체중으로 실려야지요. 영혼을 담아서. 선거 때 입바른 소리로 하는 약속 말고, 온 영혼을 담아서 그 아픔을 공감하면서 국민들에게 ‘우리가 하겠습니다.’ 해야 되는 거지. 그거 국민들이 알잖아요.

딴 :  그 차이점을 느끼죠. 항상 느끼죠.

김 : 그럴 때 이게 종합적으로 평가가 되어서, ‘그래, 니들 해봐라.’ 이렇게 되는 거지, 손님 실수인 척 하다가는, 그런 싸움은 한나라당이 더 잘합니다. 정치적 공학으로 뭘 잘 만들고 이런 거는 진짜 한나라당이 잘합니다. 민주당이 그걸 못 이겨내요.

이미 공천은 마무리 되었고, 공식 선거운동이 개시되었다. 민주당의 공천 과정은 낙제점이었으며, 야권연대의 과정 역시 지지부진했다. 아쉬운 점이다. 하지만 어찌되었든간에 사상 최강의 야권연대를 성사 시켰고 본격적인 싸움은 시작된 거다.

과연 야권은 정치인 김영춘의 기대대로, 전국의 유권자들, 특히 부산경남의 유권자들에게 “울림” 있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일까? 만약 이들이 실패한다면, 우리는 이명박근혜의 십 년 집권이라는 암울한 미래를 맞이하게 된다.

좀 잘하자, 씨바…

철새 김영춘

딴 : 약간 아픈 질문들이 될 수도 있는데요. 결국엔 사람들이 이걸 물어보고 싶어합니다. 한나라당에서 열린우리당으로 옮기셨었고, 열린우리당에서 창조한국당으로 가셨었고, 또 금방 민주당으로 옮기셨고, 이번에 민주당 총선에 나왔는데, 당선되면 국회의원으로 있다가, 상황이 또 바뀌면 다른 당 또 가실 거냐. 이거 멋지게 답변해 주세요.

김 : 어차피 이 지역에서 한나라당 후보나, 그 지지자들이 저를 공격하는 포인트가 그걸 겁니다. 근데 어떻게 설명해도 뭐 구구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한 마디로만 답변을 드리면 저는 그 당을 바꾸는 과정에서 단 한 번도 추운데서 따뜻한 곳으로 간 적은 없었어요. 따뜻한 곳에서 추운 곳으로 갔었습니다. 한나라당에서 나와 열린우리당을 만들 때, 다 ‘죽는 길이다. 정치인으로서 죽는 길이고, 당선도 무조건 안 된다.’ 모두가 그렇게 말리는 것을 억지로 무릅쓰고 탈당을 해서 나갔고, 열린우리당을 그만두고 괴로워서 창조한국당을 간 거는 갔다기보다는 잠시 광야행을 한 거였습니다. 창조한국당은 정말 안 들어가려고 했는데 문국현 후보뿐만 아니라 같이 모였던 수만 명의 당원들이, 좋은 당원들이 그때 많이 모였어요. 그 사람들은 순수한, 정말 순수한 자원봉사자들이었습니다. 이사회가 이렇게 가면 안 된다는 분노의 몸부림이었고, 그분들이 다 당신이 안 오면 캠프가 정리가 안 된다, 그 선거캠프라는 게 다 난형난제의 도토리 키재기 싸움을 하느라고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제가 갔을 때 보니까. 저는 원래 갔을 때 문 후보한테도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내가 자원봉사를 하겠습니다. 입당은 절대 안 합니다. 나는 당을 이번에 또 탈당을 했는데…’ 했어요. 그 탈당도 문 후보를 지지하기 위해서 탈당할 수 밖에 없었어요. 민주당에 있으면서 다른 당 후보를 지지할 수가 없잖아요. 그런 비겁한 짓이 어딨겠어요. ‘난 그 당은 전혀 들어가고 싶은 맘이 없다. 그러니 자원봉사만 하게 해주라,’ ‘OK’ 그렇게 약속하고 했는데, 나중에 며칠 만에 상황 정리가 도저히 안 되니까, ‘당신이 들어와서, 선거경험도 많으신 분이 이걸 정리 좀 해주쇼.’ 그래서 도와주려면 할 수 없이 이걸(입당) 해야 되는구나 싶어서 들어간 거죠.

딴 : 그 비용을 굉장히 비싸게 치른 거군요.

김 : 비싸게 치른 거죠.

