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지지 않는 사회 – 그것은 알기싫다 대본

 

(* 이 글은 어제, 2014년 4월 26일 토요일, 딴지일보 벙커원에서 있었던 “그것은 알기싫다” 공개방송을 하기 위해 준비했던 대본입니다. 물론 편집되어 팟캐스트 방송으로 공개되겠지만, 여러분들께 보여 드리고 싶어 올립니다. *)

 

 

참으로 끔찍한 사고가 벌어졌다. 이번 사고가 터지고, 그 수습과정을 지켜보면서 울어본 분 계시는가? 아니 한 번도 안 울었던 분이 계시는가?

슬플 때에는 좀 울어도 된다. 우리 사회는 이상하게, 특히 남자들에게 우는 것은 창피하고 부끄러운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남자는 일생에 세 번만 울어야 된다는 둥 하는 소리가 있을 정도다. 하지만 운다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생산적인 신체반응이다. 나는 그것을 매우 뒤늦게 깨달았는데, 슬플 때에는 마음껏 운다. 일부러라도 더 눈물 흘리기 좋은 상황을 만들어 두고 흐느끼면서 울고 나면 마음이 안정되고 가벼워진다. 놀라운 신체 반응이며, 울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잘 울 줄 아는 것도 지혜이다.

그렇다고 막 아무데서나 엉엉 울고 다니면 좀 곤란하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울린 이번 사건, 도대체 왜 생긴 것일까? 누가 잘못한 것이고, 누가 책임을 져야 할까? 이 자리에까지 온 분들은 대략 무엇이 잘못되어 이런 사고가 터졌고, 또 이미 터진 사고를 왜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해서 구할 수 있었던 사람들을 하나도 못 구하고 그러는지 어지간히는 다들 아실 것이다.

그런데..

여기도 잘못되고 저기도 잘못되고, 해운회사도 잘못했고, 해운항만청도 잘못했고, 해경도 잘못했고, 장관도 잘못했고, 최종적으로 대통령도 잘못했다고 해 두자. 사전에 안전조치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사고가 터진 뒤의 긴급한 상황의 대처도 아주 엉망이었다고 하자. 그런 상황에서 비극에 빠져 울고 있지만 말고, 과연 이 상황을 어떻게 고쳐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해 봐야 한다.

물론 지금 이순간에도 실종자들이 남아 있다. 희망고문일 수도 있겠지만, 실낱 같은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다. 그렇게 큰 배의 내부에는 어떤 형태로든지 무슨 일이든지 생길 수가 있다. 그리고 희생자와 그 가족들은 큰 슬픔을 겪고 있고, 그 슬픔에 공감하며 같이 슬퍼해주고 위로를 해 주는 것, 그리고 그 상처를 치료할 방안을 만들어 주는 것이 급선무라는 점도 잘 알고 있다. 그건 또 그것 대로 고민해야 하고, 다 함께 치유를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 물론 스스로를 치유 하기 위한 노력도 빠트려서는 안 된다. 스트레스와 슬픔은 사람의 건강을 해친다. 우리 모두가 피해자인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 우리의 일을 해야 한다. 우리의 일이라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여러분께 해 드려야 한다는 것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것은 그야말로 “알기 싫은 이야기”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도 얘기했듯이, Show must go on 의 정신에 입각해서 냉정하게 사태를 분석해 보고, 과연 이런 끔찍한 비극이 다시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떤 변화가 필요한가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볼 생각이다. 같이 가보자.

그 얘기의 핵심 단어는 바로 “책임” 이다.

 

책임 진다는 것의 의미

책임은 언제 지는가? 뭔가를 잘못했을 때, 해야 할 일을 안 했을 때 책임을 져야 한다.

참고로 잠시 옆으로 새자면, 뭔가를 안 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참 조심해야 한다. 공무원들 같이 뭔가를 하도록 임무가 설정된 상황에서 그 임무를 안 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건 책임져야 할 잘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선택 가능한 일을 안 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조금 무리가 따르게 된다. 사람이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평소에 이걸 좀 잘 구분해주셨으면 한다.

다시 돌아와서, 그렇게 뭔가를 잘못했을 때, 책임을 지게 되는데 과연 이 책임이라는 것은 어떻게 지는 것이 적절한 것일까? 또 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일까? 책임과 처벌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그리고 이 책임을 진다는 것이 사회적으로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고 책임을 안지게 되면 어떤 사회적인 손실이 발생하는가? 이런 것들을 따져 보자는 것이다.

