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집의 추억

 

 

종가집

종가집이라는 말은 이제와서는 김치나 각종 장류 등의 음식을 판매하는 기업의 브랜드로 오히려 더 유명한 말이 되고 말았지만, 한 시대 이전만 해도 무척이나 많은 사람들에게 복잡 미묘한 감정을 주는 어휘였고, 어느 정도 연령대 이상의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추억으로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일단 종가집이라는 말이 원래의 의미대로 쓰이려면 같은 성씨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집성촌이 있어야 한다. 굳이 집성촌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문중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고, 그 문중에 속한 사람들이 이런 저런 행사를 하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모여야 한다. 그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바로 종가집이며, 그 문중 사람들이 모여서 대소사를 치를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는 사람들이 바로 종가집의 종손들인 것이다.

보통 종가집은 이렇게 생겼다.
보통 종가집은 이렇게 생겼다.

 

 

종손은 언제나 애틋하다

종가집은 기본적으로 종손이 사는 집을 말한다. 종손이라 함은 문중 안에서 장손, 즉 큰아들에게 승계되는 문중을 대표할 수 있는 일종의 자격이다. 즉, 종가집은 몇 대째 계속 큰아들로 이어져 내려온 가정이다. 종가집이라는 것을 이렇게 이해해 본다면 왜 종손이 언제나 애틋한 감정을 유발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큰아들은 제일 먼저 태어난다. 예전에 나이 스물이 되면 결혼하고 아이를 낳던 것을 생각한다면, 종가집에서의 1대는 짧으면 20년, 길어야 30년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둘째아들, 막내아들 등은 그렇게 대가 빨리 바뀌지 않는다. 이게 몇 대째 지속되면 종손은 다른 집안에 비해 항렬이 훨씬 낮아지게 된다. 실제로 어떤 집안의 종손이 나와 비슷한 또래라면 십중팔구 그는 내 조카뻘이거나 심한 경우 손자뻘인 경우가 생긴다는 것이다. 역사가 오래된 종가라면 동년배끼리 증손자 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단지 이런 호칭관계, 항렬의 높고 낮음만으로 종손이 애틋하게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종가집은 언제나 일이 많다. 종손으로 태어난 다는 것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거의 대부분 하지 못하게 됨을 의미하기도 했다. 한 달이 멀다하고 이어지는 문중의 대소사를 항상 도맡아 주최해야 하고 그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뒷감당을 다 해야 하는 종손, 그리고 그 사람들의 먹거리, 잠자리를 다 보살펴야 하는 종가집의 며느리라는 존재는 그야말로 일복이 타고났다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이다.

물론 문중에서는 언제나 이런 종손, 종가집을 위해 경제적인 지원을 한다. 선산도 종손의 관리 하에 들어가고 문중 소유의 농토는 대부분 종가집의 관할이다. 그런 재산들이 풍족하기만 하다면야 종가집의 종손 노릇도 할 만 하다. 철마다 수확이 들어오고, 다양한 문중 재산에서 수익이 발생하고 있다면 종가집은 생계 걱정 없이 문중의 뒷바라지만 충실히 하면 되니까 말이다. 그러나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그런 풍족한 재산을 누리는 권세있는 문중들이 대부분 몰락하고 그 많았던 옥토들은 대부분 도시화 과정에서 사라지기 일쑤였다. 그리고 종가집은 제대로 된 벌이도 없이 문중 어르신들의 대소사를 뒷바라지해야 하는 피곤한 입장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고 자신의 입장만 생각해서 문중 일을 나 몰라라 해버릴 수도 없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힘든 임무는 언제나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든다. 그렇게 힘든 상황이면서도 모여든 문중 어르신들에게 힘든 내색도 하지 못하고 웃는 낯으로 접대를 해야 하는 종손들, 그런 종손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길에는 언제나 애틋함이 담겨 있기 마련이었다.

 

추억 속의 종가집

우리 집안도 그리 작지 않은 문중에 속한 집안이었다. 일제 때 증조할아버지께서 집안을 이끌고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신 탓에 문중이 자리 잡은 곳에서는 멀어졌어도 지속적으로 문중의 대소사에는 모두 다 참여하고 있던 그런 집안이었다.

아버님의 손에 이끌려 문중 종가집에 가곤 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에 의하면, 이제 겨우 열 몇 살 이었던 나에 비해 나와 항렬이 같은 종손들은 머리가 허옇게 센 노인들이었고, 종가집에 살던 어린 종손들,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은 내 손자뻘이었다. 심지어 내 조카뻘의 종손들은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던 사람들이었고, 그런 중년들이 나에게 아재라고 부르는 상황이 너무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곤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분들은 나를 꼬마아저씨라고 불렀던 기억이 난다.

내가 속해 있던 문중은 그리 사정이 좋지 않은 편이었다. 꽤 많았던 문중의 재산은 거의 다 사라져 버렸고, 남았다고 해 봐야 가치가 별로 없는 쓸모없는 선산과 구석진 농토 약간 뿐이었다. 재산들이 사라져간 과정에 대해서도 문중의 어르신들은 쉬쉬 하긴 했지만 종가집 종손들의 책임이 있었던 것 같다. 어떤 집안이나 일정한 비율로 태어나는 말썽꾼들이 팔아먹기도 했을 것이고, 도로로 편입되거나 강제로 수용되어 푼돈으로 변해 사라지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종가집의 가세는 기울었고 행색은 남루해져갔다.

