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 투표함

 

개표부정을 주장하거나, 현재의 투개표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의 주장 가운데 하나인 투명 투표함 채택에 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현재의 투표함은 얼핏 보기에도 좀 약해 보인다. 지난번 선거에서는 종이박스를 쓰더니, 이번에는 플라스틱 박스였다. 투표함의 인증을 위해 RFID 칩까지 장착하는 것에 비해서는 견고함이 좀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투표함의 부실을 개선하기 위해 생각하다 보니, 투명하고 강한 재질로 만들어 견고함도 확보하고, 투표함 속이 들여다 보이게 만들어서 투표 진행 과정의 투명성을 높이고자 하는 아이디어가 나온 점,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렇다면 투명한 투표함을 채택하는 것은 현재 시스템에 어떤 문제가 있건 없건 당연히 훨씬 더 좋은 개선책이 되는 것 아닐까?

세상 모든 일이 그리 단순하지는 않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할 수 있겠다.

하나는 비밀투표의 원칙, 그리고 또 하나는 예산문제이다.

 

비밀투표의 원칙

투표함이 투명할 경우 얻을 수 있는 효과는, 투표함에 미리 부정한 투표용지를 넣어두지 않는가 하는 의심을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에는 새 투표함을 가져다 놓기 이전에 각 정당의 참관인 입회하에 투표함이 완전히 비었음을 확인하고 나서 제 자리에 투표함을 가져다 놓고 기표된 투표용지를 넣기 시작하도록 되어 있다.

거기에 더해, 투표함이 투명하다면 실제 투표에 참여하는 투표자들까지도 투표함이 완전히 빈 것을 확인할 수 있으니 더욱 좋은 일 아닐까?

그러나 그 효과가 얼마나 되는지 좀 의아하긴 하다. 완전히 투명하고 완전히 빈 투표함을 보게 될 사람은 투표 개시 직후, 또는 투표함 교체 직후의 몇 명 밖에 안된다. 그 뒤의 모든 투표자들은 얼마간의 투표용지가 들어있는 투표함을 보게 될 뿐이다. 즉, 투표함이 완전히 비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투표자들은 몇 명 안 된다. 결국 투명 효과는 그리 높지 않다.

오히려, 투표함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일 경우, 그 안에 들어있는 투표용지에 기표된 내용을 볼 수 있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 경우는 투표자가 투표함에 기표용지를 집어 넣을 때 이미 그 앞에 앉아 있는 참관인에게 노출된다는 문제점에서부터 시작된다. 또 다른 투표자들이 투표함을 바라볼 때 그 안에 있는 투표용지들에 어느 후보가 더 많이 기표되어 있는지가 슬며시 보일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은 비밀투표의 원칙을 훼손한다.

물론 이 문제를 막는 방법은 있다. 기표 후 투표용지를 반드시 접어서 넣으라고 권장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투표자들은 그런 말을 잘 듣질 않는다. 반 수 이상이 접지 않고 그냥 넣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투명한 투표함은 비밀투표의 원칙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바로 비판자들에게 배척당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투표용지 자체에 표지가 있도록 제작하면 어떨까? 즉, 이미 반 접혀 있는 투표 용지를 펼치고 기표한 뒤 놓으면 자동으로 덮여 안 보이게 만들면 된다. 물론 그렇게까지 하면서 투표함을 투명하게 만들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외국의 경우 투명한 투표함을 운용하는 국가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투명한 투표함이 반드시 투표 과정의 투명성을 높여 주는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이득과 손실 양면이 모두 존재한다는 것이다. 투표함이 투명하다고 해서 투표과정이 투명해질까? 어감에서 오는 착각일 수도 있다. 즉 기분 문제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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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투표함을 도입한 프랑스의 사례를 소개하는 기사에서 흔히 보이는 오류도 지적하고자 한다. 우리 사회에서 투표함 봉인 문제가 제기된 것과 비교하며 투명한 투표함을 선호한다고 하는데, 투표함 재질의 투명성 문제와 투표함 봉인 문제는 전혀 관련이 없다. 봉인의 안전성 문제는 투표 관리 요원들의 업무 숙지 정도와 성실성에 비례할 뿐이다.

이 부분은 최초 투표함을 확인하는 정당 참관인들에 대한 신뢰 문제도 연관되어 있는 걸로 보인다. 그러나 선관위 직원뿐 아니라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의 참관인 조차 믿지 못한다면 도대체 선거 시스템 자체를 어떻게 믿느냐는 질문도 가능할 것이다. 어딘가에는 선을 그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자.