그냥 으레 그러려니 하면서 책임을 지라고 요구하거나,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비난을 하거나 하는 행동은 좀 근성이 부족한 것 아닌가 말이다. 딴지에서는 이렇게 바닥까지 디벼보는 정신을 전문용어로 뽕빨정신이라 칭하면서 선사시대부터 권장을 해 왔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면, 사전과 사후로 나뉘고, 사후는 또 세가지 단계를 거쳐야 한다.

사전 단계에서의 책임이라는 것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끝까지 완수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을 절대 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것이 책임진다는 의미의 시작이다. 그러나 세상 일이 언제나 마음처럼 되지는 않는다. 이 사전단계의 책임이 실패했을 때, 사후 단계의 책임 문제로 넘어가야 한다.

사후 단계의 첫 번째는 사실에 대한 인정이다. 기왕에 내가 사전단계의 책임을 지지 못하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데, 그 일에 관련되어 내가 잘못을 했다, 즉 뭔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다거나, 해야 할 일을 안 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책임지는 사후 단계 중의 첫 단계라는 것이다. 보통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인정을 끝까지 안하고 버티는 것들이 있어서 골치가 아파지기도 한다.

두 번째는 사과다. 내가 잘못을 해서 미안하다는 거다. 이 때에는 무조건 미안해야 된다. 세상 일이라는 것이 복잡하기 마련이라 나 혼자 잘못한 것은 아닌 경우가 많다. 내가 이만큼 잘못을 하긴 했지만, 너도 잘한 건 없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래서 혼자 사과하기에는 억울한 것이 당연하다. 그래도 사과를 하기로 했으면 남 얘기 하지 말고 그냥 내 잘못, 첫 단계에서 인정한 내 잘못에 대해 그냥 아무런 조건 없이 사과를 하는 게 맞다. 그리고 관계자들,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된다. 이거 진짜 쉽지 않은 일이다. 나도 잘 못한다.

세 번째는, 어쩌면 이 부분이 제일 중요한데, 책임을 진다는 행위가 사회적으로 도움이 되는 결과를 가져오려면 필수적으로 필요한 부분이다. 즉, 재발 방지 보장에 관련한 부분이다. 그냥 나 혼자 잘못한 것이라면 그저 제가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정도면 된다. 그러나 사회적인 잘못이라면 이 재발 방지 부분이 무척이나 복잡해질 것이고 어려운 일이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시스템을 새로 설계해야 할 필요도 있다. 단순히 제가 물러나겠습니다~ 로 해결되지는 않는 경우도 많다.

결국 사전단계를 완수하거나, 그게 실패했을 경우, 사후 단계의 이 세가지 과정을 온전히 다 수행해야 우리가 그렇게 쉽게 얘기하는 책임을 진다는 행위가 완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쉬운가? 그게 잘 되고 누구나 하고 그러는 사회라면 우리가 여기 모여서 이런 얘기를 하지도 않는다.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책임이 완수된다면, 책임 완수가 흔해지는 사회라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발전하게 된다. 발생 가능한 모든 실수를 다 예방할 수 있게 되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재발방지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절대 그렇게 밝지 않다.

 

책임지지 않는 사회

사회의 관점에서 보자. 우리 사회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 라는 당위성이 통하는 이유는 책임질 일이 발생하는 과정에서, 즉 뭔가가 잘못될 때 사회적 손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즉, 사회라는 거대한 기계가 작동할 때, 그 기계를 구성하는 각각의 톱니바퀴들이 제 역할을 해 줘야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되는데, 그 중 하나의 톱니바퀴가 제 역할을 못하게 되면 그 피해가 사회적 규모로 커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보통 그렇게 제 역할을 못하게 되는 경우는 자신의 의무와 자신의 이익이 배치될 때, 의무보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게 되는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게을러서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잘못일 것이고, 그 밖에도 부당한 이익을 취하기 위해, 보통 사회적 공인들의 경우는 직권 남용의 대가로 뇌물을 받거나 하는 경우도 많다.

이럴 때, 책임을 진다라는 것의 의미는, 너에게 주어진 의무를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네가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더 큰 “책임 비용”을 물려서 부당한 이익을 사전에 포기하게 만드는 일종의 네거티브 전략이다.