김 : 그랬고, 그다음에 돌아오면서도 서울에서 제 옛날 지역구가 17년을 한 지역구입니다. 광진구가. 거기는 비교적 제 기반이 센 편입니다. 거기서 돌아오는 시점에서 이미 ‘민주당원으로 나가면 무조건 당선이다.’ 그런 이야길 많이 했죠. 그게 또 싫었어요.

딴 : 그러니까 이번엔 역시 또 추운 델 찾아가셨다?

김 : 그게 싫었고, 그때 당시로서는 민주당을 전국화, 진보화시키자고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 구조 안에 얹혀버리는 상태에서는 내가 민주당을 그렇게 만드는 데 큰 기여를 못 할 거라고 예상을 했고, 부산에서 출마를 하면서 그 목소리로 민주당을 견인해낼 수 있으면 견인해 내자, 그런 마음을 먹었고, 부산에 와서 출마한 것이 그런 면에서는 최소한 따뜻한 데로 간 건 아니겠죠. 민주당으로 돌아왔었어도 야인에서 돌아왔었어도 그런 의미에서 저는 항상 추운데로 찾아다니는 천연기념물 같은 철새다. (웃음)

딴 : 방향이 반대인 철새다?

김 : 반대 방향으로 찾아다니는 철새다.

딴 : 근데 그것만으로는 변명이 조금 부족하실 것 같아요. (웃음)

김 : 그러니까 저는 전혀 변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고요. 그때 그대의 선택이 저로서는 굉장히 절절하고, 내가 정치를 하면서 ‘이게 나한테 주어진 사명이다. 그 사명에 부응하는 길이다.’ 그런 마음으로 선택을 했어요. ‘여기서 꾸준히 정치적으로 재선, 3선, 하면서 그 안에서 기회를 엿보고 미래를 도모한다?’ 그런 생각은 추호도 해본 적이 없어요. ‘항상 이순간이 끝이다. 이 순간 내가 나한테 주어진 숙제를 제대로 해내느냐 못해내느냐가 내가 정치를 해야 될 이유고 정치인으로서 내 존재의 목적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선택을 항상 했었어요.

딴 : 제가 죽 들으면서 느낀 바로는,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정치적인 방황을 하신 것 같습니다.

김 : 그런 셈이죠. 방황이라기보다는 정말 제가 생각하는, 개인적인 견지에서는 좋은 정치를 만들고자 하는 그 실험과 도전을 유보없이 계속 해온 셈이죠.

딴 : 그 실험에 대한 욕심이 많으셨던 것 같습니다. 좀 더 큰 실험을 해보고 싶고,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고,

김 : 현실 정치인의 자세는 아니죠.

딴 : 근데 이제는 안정된 하나의 길을 가실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좀 듭니다.

김 : 안정된 길을 간다기보다는 이제는 한길을 계속 파야 된다는 생각입니다. 이제 나이도 50대가 됐고, 더 계속 노마드 같은, 유목민처럼, 그렇게 계속 실험하고 도전하고 하는 그런 길보다는, 그 길도 의미가 있습니다만, 그 길보다는 이제 한길에서 계속 깊이 파서 승부를 해야 될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딴 : 이제 정착민족이 되실 때가 된 거네요. 이 노마드 이야기를 어디 다른 매체에서 한 번 하셨던 것 같은데요? 제가 한 번 읽었던 기억이 나서 여쭤보는 겁니다.

김 : 예, 이제 노마드는 저 젊은 사람들에게 맡기고, 이 일도 한 우물 안에서 더 깊이 파내는 작업도 큰 의미가 있는 일이니까, 그 길을 가야죠. 부산에서 민주 통합당으로 그 길을 계속 파내려갈 생각입니다. 십 년 농사를 여기서 지어볼 생각입니다.

어찌되었거나 그는 여러 차례 당적을 바꾼 철새 정치인이다. 물론 철새 정치인의 왕, 이인제에 비하면 한참 못하긴 하지만 그렇다는 것은 현실이다. 김영삼을 돕기 시작하면서 민주당에 들어갔다가 3당합당의 물결에 휘말려 한나라당 소속이 되었고, 거기서 나와 열린우리당을 창당했으나 실패했고, 또 창조한국당이라는 찰나의 정치적 실험에도 동참했다가 결국 다시 민주당으로, 친정으로 돌아온 정치인이 된다.

결코 그의 이런 행보를 옹호하려는 생각은 없지만, 그 내막을 자세히 들어본 결과 자신의 이권을 좇아 이리저리 헤매이는 철새하고는 조금 다른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면에서는 그에게 닥쳐온 운명 속에서 정치적 방황을 통해 자신을 단련시켜온 과정이라고 보이기도 한다.