 

예산문제

무슨 문제를 논의할 때 돈 문제를 따지는 것은 무척 쩨쩨해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그 사안이 국가적 차원의 대사일 경우에는 예산 문제는 반드시 따져야 하며, 어떤 관점에서는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사안이기도 하다. 조달 가능한 예산의 범위를 넘어서는 돈이 필요한 일이라면 현실적으로 시행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투명 투표함 문제를 지적하시는 분들 중에서, 전국 선거에서 투표함이 몇 개나 필요한지를 따져보신 분이 있는지 궁금하다.

필요한 투표함의 개수는 선거의 종류에 따라 달라진다. 전국에는 대략 1만 3천여곳의 투표소가 있다. 한 투표소마다 적게는 한 두개, 많게는 대여섯개의 투표함이 사용된다. 유권자 수가 4천만이 넘었고, 투표자 수가 2천만에서 많게는 3천만이 넘어가는 것이 우리 사회의 전국 선거의 규모다.

투표함 하나에 투표용지가 1,000장 들어간다고 가정하면, 대략 맞을 것이다. 그러면 3천만이 넘게 투표를 하는 대통령 선거에서는 3만개 이상의 투표함이 필요하다. 모든 투표함이 골고루 꽉 채워지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4만개 이상이 필요할 수도 있다.

지방 선거는 어떨까? 투표자 수는 좀 적다. 2천만에서 2천5백만 사이의 투표자가 투표를 할 것이다. 그러나 투표 용지의 장수가 늘어난다. 보통 1인 7표를 하게 된다. 대선에서 3만개의 투표함이 필요하다면, 지방선거에서는 20만개 이상의 투표함이 필요하게 된다.

종이재질이나 플라스틱 재질의 투표함이라면, 개당 제작단가는 만원에서 이만원을 넘지 않는다. 만원 잡고 20만개라면 투표함 제작비용만 20억이다. 투명한 재질의 강고한 투표함이라면 강화유리를 생각할 수 있는데, 이런 재질로 제작하게 되면 개당 제작단가는 열배 이상이 들어가게 된다. 200억이 넘는 돈이다. 엄청난 예산의 차이가 발생한다.

한편으로는 좀 비싸더라도 튼튼하게 잘 만들어서 여러 번 사용하면 안되냐는 생각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현재 선관위가 사용하는 투표함과 기표대는 모두 일회용이다. 이 일회용이라는 사실을 많은 분 들이 잘 모르시는 것 같다. 그게 괜히 그러는 것이 아니다.

생각해 보시라. 그 사이즈의 투표함 20만개를 어디에다 보관해야 할까? 전국 규모의 선거 중 대선은 5년 간격, 총선과 지선은 교대로 4년씩이니 평균 2년마다 한 번씩 선거를 치르게 된다. 2년에 한번 사용할 투표함 20만개(어쩌면 30만개가 넘을 수도 있다.)를 보관하려면 어느 정도의 공간이 필요할까? 그 공간을 임대하기 위한 연간 비용 및 보관에 따른 부식이나 훼손을 복구하기 위한 부수 비용은 제작비용을 훨씬 상회하게 된다. 그래서 일회용으로 쓰고 폐기하는 것이다.

투명한 투표함을 도입하자고 주장하기 이전에 이런 문제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또 2년이나 4년쯤 지난 뒤에는 정치여론이 어떻게 바뀌게 될지도 모른다. 그 때 가서는 또 투명한 투표함은 비밀투표의 원칙을 훼손할 우려가 있으니 불투명한 재질로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 생길 수도 있다.

어느 쪽이 현명한 것일까?

 

결론

물론 꼭 필요한 문제라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치라면 예산이 얼마나 들건, 공간이 얼마나 필요하건, 관리 인력이 얼마나 소요되건 해야 하는 일도 있다.

과연 투명한 재질의 투표함이 그 정도로 절박하고 중대한 문제일까?

매스컴에서는 선관위가 뭔가 새로운 설비를 도입하고자 할 때 마다 몇 억 몇 십억의 숫자를 들이대며 예산 낭비 아니냐고 지적을 한다. 바람직한 일이다. 우리는 모든 정부기관의 예산을 지켜보며 낭비되는 곳은 없는지 감시를 해야 한다. 그 돈은 모두 우리가 낸 소중한 세금이기 때문이다. 헌법기관인 선관위도 마찬가지다. 예산 절감은 매우 중요한 우선순위를 가지는 요구사항인 것이다.

이런 요소를 모두 고려할 때, 나는 투표함의 재질을 투명한 것으로 바꾸자는 제안에는 그리 쉽사리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아니 예산 문제를 떠나서라도, 나는 내 투표용지에 찍힌 도장의 위치를 다른 사람이 볼 수도 있는, 그런 투명한 투표함을 도입하는 것에는 반대하고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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