네거티브라는 것은 우리가 보통 말하는 당근과 채찍 중에 채찍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공무원이라면 네가 뇌물을 받는다면 뒤에 가서 뇌물보다 훨씬 더 큰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해 줌으로써, 뇌물 받는 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전략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책임의 복합적인 의미 중에서 “처벌”의 개념이 강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처벌이 두려워서 잘못을 못하게 만드는 전술, 이것은 역사적으로 아주 오래 전부터 인류 사회가 채택하고 있는 전술이기도 하다. 십계나 함무라비 법전 같은 것들이 이런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이걸 안 지키면 영원한 지옥불에 타게 된다거나, 밑장 빼다가 걸리면 손모가지를 날려 버린다거나 하는 법들이다.

이와 반대로 포지티브 전략도 있다. 상을 주는 것이다. 자신의 역할과 의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톱니바퀴에게는 포상을 해 주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이 책임을 완수할 때 받을 수 있는 포상을 책임을 다하지 못할 경우 못 받게 됨으로써 책임을 완수해야 할 이유가 생기도록 만들어 줄 수도 있다. 이런 포지티브 전략을 인센티브 전략이라고 이름 붙여도 좋다. 결국 이 두 가지는 방향만 다르지 같은 동기유발 효과를 가진 전략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전략이 본질이 훼손되면서 망가지고 있는 증상이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 애초에 본질에 맞게 시행되어 본 적도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단순히 사법 시스템의 문제는 아니다. 그보다 더 광범위한 문제이다.

사회 시스템은 정기적으로 거대한 리셋이 필요하다. 그게 왕조의 교체일 수도 있고, 혁명일 수도 있다. 중국의 역사를 봐도 은, 하, 상, 주 이런 전설적인 나라들을 제외하면, 진시황의 나라는 15년 정도. 한나라는 전한 210년, 그리고 후한 195년 정도. 수나라 37년, 당나라가 좀 길어서 289년. 송은 좀 찌질하지만 북송남송 다 합쳐서 319년. 원 97년, 명이 276년, 청 296년.. 뭐 이런 수준이다. 대략 300년마다 국가 체제를 근본적으로 뒤바꿔온 역사이다. 우리나라는 신라가 거의 천년을 하고, 고려 조선이 오백년씩 했지만, 조선도 사실 임진왜란 이후 한 번 나라를 리셋했어야 하는데 안하고 뭉개서 후기 조선은 초기 조선에 비해 참 문제가 많은 나라였다는 개인적인 생각이 있다.

그 이후에도 우리는 그 리셋을 제 때 못했다. 구한말의 대한제국의 시스템을 일제가 강제로 개조를 해버렸고, 그 시스템을 미 군정이 그대로 이어받아 자신들의 색을 입혀 고친 것을 이승만 박정희 독재자들이 그대로 대물림해서 쓰고 있는 시스템이나 마찬가지다.

관료들의 무능과 부패를 제대로 해결해 본 적이 없다. 사회가 돌아가는 구조를 민중들이 직접 투쟁과 타협을 통해 새롭게 설계를 해 본 적이 없고, 미국이나 독일, 영국, 일본 등에서 베껴다가 그대로 쓰고 있는 중이다.

그러다 보니, 이 책임을 잘 지는 시스템, 네거티브와 포지티브 전략이 잘 어우러진 그런 시스템은 미처 만들어지지 못했고, 그저 맨날 부정부패 일소를 외치면서 처벌만 강화하는 악순환이 벌어졌다.

왜 악순환일까? 생각해 보시라. 부정과 부패라는 것은 바로 자신의 이익을 자신의 의무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우 발생하게 된다. 그럴 때, 처벌을 강화하는 것만으로는 이 논리를 깨트리지 못한다. 일차원적으로 보면 처벌이 두려우니 뇌물을 받지 말아야지~ 라는 생각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맨날 일벌백계 같은 얘기를 하면서 처벌을 강화하고서는 부정부패를 일소했다고 얘기하고 있지만, 훨씬 더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처벌은 순서상으로 사실이 밝혀진 뒤에야 겨우 가능해진다. 그러나 사실이 밝혀질 수 있는 시스템의 확충 없이 처벌만 강화하게 되면, 사람들은 처벌이 두려워 이익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더 잘 숨길 수 있는 시스템을 스스로 만들어가게 된다. 즉, 사실 인정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을 밝히는 과정은 흔히 검찰 등의 사법 시스템을 떠올리게 되는데, 더 중요한 것은 개인들의 도덕성이다. 수사보다는 자수가 훨씬 더 빠르고 효율적이다. 그런데 처벌을 강화하는 것은 이 개인의 도덕성을 무너트린다. 걸리면 죽는데, 자수를 하겠는가? 따라서 처벌은 적절해야지 무조건 강화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최소한 사회적인 이익 차원에서 생각한다면 그렇다.