앞으로 또 다시 당적을 옮기지는 않겠다는 그의 약속이 지켜진다면, 그를 철새정치인이라고 비난하지는 말아야 할 것 같다.

마무리

딴 : 기대해 보겠습니다. 자 이제 거의 다 마무리가 됐고요. 시간도 한 5분 쯤 남았는데 그냥 하시고 싶은 말 하실 수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김 : 지금까지는 제 이야기, 또 우리 민주당에 대한 이야기,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국민들에게 꼭 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특 히 우리 부산시민들한테. 우리나라 국민들이 다 그렇지만 부산사람들이 참 착합니다. 착하고 정에 약하고 의리를 중시하고, 뭐 그렇죠. 근데 실속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 나라 정치가 국민에게 만날 욕을 먹는 이유가 그 착하고 정에 약한 그 정서 때문에 정치인들이 제대로 징벌되지 않고, 또 내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정치를 못 뽑아내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다고 봅니다. 징벌되지 않는다는 것은, 비리를 저질렀거나, 거짓말을 많이 하거나, 이런 정치인들이 그게 드러나고, 뽀록이 나도, 몇 년 지나면 또 금방 또 잊어버리고 돌아오잖아요.

정당에 대해서도 마찬가진데, 저 정당이 내 이해관계를 대변 하는가 못 하는가 그걸 잘 따져봐야 되는데, 그거보단 ‘우리가 남이가?’ 케쌌고 막 아유, 우리가 남인데, 진짜 남인데 ‘우리가 남이가?’ 그러고

딴 : 남이 아닌 줄 알어… (웃음)

김 : 우리 형제인줄 알고 찍어준다고, 완전 남인데. 그러고 찍어주면 그 다음은 부자 감세 해서 막 7~80조 감세해주고. 그러면 유권자 입장에서 보면 나 같은 서민, 나 같은 노동자, 나 같은 구멍가게 주인입장에서 볼 때는 나한테 돌아와야 될 혜택을 부자들에게 돌려주고 있는 그런 정부, 그런 정당을 지지한다고. 우리가 남이가~ 라는 말에 넘어가고 말입니다. 이게 얼마나 착하다 못해 어리석은 그런 성격이겠습니까? 제가 부산 돌아다니면서 많이 한 말이 ‘그물을 좀 째십쇼.’ 그러면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합니다. ‘어망 안에 잡힌 물고기한테는 미끼를 안 줍니다. 내가 낚시 밥이라도 던져서 잡을 욕심에 미끼를 달아주지, 그물 던져 잡았는데 왜 미끼를 던져줍니까. 자기 권리도 못 찾으면서 왜 그물 안에 갇혀있습니까? 째고 나와야지.’ 이런 이야길 합니다.

딴 : 재밌는 비유네요.

김 : 이 비유가 나 같은 먹물들은 잘 생각 못해내는 표현인데, 어떤 택시 기사분이 딱 한 마디 해 주시더라구요. “거 부산사람들은 뭐 어망 속에 잡힌 물고기 아잉교?” 그러시길래 “무슨 말입니꺼?” 했더니 “아 미끼도 못 읃어 묵으문서 맨날 거 좋다고 찍어 싼다 말이야” 하십디다.

딴 : 진짜 생활 속의 표현이네요.

김 : 그래서 내가 ‘아!’ 하고 느낀거죠. 많이 배워야 한다. 이 민중들한테. 그러면서 그 이야기를 전파를 하고 다닙니다. 부산 시민들이 그런 선택을 하시면 안 되죠. 민주당을 위해서 민주당을 찍어 달라는 게 아닙니다. 민주당도 모자라고, 미완성의 정당이죠. 잘못도 많이 하고요. 그러나 한나라당 점빵(가게), 민주당 점빵이 있으면 두 개 점빵을 경쟁을 자꾸 시키면 서로 더 잘하려고 경쟁을 하고 노력을 해서 혜택은 가게를 이용하는 시민이 혜택을 보는 거죠. 가게 하나만 계속 놓아 보십쇼. 뭐 물건은 비싼 거 갖다 놓고, 품질도 나쁘고, 부르는 게 값이고, 이렇게 되면 그 가게 주인이 동네에서 완전히 대장 노릇을 하는 건데, 동네 주민들이 주인인데, 그 주인 노릇을 못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가게 주인이 좀 못나보여도. 한 번은 이 가게 팔아주고, 한 번은 이 가게 팔아주면 그 가게의 질이 점점 좋아집니다. 그런 이치로 좀 못나 보여도 부산 시민들이, 그리고 우리나라 전국적으로도, 내 이익을 위해서 나를 대변하겠다고 애를 쓰고 더 노력하는 그런 정당과 정치인을 향해서 투표를 해주시면 정치 좋아집니다. 좋아지고, 우리나라 서민들, 다수 국민들이 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그런 세상도 만들 수 있습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 제가 부산에서도 돌아다녀 보면 젊은 유권자들 중에 정치에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근데 그게 아니거든요. 노인들은 투표를 많이 하시니까 정당들이 전부 노인 대책을 다 내놓고, 노인정도 지어주고, 노인 연금도 만들어주고 하지만 젊은 사람들이 투표를 안 하니까 20대 청년들, 무슨 대학생 반값등록금 문제다. 청년실업문제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노인대책만큼 그렇게 극성으로 일을 안 하거든요.

