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회군 –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 카~~ 라는 사람이 저렇게 말했다며. 아와 비아의 투쟁.. 이건 신사장 말고 단재 신채호 선생이 하신 말씀이고.. 두가지가 사실 “역사”라는 단어가 표현하는 의미들 중에서 다른 부분을 놓고 본거겠지. 카는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 역사 연구는 이렇게 하자, 뭐 이럴 때 역사를 얘기하는 거고, 단재는 연구대상으로써의 역사 말고, 실제로 이어지는 인간의 삶들이 모여서 만드는 거대한 흐름을 얘기한거고..

얼마전에 서울역 회군에 관해서 유시민이 해산파라는 주장을 여기서 봤고, 이게 뭔 개소린가 싶어서 보다 심도있게 알아봐야 겠다고 맘을 먹었어. 그리고 여기저기 연락도 해 보고 자료도 좀 찾아보고.. 그래봐야 생활인 주제에 뭐 직접적인 당사자들을 찾아가서 물어본다는 극단적인 방법까지는 동원할 수 없으니 그들이 썼던 글이나 회고를 모아본 것에 불과하겠지.

얘기를 풀기 전에 도대체 서울역 회군이 뭔가~ 아리까리한 젊은 딴지스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1980년 5월, 수십만의 대학생들이 참여한 거국적인 시위가 있었는데, 그 인파가 대부분 서울역 앞에 모여있었던 거야. 이 시위는 13일부터 산발적으로 시작되어 그 규모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15일이 되어서는 이제 정부 차원에서도 그냥 넘기기 힘든 규모의 인파로 불어났던 거지.

주장은 단순해. 18년간이나 철권통치를 해 오던 박정희도 죽었는데, 또 군바리가 정권을 잡아서야 되겠냐는 거였어.박정희가 죽자마자 잽싸게 12.12 사태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일당은 이 소리 들으면 참 짜증 났겠지. 세부적으로는 계엄령 해제, 학원 자유화 문제, 뭐 이런 것들이었고. 당시 학생들은 신군부가 선거제도를 바꿔서 정권을 장악하려고 한다고 믿고 있었던 것 같아. 대략 맞는 얘기였지.

그런데,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모인 인파는 4.19 때의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규모였어. 참가자들은 대부분 이대로 밀어 붙이면 제2의 419가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했었고. 반대로 일각에서는 신군부는 419때의 자유당 정권하고 다른 놈들이고, 공수부대 투입해서 무력 진압을 할 것이라고 걱정을 하고 있기도 했지. 대규모의 사상자가 발생할 거라는 예상 말야. 하여간 학생들이건 신군부건 서로 엄청 긴장하고 있던 상태라는 것은 확실해.

그 상황에서 이 시위를 주도하던 서울대 총학생회가 주축이 되어 소집한 전국 총학생회장 연합회가 임시로 열리고, 그 자리에서 시위대의 해산이 결정되는 거야. 참가한 중요인물들은 이수성(당시 서울대 학생처장), 이해찬, 김부겸, 심재철, 유시민 등등..신계륜은 이 회의에 참여하지 못하고 회의가 결론을 내린 후에 참석하게 된 거 같아. 하여간 그 회의의 결론을 심재철이 학생들에게 알리고, 시위대는 무력하게 해산했었지. 그 다음날, 이 문제를 놓고 다시 논의하기 위해 이대에 모인 학생회장들은 회의도 제대로 해 보기도 전에 무장한 경찰들이 진입해서 다수가 잡혀가고, 일부는 도망가고.. 그리고 그 다음날 5월 17일에는 신군부에 의해 전국적인 계엄령이 더 확대되고, 그리고 그 다음날은.. 광주야.

결국 이 시위대의 해산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무의미한 가정을 해보게 되는데, 다른 것들은 다 모르겠고, 혹시 광주의 피가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있었지 않겠냐는 것만 가지고도, 이 서울역 회군에 대한 아쉬움이 텍사스 소떼처럼 몰려오게 되는거지. 그런 의미에서, 과연 이 서울역 회군이 어떻게 결정되었고, 지금도 사회 곳곳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는 이 주역들이 이 회군 결정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지 확인해 볼 필요는 있어.

그래서 본론이 시작되는 거야.

확인된 사실은 이래.