과거의 일을 하나 예로 들어 보겠다. 노태우가 정권을 잡던 시절, 정권은 어마어마한 돈을 뿌렸다. 당시 정치한다는 사람들 중에 노태우 돈을 안 받아본 사람이 없다. 비자금의 규모는 조 단위를 넘어섰고, 노태우는 모든 정치적 경쟁자, 잠재적인 반대자들에게 거액을 제시하면서 회유를 시도했었다.

이 중에서, 노태우의 비자금을 받았다고 자백한 사람은 단 둘. 김대중과 김근태, 돌아가신 두 분이었다. 정치인이 이런 비자금을 받는 것, 분명히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상황이다. 잘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지는 과정 3단계, 즉 받았다는 사실 인정, 사과, 그리고 앞으로 받지 않겠다는 약속을 수행한 사람은 단 둘이다. 역사 속에 기록된 숫자가 단 둘.

그러면 이 두 분은 자신의 책임을 다 한 것이다. 잘못을 하더라도 책임을 다 했다면 스스로의 임무를 완수한 것으로 간주해 줘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이 둘만 인터넷 용어로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말 그대로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정치적 지지율은 급락을 하고 모든 메이져 언론이 부패 정치인이라도 되는 듯이 이 두 분을 씹어댔다. 그 피해는 현직 정치인의 입장에서는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사법 처리 문제가 아니다. 정치인 입장에서는 감방 가는 것보다 지지율 떨어지는 것이 더 두려운 법이다. 그렇게 고백을 한 사람만 피해를 봤다. 엄청난 돈을 받고도 생깐 사람들은 아무런 피해도 보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매우 심각한 부작용을 유발한다. 이런 일들이 누적되다 보면 사회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나빠진다. 이제 더 이상 아무도 자발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게 된다. 아주 명확하게 드러난 사실조차 인정을 하지 않게 된다. 진짜 뻔뻔하게도누가 봐도 불을 보듯 뻔한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이게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면 마치 자신이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는 희생양이라도 되는 양 뻔뻔하게 주장을 한다. 그리고 더 최악인 것은, 그런 뻔뻔한 태도를 “전략적인 행동”이라고 정당화 하는 주장이 판을 치게 된다.

거기다가 포지티브 정책, 당근 정책 역시 무력화 된다. 특정한 조건을 완수했을 때 주어져야 하는 포상은 부서별 사람별 돌려 먹기로 전락하고 만다. 주로 잘하는 놈이 계속 잘하기 마련이라 조건 대로만 상을 주면 몇몇이 독점하게 된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인데, 이게 또 문제가 되니까 이번에 네가 받았으니 다음엔 저기 주자 뭐 이런 이상한 타협을 하게 된다. 이런 문제로 분통 터져 본 직장인들 많이 계실 거다.

이런 분위기가 되면 그 여파는 사회 전반으로 퍼지게 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비록 공무원이나 정치인들이 아니더라도 민간 기업에서까지,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순순히 인정을 하고 사과를 하고 처벌을 감수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문화가 사라져 버렸다.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기업 내에 문제가 생기게 되면, 아무도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나서서 순순히 인정을 하고 책임을 지려고 하면, 바보짓이라고 말린다.그저 부서간에 서로 타협을 해서 이번에는 네가, 다음에는 내가 희생양이 되기로 하고 그걸로 사건을 마무리 한다. 이게 전략적으로 잘하는 행동이고 매끄러운 사후처리라고 칭찬을 받게 되는 일이 수시로 벌어진다.

그러다 보니, 역으로 만에 하나 자신이 책임질 일은 절대 하지 않으려는 풍조까지 생겨 버렸다. 이른바 복지부동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하고, 조직을 위해 사회를 위해 나아가 사람의 생명을 위해서 꼭 해야 하는 일까지, 혹시라도 내가 나섰다가 책임질 일이 생길까 봐 외면해 버린다. 이것이 처벌을 강화하는 것만을 대책이랍시고 내놓은 사회의 중요한 부작용 중의 하나이다.

