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용지 에 일련번호를?

 

SNS 상에서 꽤 넓게 퍼져나간 그림이 하나 있다.

투표용지

바로 투표용지에 일련번호를 붙이자는 주장이다. 절취선 이하의 부분에도 일련번호, 본 투표지에도 동일한 일련번호를 붙여 두고, 절취된 부분을 보관해 두면 나중에 부정투표의 시비가 발생했을 때 보관되어 있는 절취부분과 투표용지를 비교해서 부정하게 투입된 투표용지나 위조된 투표용지를 가릴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이는 제안이다. 일견 합리적인 주장으로 보이며, 왜 이런 방법을 여태껏 적용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좀더 깊게 생각해 본다면, 저 일련번호 관련 주장은 중요한 맥락을 놓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투표시스템은 매우 복잡하게 설계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행해지는 모든 투표에 적용되어야 하는 보통, 평등, 비밀, 직접선거의 원칙 때문이다.

투표소에 가게 되면 먼저 투표권을 확인하기 위해 선거인명부에 포함되어 있는지를 확인하고 신분증을 통해 본인임을 확인한다. 선거인명부에는 남녀노소 모두가 기록되어 있다. 이게 바로 직접 선거의 원칙과 보통선거의 원칙이 구현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중복투표를 막기 위해 이 유권자는 투표했음을 기록하고 한 장의 투표용지를 내어 준다. 이 부분에서 평등선거, 일인당 일표의 원칙이 지켜진다.

그런데 비밀선거의 원칙은 무척이나 지키기 힘들다. 특히 투개표 과정의 공정성, 외부의 침탈이 없었는가를 관리하는 것과 충돌하는 측면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밀 선거의 원칙 역시 무척이나 중요한 원칙이며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원칙이기도 하다.

비밀선거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투표인과 그 투표인이 기표한 투표용지의 사이에 아무런 연결성이 없어야 한다. 그래서 모든 투표용지는 정확하게 동일하게 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위에서 제안한대로, 투표용지에 일련번호가 붙어 있게 된다면, 어떤 방식을 통해서 비밀을 유지하고자 하더라도 최소한의 연결성을 확인할 수 있는 기초 정보가 남아 있게 된다.

즉, 선거인명부에서 확인되는 “이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정보와 배부된 투표용지에 적혀 있는 일련번호와의 연관성을 아무리 없앤다 하더라도 실무 선에서 누구에게 어떤 투표용지가 지급되었는지 확인하고 기억하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비밀투표의 원칙이 깨지게 된다. 비밀투표의 원칙이 깨지게 되면 민주주의는 바닥부터 붕괴한다.

생각해 보시라. 누가 누구에게 투표했는가를 알게 되었을 때, 권력자들이 행하게 될 가혹한 탄압을 말이다. 그리고 그 탄압이 무서워서 원하는 후보에게 투표하지 못하게 될 수많은 선량한 유권자들의 입장도 생각해 보셔야 한다.

반면에 투표용지에 일련번호를 매겨 두는 것은 많은 이점이 있다. 최소한 이 투표용지가 진짜 적법한 투표용지인지 도중에 누군가가 추가로 투입한 부정투표용지인지 확인할 길이 열린다. 절취부분을 보관하고 있다가 맞춰 보면 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이점 때문에 일련번호를 기재하자고 제안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 상호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실제로 과거에는 투표용지 함을 이송하는 과정에서 미리 만들어둔 부정투표 용지를 대량으로 투입하거나, 심지어는 투표용지함 박스 자체를 미리 만들어둔 다른 걸로 바꿔치기 하는 일까지 있었다. 역사적인 사실이다. 이런 것을 생각한다면 투표용지의 합법성을 담보할 만한 장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필수적으로 하게 된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바로 지금 시행하고 있는 방식이다. 투표자가 선거인 명부에 포함되어 있는지를 확인하고, 그 투표자에게 투표용지를 배부하는 순간, 절취선 이하 번호가 적힌 부분을 잘라내어 별도로 보관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하면 잘라내 버렸으니 투표함에 들어가는 투표용지에는 개별적 특성이 사라지게 된다. 즉, 투표자와 투표용지의 관계를 입증할 단서가 사라짐으로써 비밀 투표의 원칙이 지켜진다.