이 회군결정이 내려지는 회의는 서울역 앞의 미니버스에서 있었어. 이 버스에는 아까 얘기했던 사람들이 타고 있었고. 신계륜은 당시 고대 학생회장이었는데, 남대문 근처에서 버스가 경찰들을 향해 돌진해서 사상자가 발생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현장을 확인하려고 남대문으로 가 있었던거야. 압도적인 숫자로 경찰의 저지선을 사이에 두고 경찰 병력을 위협하면서 시위대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갑자기 경찰들이 먼저, 학생들이 철수하기로 했다는 얘기를 시작한거야. 신계륜은 놀라서, 서울역으로 급히 돌아오게 되는거지. 그 친구들이 길을 열어주는 데도, 남대문에서 서울역까지 40분이 넘게 걸렸다니까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바글거렸는지 알만하지. 경찰 추산으로는 서울역 앞에 7만, 일반 추산은 15만 이상.. 이 정도라더군. (탄핵때에 비하면 별거 아니지? 근데 419때 길에 쏟아져 나온 학생수를 한번 알아보길 권해.)

그렇게 서울역에 도착하니까 미니버스안에서 사람들이 모여 있고 들어갔더니 이미 해산을 결정했더라는 거야. 그래서 반대를 했는데, 이미 내려진 결정을 뒤집기에는 힘이 달렸던 거지. 즉, 신계륜은 당시 회의 상황에 대해 직접적인 증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그럼 버스안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이수성은 서울대 교직원으로 내무부와 교섭도 하고, 어떻게 해서든 학생들을 보호하려고 그랬던 입장이야. 나쁘게 말하면 정부 끄나불. 그러면 찬반이 갈리는 것에서 이수성은 제외해야겠지. 당연히 해산을 종용하면서 학생들을 설득하던 입장일테니. 그러면 남은 것은 심재철, 이해찬, 유시민이야. 이해찬이 강경파로 철야 농성을 주장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다들 이견이 없는 것 같아. 내가 확인하고 싶었던 것도 심재철과 유시민의 입장일 뿐이지 이해찬이나 김부겸은 아니라고.

어떤 자료에서는 (신사장이 의존하고 있는 소모씨의 기사) 이해찬이 대표하는 복학생 진영은 강경파였고, 심재철이 대표하는 현역 총학 계열은 온건파 였는데, 유시민은 총학생회 안의 대의원회의 의장이었으니 온건파 맞다고 주장을 해. 또 다른 주장에 의하면(유시민 지지자들에 의해 좀더 알려져 있는)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온건파였고, 유시민은 강경파였다고 주장을 해. 어느 쪽이 맞을까?

이 회의에서 결정을 내리기 위한 판단을 하는데 가장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군개입설, 즉 군의 무장병력이 시위대를 무력진압할 것이라는 정보였어. 이 정보는 아무리 깡다구 쎈 학생 시위대라 해도 사실 살떨리는 정보지. 여차하면 수도없이 죽어 나갈 거라는 얘기거든. 이런 정보를 깔고, 이수성이 신현확 당시 총리와 직접 통화로 약속받은 무사 귀교 보장 이라는 조건까지 나온다면 어떨까? 어지간한 독종들 아니라면, 이 정도면 우리의 힘을 보여 줬으니 이 쯤에서 해산하는 게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거 아닌가? 하여간 이 정보가 회의에 전달된 과정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어. 하나는 심재철이 직접 누군가(?)에게서 연락을 받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수성에게 전달된 정보가 유시민을 통해 전달되었다는 설이 있어. 심재철은 차후에 조사 과정에서 자신이 직접 누군가에게 연락 받았다는 것을 시인하긴 하는데.. 당시 조사야 뭐 일단 패고 지지는 게 기본이니까..

이후 심재철은 회의의 결과를 버스위에 올라가 군중들에게 목청높여 얘기를 했어. 심재철 본인의 의사가 어땠을지는 몰라도, 그는 그 회의를 주재하는 대표 격이었고,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입장에 있었던 것은 분명해. 그리고 현재 서울역 회군을 아쉬워 하는 모든 사람들의 욕을 지속적으로 먹고 있어. 특히나 그가 한나라당에 들어가 뻘짓을 일삼고 있으니 더 욕을 먹는거지. 내 저놈은 그 때 부터 저럴 줄 알았어~ 뭐 이런 욕말야. 거기다가, 무슨 인터넷 상에서 뻘짓하다 들킨 적도 있지 아마? 그리고 그 사건 이후 심재철은 잡혀가서 재판을 받고, 그 재판 과정에서도 나약한 모습을 보여서 이해찬을 황당하게 만들기도 해. 그리고 군대를 가게 되는 거지.