결국 처벌도 포상도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그렇게 우리 사회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나아가 만에 하나 책임지게 될 일조차 하지 않으려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이게 우리 사회의 현재의 모습이다.

 

두 개의 사건

다시 현실로 돌아와 보자.

가슴 아프지만 우리는 또 이번 세월호 사건을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사건을 처음 보는 순간 바로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1993년 10월 10일, 전북 부안군 위도 앞바다에서 110톤급 여객선 서해 페리호가 침몰한 사건이다. 이 두 가지 사건을 비교해 보면 많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관리당국의 문제? 똑같다. 서해 페리호 사건이 발생한 가장 큰 원인은 두 가지. 무리한 과적과 나쁜 기상에서도 무리하게 운항을 한 것이었다. 세월호 역시 정상적인 운항이 불가할 정도로 안전조치가 안된 상태에서 무리하게 운항을 하다가 사고를 냈다. 이 문제를 감독할 관리당국은 아무 조치도 하지 않았다.

사고 대처 능력?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무려 21년이라는 세월을 건너 뛰어 우리 사회의 경제 규모가 세계 10위권을 오가는 현실 속에서도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오히려 이번 세월호 사건에서는 경제 규모의 발전에 힘입어 민간이 보유한 장비와 인력의 규모가 훨씬 더 늘어났지만 사고 대처의 담당 기관인 해경의 업무 스타일은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퇴보한 느낌.

최소한 당시 대통령이던 김영삼은 지금 대통령인 박근혜 보다는 훨씬 더 합리적으로 대처를 했었다. 이건 확실하게 퇴보했다. 나이가 들어 놀림감이 되고 계시지만, 김영삼은 지금 대통령의 부친 보다는 확실히 훌륭한 대통령이었고, 지금 대통령은 자기 부친보다 못하는 것 같다. 따라서 김영삼 윈.

언론의 문제? 더 나빠졌다. 당시만 해도 인터넷이 전반적으로 보급되기 이전 단계라서 방송과 종이신문의 위력이 살아있던 때인데, 오보는 당시에도 기승을 부렸고, 피해자와 가족들은 이중 삼중의 상처를 입어야 했다. 지금은 인터넷 찌라시, 딴지일보에서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그 찌라시들의 난립은 이게 과연 언론인가 싶을 정도로 오로지 트래픽 장사에만 목을 매고, 모든 유언비어를 자체 생산해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와중에 몇몇 독립언론들의 눈물 겨운 노력만이 빛을 발했으나, 이 쪽 진영에서도 근거 없는 음모론을 제시하는 등 안타까운 일들이 다수 생기기도 했다.

여기서 우리가 두 사건의 전체를 다 비교할 수 없으니 한가지만 골라서 보기로 하자. 바로 선장의 문제. 93년 서해 페리호 사건에서 선장 백운두씨를 둘러싸고 기괴한 해프닝이 발생한다. 사고 직후 구조된 승객들이 선내에서 선장을 보지 못했다는 증언이 나오고, 심지어 다른 곳에서 선장을 봤다는 증언이 나오기에 이른다. 결국 선장이 침몰하는 배를 뒤로 하고 몰래 먼저 도피를 해서 숨어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전국이 분노하게 된다. 경찰과 검찰은 선장이 탈출했다고 보고 유가족들을 찾아가 선장 내 놓으라고 다그치고 전국에 지명수배를 내리고 선장이 살아있을 확률이 98%라는 둥 하는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시신 수습 과정에서 거의 마지막에 선장과 항해사 등 선원들이 조타실에서 최후까지 무선 구조요청을 시도하다가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상황과 함께 시신들이 발견된다. 유가족들은 신문 기자들에게, 당신들이 선장이 살아있는 것을 봤다고 했으니 빨리 찾아오라고 분노의 항변을 하게 되는 그런 상황이 발생했었다. 참으로 어이없는 오보와, 그 오보에 정부 사법기관까지 춤을 추는 그런 추태를 보였던 것이다. 유가족들이 느꼈을 피해는 상상하기도 힘들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백운두 선장은 끝까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려고 노력을 하다가, 즉 책임을 다하고자 하다가 실패하고 자신의 목숨을 잃어 버림으로써 책임을 지게 된 비극적인 상황이라는 것이다. 왜 먼저 탈출하지 않았을까? 침몰이 워낙 급속도로 벌어지기도 했지만, 백 선장은 최소한 자신의 책임을 저버리지는 않으려고 노력을 한 것이다. 그는 그래도 진짜 선장이었다.