그러면서도 절취된 부분에 번호가 적혀 있으니, 실제 투표자의 숫자와 절취된 부분의 일련번호와는 연관을 지을 수 있다. 즉 몇 명이 투표했는지를 알게 되고, 저 투표함 속에 몇 장의 투표용지가 들어 있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되고 그 부분을 증거할 수 있는 자료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 두면, 이송중인 투표함에 부정 투표용지를 집어 넣을 수가 없게 된다. 절취 부분보다 훨씬 더 많은 투표용지가 발견되면 문제가 발견되는 것이니 말이다. 또한 미리 만들어둔 가짜 투표함과 바꿔치기 하기도 힘들어진다. 도대체 이 투표함에 몇 장의 투표용지가 들어있어야 하는지 부정선거 사범들이 확인하기가 어려워지니까 말이다.

이런 복잡한 고려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현재의 시스템이다. 과연 일련번호 기재를 주장하시는 분들께서 이런 역사적 기원까지 생각해 보셨는지 묻고 싶기도 하다.

또, 일련 번호를 인쇄 해 둔 투표용지를 쓰더라도 부정의 소지는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 어차피 투표자와의 링크는 어떻게 해서든 끊어 뒀을 테니, 절취해서 보관하고 있는 절취부분 까지 함께 바꿔치기를 하면 되니까 말이다. 완전히 부정을 막지도 못하면서 괜히 비밀투표의 원칙을 훼손할 수도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셈이라고 볼 수도 있다.

결론은 이렇다.

부정을 하고자 들면 어떤 방식으로라도 부정을 저지를 수 있다. 어떤 시스템도 부정한 인간의 의지를 완전히 막을 방법은 없다. 결국 감시가 필요한 것이다. 감시가 취약해지고 부정의 의지가 강해지면 언제든지 부정은 벌어진다. 그래서 처벌을 강화하는 것이다. 걸리면 엄청난 처벌을 할 필요가 이래서 나온다.

그런 상황에서 단지 투표용지와 절취 부분 양쪽에 일련번호를 기입하는 것이 절대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해결책이 되지 못할 뿐더러 지금의 시스템보다 나아지는 점이 전혀 없다. 오히려 비밀투표의 원칙이 훼손될 가능성만 더 높아진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일련번호를 기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이런 복잡한 역사적 기원과 논리적 추론을 몰라서 그러는 것일까?

아니면 현재 선관위가 진행하는 투표 방식과 그 시스템을 어떻게 해서든 흠집을 내 보고자 하는 의도에서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뭔지는 모르겠는데, 그저 선관위는 미덥지가 않으니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어떤 경우가 되더라도, 비판을 하고 새로운 개선안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시스템이 어떤 역사적 연원을 가지고 만들어졌는지, 그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나서 합리적인 비판을 해야 하는 법이다.

최소한 내가 생각하기에 저 투표용지에 일련번호를 인쇄해야 한다는 주장은 합리적인 제안은 아니다.

 

 

 

 

 

 

 

 

 







4 thoughts on “투표용지 에 일련번호를?

  1. 두 경우 모두 비밀원칙에 문제가 생기는건 선거관리 공무원의 개입이 있어야 되는거 아님? 그렇담 둘다 크게 다를바 없어보이는데..

  2. 물뚝님 어딘가의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내용 보셔야 하지 않을지..

    (투표인관리와, 1인2표를 방지하기 위해서 ‘투표인 대장’이라는 것을 사용한다.
    유권자는 여기에 사인을 해야만 투표용지를 받을수 있다.
    여기에는 시리얼번호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즉, 투표용지에 있는 시리얼 번호는 어떤사람의 시리얼 번호인지 알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

  3. 맞아요 선거인 명부에 투표용지 시리얼번호는 없죠.. 결국 양쪽에 일련번호를 박아놔도 비밀투표 원칙은 훼손되지 않겠네요

  4. 비밀투표의 원칙이 훼손된다는 말씀이군요
    기억력 좋은 투표 실무자들이 투표자별 일련번호를 기억해놓고
    개표시 권력의 반대자들 리스트 쫙 뽑아서 무자비하게 탄압하면
    유권자는 공포에 떨고 투표포기하거나 의사에 반하는 투표를 하게되고…
    민주주의는 붕괴되겠네요
    그정도면 음모론인데요
    유신시대에나 가능한 시나리오 같고요 가능성은 극히 희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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