신계륜의 경우는 이래. 그렇게 해산 결정이 내려진 뒤에 사람들은 하나둘씩 흩어져 가고, 주로 고대생들과 동덕여대생들이 끝까지 남아 있었던 모양이야. 철야 시위는 힘들어졌고, 학교로 돌아가야 할텐데 서울역에서 고대는 좀 멀지. 가던 길에 내무부 장관이 보장한 안전귀교 약속은 무산되고 시청앞에서 과격하게 진압을 당하게 되는거야. 물론 정부측에서는 시내 중심가로 시가행진은 하지 말것을 요구했었는데 그걸 안 지켜서 진압했다고 하고 있지. 이 과정에서 신계륜은 지속적으로 강경한 태도를 보이게 되는거야. 이 와중에서 서울역 앞에서 끝까지 남아 있었는데, 신계륜이 나타나서 자신들을 구해줬다는 얘기를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었어. 물론 여학생이야. 조낸 멋있었겠지~

유시민의 경우를 보려면, 며칠전부터 이어지는 상황을 좀 볼 필요가 있어. 한홍구가 쓴 글에서 그 내용이 나오는데, 유시민은 이미 이 며칠전에 서울대에서 농성을 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제보(군이 진압하러 올 것이라는)를 받고 학생들을 해산시킨 전력이 있어. 그 때 학생들을 다 돌려 보내고나서 유시민은 다음날 아침 잘못된 정보로 학생들을 회군시킨 것에 대해 돌아다니면서 사과를 해야 했어. 조낸 뻘쭘했겠지. 그리고 서울역 회군이 있었고, 이어지는 5월 17일 밤, 전국의 비상계엄령이 살벌하게 확대되는 거지. 이 밤, 한홍구의 증언에 따르면 유시민은 동료들을 모두 보내놓고 서울대 교정에 홀로 남아 학교를 지키게 되는거야. 이 행동은 확실하게 사실인 것 같아. 한홍구는 이 얘기를 매우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묘사를 하고 있다고.

한가지 참고할 만한 정보가 있는데, 트위터에서 검색된 내용이야. 누군가가 정태인에게 직접 들었는데, 유시민이 당시 자신도 회군을 주장했다고 고백을 했다는 거지. 그런데 이거, 쉽게 받아들이기 뭐한 부분이 있어. 정태인은 이 얘기를 하는 시점이 이미 유시민과 관계가 매우 껄끄러워진 상태였거든.

그렇다면 유시민의 당시 입장은 실제로 어땠을까?

이제부터는 추정으로 들어가는 거야. 일단 유시민 지지자들이 당시 유시민이 강경파였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는 것은 아마도 유시민 본인이나 아주 가까운 사람이 발설을 했기 때문일거야. 그런 뉘앙스의 얘기를 말야. 유시민이 회군파였다는 소모씨의 주장은 상당히 애매해. 유시민이 직접 회군을 주장했다~ 라는 식이 아니라, 유시민은 이해찬으로 대표되는 복학생파가 강경파였던 것에 비해, 심재철로 대표되는 온건파 현역 총학생회에 소속되었으니 온건파였다는 식이라는 거지. 그런데 정태인은 또 유시민 본인이 서울역 회군에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고백을 했다는 거야.

그런데 회군 전후의 유시민의 행동을 살펴보면, 며칠전에 한번 군의 진입에 대한 정보에 속아 학생들을 해산시키고 뻘쭘했던 기억이 있어. 그리고 회군 이후에는 전국에 계엄령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학교를 혼자 남아 지킬 정도로 독한 모습을 보여. 이 행동은 서울역 회군 자체를 몹시 후회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해석할 수 있지.

이 상황에서 유시민의 고민은 이거였을거야. 신군부의 의도를 저지해야 한다는 명분과 학생들의 피해를 줄이고 싶다는 현실과의 갈등인거지. 이 갈등은 물론 유시민뿐 아니라 그 회의에 참여한 모든 사람(아마도 이수성은 제외)이 겪은 갈등일거야.

그런데 그런 갈등과 함께 유시민의 의도와 책임은 양립하고 있게 된다는 거야. 유시민이 회군을 주장하고 총학의 결정에 따랐을 수도 있지만, 회군을 반대하고서도 총학의 결정을 따르기 위해 노력했을 수도 있어. 어찌했거나 결정이 난 뒤에 유시민은 그 결정에 전적으로 승복하고 따랐으니까. 그 결정 자체를 거부한 사람은 신계륜 뿐이거든. 심지어 이해찬도 그 결정을 어찌하지 못하고 같이 해산했다는 거야. 그렇다면, 신계륜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그 결정에 대해 공동의 책임이 있다는 거지. 최소한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되는 상황을 막지 못했다는 책임. 유시민은 이 책임을 느끼고 있는게 아닐까? 그래서 정태인한테 자신의 책임에 대한 고백을 한 거 아니었을까?