그러나 세월호의 선장은 다르다. 제일 먼저 탈출을 해 버렸다. 승객들, 특히 그 중에는 수학여행을 가고 있던 고교생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는데, 그런 생명들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너무 빨리 포기해 버리고 탈출을 했다. 아주 여유로운 모습이었다고 한다.

왜 이렇게 바뀌었을까? 똑 같은 선장이, 아니 110톤 급의 구식 여객선 선장과 배수량 6835톤의 거대 페리호의 선장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격이 다른 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해 페리호의 선장은 배와 함께 최후를 마쳤고, 세월호의 선장은 재빠르게 책임을 포기했다.

다양한 원인이 있을 것이다. 물론 개인적인 성품의 차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난 21년간 “책임지지 않는 사회”의 성향이 훨씬 더 강화되었다는 결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단 하나의 표본만 가지고 사회 전체의 성향을 추정하는 것에는 무리가 따른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사고 이후, 생명을 다루는 구조작업에서 보이는 우리 사회의 능력은 이 추정을 좀더 강하게 정당화 해준다.

서해 페리호 사건 때에는 군이 주도하고 경이 보조하는 식의 군경 합동 구조/수색 작업이 진행되었다. 물론 당시에도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민간 어선들이 구해냈다.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해 페리호 사건에서는 단 한구의 시신도 놓치지 않고 모두 찾아냈다. 자리가 없을 정도로 과한 인원을 승선시켰던 배 치고는 대단한 성과였다. 떠내려가는 시신 까지도 단 한구도 놓치지 않고 모두 찾아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떨까? 스스로 구명조끼를 입고 뛰어 내린 생존자, 즉 탈출자들은 대부분 민간 어선이 구조를 했고, 그 이후 선장의 터무니 없는 명령에 따라 얌전하게 구명조끼를 입고 선실에서 대기하던 모든 승객은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했다. 현재 상황 그렇다는 얘기다. 이 중에서 단 한 명이라도 기적적으로 구조해 낸다면, 제발 그랬으면 좋겠는데, 내가 할 수 있는 무슨 일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도대체 해경이 무슨 일을 했단 말인가?

그만큼 대처 능력은 더 수준이 떨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왜 이럴까?

어제 그제 제가 쓴 글이 하나 인터넷에 꽤 널리 퍼졌다. 관료와 돈, 대통령의 책임이라는 제목의 글인데 바로 이 부분을 설명하려는 시도 일종의 가설이었는데 많은 분들이 동감을 해주신 것 같다.

즉 최고 책임자가 최고 권력자가 내가 모든 책임을 질 테니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동원하라는 그 말 한 마디를 안 해줬기 때문에, 해경이 움직일래야 움직일 수가 없었다는 설명이다.

해경은 당연히 그렇게 된다.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대통령이 와서 잘못되면 당신들 모두 옷 벗을 줄 알라고 협박을 하는데, 자신의 권한을 넘어서는 능동적이고 광범위한 구조작업을 펼치려는 엄두도 못 내게 되는 것이 맞다.

그런데 대통령은 또 왜 그랬을까? 대통령 역시 우리 사회의 일원이다. 우리 사회가 책임지지 않는 사회라면, 책임질 일을 하지 않는 사회라면 대통령 역시 그렇게 행동한다.

스스로 나서서 담당 관청의 장에게, 내가 책임질 테니 동원 가능한 모든 자원을 동원해서 기름 유출을 막으라고 명확하게 지시를 한 노무현은 우리 사회의 그런 풍조를 정면으로 거스른 대통령인 것이다. 그래서 사회 주류가 그렇게 미워한 것이다. 사회도 모르는 놈, 대학도 못나와서 그렇지, 법무사 일이나 빼앗아 돈 번 시골 변호사 주제에.. 이런 말들 속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다. 사회 주류의 문화를 거스르는 사람이 권력을 잡는 다는 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불편했을지 이해도 간다.

그러니 이번 대통령 박근혜는 사회 주류의 문화를 그대로 따른다. 절대로 책임질 발언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마치 자신은 행정부와 관계 없는 사람인 것처럼, 정부가 반성을 해야 한다는 둥 유체이탈 화법까지 구사한다. 그러니까 청와대는 이를 받아서, 청와대는 컨트롤 타워가 아니라는 소리까지 한다. 전형적인 책임회피성 발언이다. 심지어 모 청와대 내부 인사는 장차관들의 사고 대처 능력이 이렇게 형편없을 줄 몰랐다고, 쉽게 말해서 장차관들이 일을 너무 못한다고 개각을 해야 될 것 같다고 까지 얘기한다.