다른 집안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너도나도 열심히 살고는 있지만 문중에 큰 도움이 될 정도로 재력을 가진 경우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대한민국 사회 전체가 가난하고 힘든 시절이었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던 것 같다. 어르신들은 모여서 영화로웠던 과거를 회상하며 현실을 개탄하곤 했지만 그런다고 사정이 좋아질 리는 없었다.

힘든 것은 종손들이었다. 먹고 살기도 힘들고 아이들 교육비도 부족한 상태에서 문중의 대소사는 왜 그리 자주 돌아오는지, 가끔가다가 한 번씩 참여하는 사람들이야 그런가보다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을 감당해야 하는 종가집의 가족들은 힘들고 지칠만도 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문중 어르신들에게 내 보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저 묵묵히 제사상에 올라갈 음식들을 준비하고 모여든 문중 사람들에게 깨끗한 잠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바삐 움직일 뿐이었다.

결국 급속도로 산업화 되어가는 도시의 한 구석에서 무너져 가는 과거의 권위와 영광의 끝자락을 붙들고 현실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사람들이 종손들이었고, 그들의 고단함 속에는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슬픔이 배어 있었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나에게도 그 변화의 흐름이 때로는 고색창연하게, 또 때로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뭔가 설명하기 힘든 애틋한 슬픔이 깃든 그런 모습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그게 바로 변화의 향기였던 것 같기도 하다.

 

교차되는 과거와 현재

중국에서는 6조 시대부터 시작해서 송이나 원 시절에 이르러서는 가문의 계보를 정리하는 일이 아주 성행했다고 한다. 이를 모방하여 한반도에서도 가문의 역사를 기록하고 관리하는 일이 시작되었고, 고려 때부터 명문세가를 중심으로 족보를 기록했다고 한다. 일반 가정에서 족보를 기록하는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나 시작되었고, 15세기에 들어서면서 한 집안 수준이 아니라 같은 성씨의 포괄적인 역사가 기록되는 수준으로 발전해서 1423년에는 문화유씨 가문의 족보인 “영락보”가 발간되는 등 보학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수많은 가문들이 자신들의 족보를 경쟁적으로 발간하기에 이르렀고, 이 족보는 하나의 문벌 개념으로 정립되어 관직에 진출하는 경우에 필수적인 조건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신분제의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한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부터는 돈으로 족보를 사고파는 일이 성행했고, 특히 구한말에 들어서는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은 자신의 출신을 미화하기 위하여 유명한 가문의 족보를 사거나 자신의 집안을 그런 세도 있는 문중에 편입시키는 일도 흔했다고 한다.

결국 문중의 개념이나 그 문중의 계보를 정리한 족보라는 존재 역시 자신들의 사회적인 세력을 상징하는 하나의 장식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모든 문화적인 현상이 그렇듯이 이렇게 가문을 중시하는 흐름 또한 양면성이 있었다. 가문의 명예를 위하여 품위를 갖추려고 노력을 하고, 학문에 힘을 쓰며 도덕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는가 하면, 문중의 권위를 빌어 다른 사람을 멸시하며 억압하고 관직을 세습하는 등 부작용도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러니 한 것은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할 때 가장 강력하게 저항한 사람들 중의 상당수가 문중에 충실하고 족보를 귀하게 여기던 양반들이었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들은 나라를 빼앗아 간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발로 창씨개명을 거부했다기 보다는 문중의 명예를 더 중히 여겨 성씨를 바꿀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무서운 일제에 저항할 정도로 문중을 중시했다는 것이니 그 사람들이 얼마나 가문과 족보를 귀하게 여겼는지 이해가 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소중했던 가치들 역시 역사의 흐름 앞에서는 빛이 바래기 마련이다. 해방 이후 산업화, 도시화가 진행되고 농업이 뒷전으로 밀리기 시작하면서 대가족제도는 붕괴하고 핵가족, 나아가 독신자들이 증가하는 식으로 사회는 변하기 시작했다. 문중이라면 소속감과 긍지 이전에 귀찮고 고리타분한 것이라는 생각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수 십 명씩 모여서 시제를 지내는 것은 실용적이지 못한 과거의 관습이라고 간주되기 시작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보학은 역사학자들이나 연구하는 골동품 같은 것으로 전락했다.

그렇게 사회는 변해가는 것이고, 지금도 무섭게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살아남는 것은 무엇인가

변화는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그 흐름에 몸을 맡겨서는 안 된다. 족보나 따지고 앉아있는 것이 고리타분한 일이라고 해서 과거의 선조들이 보여줬던 문중에 대한 긍지, 그 긍지와 명예를 지키기 위한 숭고한 노력들, 불의를 용납하지 않던 매운 정신들까지 함께 버려서는 안 된다. 문중의 명예를 위해 고생을 감내하던 종가집 종손들의 희생정신 역시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이유로 모른 체 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것들이다.

이제는 하나의 상징으로만 남아있는 종가집이라는 말도 상업적인 전통음식 브랜드로만 써먹기에는 뭔가 아쉽다. 거기에 얽혀있는 수많은 애틋한 추억과 고향에 대한 기억들 역시 소중한 감성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라져 가는 것들을 무조건 붙잡고 아쉬워하자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 그러나 그 변화의 흐름에 의해 버려지는 것들 중에 시대를 뛰어넘어 우리의 정신세계를 풍족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가치들이 함께 섞여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자는 것이다.

그런 소중한 것들을 되살려내어 우리의 후손들에게 전해 주는 것이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아주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는 것이다.

 

 

(* 이 글은 “웰니스 전북”에 기고한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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