솔직히 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될 수 있어.

이번 선거에서 유시민이 낙방하고 백면서생으로 돌아온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물어보면 되는거야. 너 그 때 뭐라고 주장했냐? 그러면 유시민은 부담없이 대답하겠지. 인터뷰할 기회가 있어도 좋고, 같이 소주 한잔 먹으면서 물어봐도 되겠지.

그런데 만약 유시민이 도지사가 되고, 또 그다음에 뭐가 되고 그러면 이 질문은 먼 훗날로 미뤄지게 될꺼야. 현역 정치인에게 이런 질문은 무척이나 부담되는 질문이니까. 여차하면 나중에 늙어서 자서전에나 쓰게 될 수도 있겠지. 그래봤자, 그건 또 유시민 혼자의 얘기일 뿐이야. 이해찬이나 김부겸한테 크로스 체크라도 해 봐야 되겠지. 심재철한테는 확인하기 힘들거야. 이 문제로 워낙에 욕을 먹었으니 답할 기분이나 나겠어?

그러니 이 질문은 답이 없어. 최소한 내가 원하는 정확도를 가진 답은 구하기 힘들어.

이거.. 딴지일보가 계속되고 언젠가 유시민한테 이 문제를 부담없이 물어볼 시점이 될 때까지 결론을 유보하는 걸로 남겨둘 생각이야. 혹시 그 전에라도 내 개인적으로라도 이 질문에 대한 확실한 답을 구하게 되면 알려줄 것을 약속할께.

이건 뭐.. 길기만 하고 영양가 하나도 없는 글이네. 그래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범위내에서는 최대한의 정확도를 찾고자 하는 내 습성에 의한 뻘짓의 기록이라고 봐주길 바래.

근데 진짜 타임 머신이 있다면 당시 서울역 앞에 서 있던 미니버스 속에 한번 들어가 보고 싶네. 지금 와서 쟁쟁한 현실 정치인들의 당시 풋풋하고 촌스러운 페이스도 확인해 볼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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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쓸 당시에.. 전화를 무척 많이 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통화를 할 수 있는 사람들 중에서 당시의 정황을 직접 겪거나 믿을만하게 들었던 사람들은 거의 전부 다 통화를 해 본 것 같다. 물론 내 자신이 저 유명한 서울역 회군이 벌어진 시점에 나이가 좀 되었더라면, 좀더 자세한 정황을 알 수도 있었겠지만 애석하게도 난 그 때 겨우 중1이었다.

갑자기 “맨 프롬 어스”라는 영화의 주인공이 부러워졌다. (참고로 그 영화의 주인공은 영원히 사는 사람이었다고..)

그러면서도, 역사적 사건이 벌어지는 현장에 같이 했던 사람들조차, 실체적 진실을 알 수는 없고 기껏해야 당시 옆에 있던 또 하나의 개인 관찰자의 입장밖에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접하면서 정말로 역사란 무엇인가, 과연 역사가 우리에게 얘기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심각한 고민까지 해 보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결국 난 정확한 답을 구하지 못했다.

위에도 얘기가 나왔지만 이 질문의 핵심은 유시민이라는 현직 정치인의 당시 입장이라는 단순한 것이었지만 그 진실을 알 방법이 없었다는 얘기다. 심지어 내가 유시민에게 진지하고 솔직하게 물어봤다 하더라도,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동시에 설득할 수 있는 답변을 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당사자의 말이라 해도, 아니 당사자의 말이기 때문에 더욱 더 신뢰하기 힘든 경우도 많이 있는 법이거든.

그러다 보니 오히려..

실제로 당시에 유시민이 해산을 주장하거나 혹은 그 반대였다 하더라도 그건 또 무슨 의미가 있겠나.. 하는 기묘한 생각까지 들고 말았던 기억도 있다.

과연 역사적 진실이라는 것은 어떤 형태인걸까?

심지어 내가 겪었던 일 들도 겨우 일이십년 후에는 이런 흐린 기억속의 역사로 시간속에 묻혀가게 되는 거 아닌가..

뭔가 굉장히 슬프다.

I’ve seen things you people wouldn’t believe. Attack ships on fire off the shoulder of Orion. I watched C-beams glitter in the dark near the Tannhouser gates. All those moments will be lost in time, like tears in rain. Time to die.

당신들이 믿지도 못할 광경을 보아 왔어.
오리온의 어깨위로 불타는 전함.
탄호이저 게이트를 밝히는 C-빔의 명멸도 보았고.
그 모든 순간들은 사라져 가겠지.
마치 이 빗속의 눈물처럼..
죽어야 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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