이보세요, 그 사람들 다 당신들이 골라서 당신들이 임명한 사람이잖아. 어디서 그런 되도 않는 구라를..

유체이탈 화법의 원조 이명박 전 대통령이 왜 그렇게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는지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잘 이해할 수 있다.

심지어 나아가,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이 절대 이해하지 못할, 인정하지 못할 현실, 박근혜를 아직도 과반수가 넘는 국민들이 지지하고 있다는 이 기괴한 현실까지 한 방에 다 설명된다.

사람들 대부분이 책임을 지기 싫어하는 것이다. 책임지지 않는 사회의 문화에 동화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게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 왜 내가 책임을 져야해? 난 책임질 일을 하지 않았어. 그러면서도, 서로 남들에게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욕을 하고 조롱을 하고 손가락질을 한다. 자신과 닮은 박근혜 대통령은 일을 잘 하는데, 관료들이 썩어서 문제라고, 관료들이 그렇게 썩은 것은 민주화 때문이라고 아주 속 편하게 뇌까리면서 돌아 앉아 있는 것이다. 그 안에 분명히 자신의 모습도 포함이 되어 있으면서도 마치 자신은 유체를 이탈해서 저 하늘 위에서 이 지상의 군상들을 내려다 보듯이 말이다.

우리 사회는 아주 심각하게 병이 들어 있다.

그 병의 이름은 “책임 절대 거부 증후군”이다.

 

마무리

어찌해야 할까?

원래 저는 여러분들한테 결론을 내드리지 않는다. 그저 알기 싫은 우리 사회의 현실을 설명해 드리는 것이 임무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을 이렇게 모아놓고 괴롭히는 것이다. 끔찍한 일이다. 내가 지금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 앞에서 앉아서 듣기는 얼마나 싫을지 상상이 간다.

이쯤에서 제가 결론을 어찌 내릴까요? 하고 물어보면 십중팔구, 앞으로 우리 모두 좀더 자신이 책임을 잘 지는 착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 해야겠어요~ 이런 답변을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런 것은 절대 대책이 아니다. 세상은 선의로 고쳐지지 않는다. 착한 사람의 비율은 분명히 꽤 높다. 그런 착한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그나마 무사히 굴러 가는 것이다. 그러나 착한 사람들이 항상 일정한 비율로 존재하는 것처럼 언제나 집단에는 악당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 비율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또라이 일정성분비의 법칙은 자연계의 절대 진리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 좀 더 착하게 살아요~ 이건 절대 사회적인 대안이 아니다. 종교적인 대안일 뿐이다. 아니 요즘엔 종교인들도 그런 소리 안 한다. 헌금내고 구원받자~ 이게 트렌드다.

대신 이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기 위한, 모든 사람의 욕망과 이익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사회 전반의 기능을 활성화 하고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그 와중에 약자들의 권리를 좀 더 보호할 수 있는 문명화가 좀더 향상되면 더 좋은 그런 시스템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해 봐야 한다는 점을 애기하고 싶은 것이다.

사회의 구성원들이 모두가 다 책임을 지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 즉 책임지지 않는 사회라는 오명을 벗어 버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최소한 이 두 가지 개념은 적용해서 생각을 해 보시길 권한다. 처벌이라는 단방향 솔루션만으로는 절대 해결이 안 된다. 어차피 적발도 잘 못하면서 강화하기만 하는 처벌은 아무 의미가 없다. 희생양만 찾게 되고 상황을 더 악화시키기만 한다. 위에서 얘기한 내용이다.

처벌과 포상, 즉 인센티브를 잘 섞어 줘야 한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여객선 운항의 안전 수칙을 만들었다면, 이 안전수칙을 지킴으로써 추가되는 비용을 상쇄할 수 있는 인센티브를 생각해야 한다. 안전수칙을 안 지킴으로써 발생하는 벌칙도 동시에 생각해야 한다.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서,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정해진 규칙을 지키는 것이 더 이익이라는 판단을 유도해야 하는 것이다. 난 착하니까 규정을 지켜야지~ 이게 아니라, 규정을 지키는 게 더 이익이다, 라는 판단이 들어야 바뀐다.