딴 : 부산에 인구가 지금 줄고 있죠?

김 : 많이 줄고 있습니다.

딴 : 그거 심각한 문제인데 왜 그런 이야기가 안나오고 있죠?

김 : 20년 동안에 50만 명이 줄었어요.

딴 : 그거 망해가는 레벨이네요?

김 : 예, 망해가고 있는, 죽어가는 도시입니다. 그 20년의 세월이 하필 제가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는 3당합당 이후로 한나라당이 1당 독점을 하면서 20년, 한나라당 그물 속의 20년인데, 그 그물속의 20년 동안 부산은 계속 50만 명이라는 인구가 줄고, 그전에는 찾아오는 도시였는데, 이제는 떠나는 도시가 돼버렸어요. 전국에서 7대 광역시 중에 노인인구 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가 부산입니다. 부산이 제 2의 도시라고 하면서도, 젊은 인구가 일자리를 찾아서 외지로 떠나기 때문에 신생아 출산율이 가장 낮은 도시입니다. 7대 광역시 중에서. 고용률이 전국에서 가장 낮습니다. 실업률이 가장 높은 도시 중 하납니다. 한 2~3위 안에 듭니다. 그 성적표를 부산 시민들이 아신다면 절대 한나라당에 투표하면 안 되죠. 민주당이 잘나서가 아니라, 이제 가게를 한 번 바꿔 주셔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민주당이 잘하면 계속 찍어주시고, 또 못한다 싶으면 한나라당 찍어주셔도 되는 거죠. 그러는 순간에 교훈이 생기는 거죠. ‘이제 어떤 놈도 자동으로 당선은 안 돼.’ 못하면 바뀐다. 그 순간에 부산이 변화의 용트림이 시작되는 겁니다. 부산 정치인들이 달라지고, 정당들이 더 부산을 향해서 추파를 더 던질 거고 더 노력을 하게 되겠죠. 그런 정치를 만들어 달라는 거죠.

특히 젊은 사람들이 투표에 대거 참여하게 되면, 한나라당이고 민주당이고 할 거 없이 화들짝 놀라서 젊은 사람들을 향한 구애의 작전에 돌입을 할 겁니다. 그게 실업문제도 풀어나가고, 좋은 정규직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내고, 대학생 등록금 문제도 많이 풀어내고, 청년 주거문제도 풀어낼 수 있는 첫 출발점입니다. 한 번의 투표로 문제가 다 해결되진 않죠. 그러나 그게 출발점입니다. 그렇게 투표 몇 번만 하고 나면 세상은 금방 ‘내가 이렇게 바꿨나?’ 싶을 정도로 뿌듯한 자부심으로 말할 수 있게끔 됩니다. 한 10년 세월이면 다 바꿔 낼 겁니다. 그런 투표해주시기를 꼭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딴 : 알겠습니다. 긴 시간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오늘 인터뷰를 모두 마치기로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김 : 고맙습니다.


이렇게 장시간의 인터뷰는 막을 내렸고, 우리는 나꼼수 부산 콘서트 현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영춘의 선거캠프는 나름 활기가 돌고 있었고, 그는 결코 “사지에 죽으러 온 정치인”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당선 가능성을 점치고 있었고, 취약점을 보완하며, 강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는 후보였다.

비록 정당 지지율은 50:20 으로 터무니 없이 뒤지고 있는 부산이지만, 그것도 부산진갑 이라는 힘든 지역구지만, 자신의 일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은 아, 이 사람이 뭔가 뜻한 바가 크게 있구나, 하는 느낌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과연 그의 예언대로 부산을 기점으로 3당합당 이래 20년 간 유지되어 온 고질적인 지역구도가 깨져나가기 시작하는, 거대한 빙산이 작은 금 한 개에서부터 붕괴해 내리는 모습을 보게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진짜 끝으로…

김영춘, 사진보다 실물이 낫다. 물론 나보다는 좀 못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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