예를 들어 요즘은 거의 대부분의 도시인들이 줄을 잘 선다. 줄을 서는 것이 서로에게 더 이익이라는 것이 확실하게 인식이 된 것 뿐이다. 사람들이 착해져서 줄을 잘 서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표가 극히 부족하다거나 하는 경우 줄을 서는 것이 이익이 아닌 것 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그 자리에서 줄은 사라지고 카오스가 연출된다. 이런 것이다. 이익이 되어야 움직이고, 뭔가 나한테 도움이 되어야 변화가 발생하는 것이다.

자꾸 마인드가 벌칙으로 처벌로만 가면 대안을 만들 수가 없다. 그거 다 지키면서 어떻게 장사를 하겠냐는 말 한마디에 다 무너진다. 이걸 지키면서 장사를 해야 당신이 돈을 더 벌 수 있다고 설득할 수 있는 그런 대안이 필요하다.

승무원을 대상으로 하는 정기적인 안전교육도 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그거 교육 받아봐야 다 쓸데 없고 시간만 낭비라는 생각이 안 들 정도로 제대로 된 안전교육 과정을 거쳐야 모종의 이익을 볼 수 있게 만들어줘야 한다. 회사도 승무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쉽지 않다. 사실 이런 종류의 안전수칙들은 결국 비용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그 비용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결국 이 또한 돈 문제인 것이다.

안전도 사회적 비용이 들어가는 것이고, 비상시 대처할 수 있는 시스템도 돈이 들어가는 것이다. 사회적인 규모라면 결국 세금으로 해결을 해야 한다. 수익이 발생하는 곳에 정당한 세금을 걷고 그 세금으로 사회의 구성원들의 안전을 지켜주는 사회, 이 정도 수준은 무슨 거창한 이상향이 아니라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수준의 사회 아닐까?

4대강 사업에 들어가는 돈의 백분의 일 천분의 일만 썼어도 모든 승무원들은 철저한 안전교육을 받고 있었을 것이며, 비정규직 선장이 배를 버리고 일착으로 도망가는 일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저 차가운 몰 속에 갇혀 버린 수많은 아이들의 목숨은 우리가 그토록 내기 싫어하고 거부하던 세금의 값으로, 최소한의 안전 기준을 위한 비용도 지불하기를 꺼리는 정부 때문에, 지지율 때문에 써야 할 곳에 필요한 세금조차 걷지 못하고 쩔쩔매는 정권 때문에 우리가 겪게 된 비극일 수도 있는 것이다.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결국, 착해지려고 노력하지 말고, 좀더 냉정하고 합리적이 되자는 얘기일 뿐이다.

그게 아마 “그것은 알기싫다”가 여러분들께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일 것이다.

 

끝.

 

 

 

 

 

 

 







6 thoughts on “책임 지지 않는 사회 – 그것은 알기싫다 대본

  1. 어쩌면 이미 방법을 제시하신것 같네요. 사회 시스템의 리셋…
    대한민국으로 리셋을 해야하는데 제대로 못한 여파가 지금까지 이어져온 지금, 결국 거대한 리셋이 필요해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게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가?는 미지수라는게 함정… ㅠ.ㅠ
    좋은 글 감사합니다.

  2. 차분한 분석이네요.
    쪼잔한 부분까지 세세하고 치밀하게 일하는 사람이 많아져야겠고
    그런 사람을 전문가로 인정해주고 존중해 주는 사회가 되어야 가능하겠네요.
    선진국이라는게 자기 일에 대해 쪼잔하고 쫀쫀한 면까지 챙기고 원칙에 어긋나는 것과 타협하지 않는 사회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적당히”라는 말을 모욕으로 듣는 사회…그게 우리를 살리는 길이 되겠죠.

  3. 긴글 오랫동안 읽었습니다.
    책임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다시생각해볼수있었네요.

    개인이 변화시키기엔 너무 큰사회.
    근데 그개인이 아니면 변화시킬수없겠죠.

    또 누가해주길 바라거나 누가한것 베끼는것만으로는 안되니까요.

    글쓴이분같은 분들이 많아지고 생각하는사람들이 많아지는 사회면 좋을텐데

    갈수록복잡해지고 빨라지는 사회라 그럴여유가 계속 없어지는것같습니다.

    제가할수있는 가장기본적인 나부터하기
    나부터 책임지는 생각과 가치관을 갖고 살아간다면 이게 조금씩 주위로 퍼져나가겠지요?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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