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자가 된 국정원장

(* 이 글은 딴지일보에서 발행하는 “더딴지”에 실렸던 글입니다.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여기에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

 

도망자가 된 국정원장

정보와 민주주의

정보는 힘이다. 정보는 모든 것을 결정한다. 정보의 중요성은 아무리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보의 중요성을 또다시 반복해서 얘기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매우 많은 사람들이 이 정보의 중요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정보와 권력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뜻밖에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의사결정에는 정보의 확보가 우선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좋은 결정이 나올 수가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수정구슬을 가지고 있는 샤먼에게 물어보고 국가의 운명을 건 결정을 내려야 하는 그런 시대는 아니다. 그러므로 의사결정에 앞서 얼마나 양질의 정보를 얼마나 신속하게 확보해서 분석, 판단할 수 있는가에 하는 것이 그 의사결정의 품질을 좌우하게 될 것이고, 정보를 제때 확보하지 못하는 조직은 도태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대 사회의 기본 원리이기도 하다.

민주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민주적 의사결정의 가능 여부는 결정권을 가진 사람들, 즉 유권자들에게 얼마나 정확한 정보가 제공되는가 하는 것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정보가 대중에게 제때 공급이 되지 않고 특정 계층들만 양질의 정보를 확보하게 되는 정보의 비대칭성이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현실 역시 이와 맥을 같이 한다.

만약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국가에서, 중대한 결정을 유권자들의 투표로 결정하려고 하는 순간, 이 대중들에게 제대로 된 정보가 공급되지 않고 있다면, 아니 한 발 더 나아가서 권력을 연장하고자 하는 세력들이 고의로 잘못된 정보를 유권자들에게 공급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사회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유권자들의 투표라는 형식적이고 외형적인 절차만을 진행한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구현되지는 않는다. 유권자 하나하나의 선택이 제대로 된 정보에 기반한 가능한 선택중의 하나로 나올 수 있어야 그 선택들이 모여 제대로 된 국가적 의사결정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지난 몇년간 붕괴해 왔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말았다.

그렇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죽어버렸다.

 

정보기관의 역할

보통의 국가라면, 국가 규모의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필요한 정보를 모으기 위해 정보기관을 만들어 운영하기 마련이다. 미국의 경우라면 CIA가 있을 것이고, 우리에게는 KCIA, 즉 국정원이 있다.

이 국정원이 해야 하는 일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중요하다.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첩보를 수집하는 것이다.

참고로 첩보와 정보는 다르다. 첩보는 인간의 오감을 이용하여 상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해주는 매우 작은 단위의 단서들이다. 수도 없이 많은 첩보들을 취합해서 분석하고 재조립하게 되면 상당히 가능성이 높은 가설들이 작성될 수 있다. 이렇게 가공된 첩보가 바로 정보가 된다. 첩보는 의미가 없으며 선악의 기준이 없다. 하지만 정보는 첩보들로 구성된 가설체계이며 이 정보들 중에 신뢰도가 높은 것을 우선 참고하여 의사결정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수집된 첩보들을 가공해서 정보로 만드는 것도 국정원의 역할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정보들을 관계기관이나, 최고 의사결정권자에게 보고하여 그들이 오류가능성이 적은 의사결정을 내리도록 돕는 것이 국정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된다.

, 국정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정부기관의 눈과 귀라는 것이다. 눈과 귀는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다. 정보를 대뇌에 제공할 뿐이다. 또 눈과 귀는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 손발이 아니라는 뜻이다. 직접 일을 벌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국정원이 손과 발의 역할을 해야 할 경우도 있다. 우리 국가 내에서 발생한 어떤 사건들에 대한 정보가 우리 국가의 이익을 침해할 수도 있는 집단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정보를 보호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경우이다. 사적인 이익을 위해 국가에 심각한 위해를 가할 수도 있는 정보를 빼돌리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그들을 막아낼 수 있는 집단이 바로 국정원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국정원은 직접 개입해서 정보의 유출을 막고, 그 시도를 하는 자들을 적발해내 적절한 사법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인계 조치를 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국정원이 직접 나서서 처벌을 가하거나 해서는 안된다. 모든 사람은 사법체계에 의하지 않고서는 처벌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또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 원칙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게 원칙이다. 국가 차원의 정보를 다루는 국정원은 국가의 눈과 귀역할을 해야 하며, 국가 차원의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정보의 유출이 발생하는 것을 사전에 막아내는 정보 보안의 역할을 수행할 경우에만 손과 발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 이 결론에 이의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이 원칙은 언제나 무너지기 마련이다.

 

권력과 정보

권력은 언제나 정보를 필요로 한다. 아니 그 이전에 권력 자체가 정보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무력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전두환이 군 내부의 최고 정보기관이었던 보안사의 사령관이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쿠데타에 성공하자 마자, 자신이 지휘하던 보안사만큼이나 중요한 정보기관이었던 중앙정보부를 바로 장악해 버린 것도 우연한 일은 결코 아니다.

전두환은 그만큼 정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던 사람이고, 권력이 정보에서 나온 다는 것, 정보의 도움 없이는 권력을 잡을 수 없으며, 잡았다 하더라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정보에서 나온 힘을 바탕으로 권력을 탈취한 사람들이 정보기관의 운영에 대해 원칙적인 입장만을 가지고 민주주의의 가치를 보호하는 측면에서 접근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은 아주 쉽게 유추가 가능하다. , 그들은 정보기관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부서쯤으로 인식하고 활용했을 것이라는 얘기가 된다.

이렇게 되면 정보기관은 매우 위험한 존재로 변질되고 만다. 물론 전두환의 롤 모델이었던 박정희 역시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박정희는 언제나 중정을 자신의 비서실 만큼이나 자신의 지근거리에 두고, 중정을 이끌던 김재규를 자신의 심복처럼 생각해서 부려왔던 것이다. 그러던 박정희가 바로 그 중정의 장에게 총을 맞고 죽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역사적 아이러니이기도 하지만, 그 아이러니 속에서도 정보의 강력함이 배어나오기도 한다는 점을 잊지 말기로 하자.

그렇게 박정희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정보기관의 비뚜러진 역할은 전두환 체재를 맞이하면서 더욱 더 변질되고 타락하게 되고 만다.

전두환 시절의 안기부(중앙정보부의 후신)는 정보기관이 아니라 정치기관이었다. 전두환 시절에 치러진 모든 선거는 안기부의 기획작품이었으며, 안기부는 전두환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말 그대로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고, 해 내는 조직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와중에 19852.12 총선에서 신민당이 돌풍을 일으키게 된다. 이 사건은 바로 다름 아닌 안기부의 실패였다. 안기부가 첩보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정보에 의하면 신민당의 돌풍 같은 것은 없었어야 한다. 안기부가 2.12 총선을 위해 물 밑에서 작업한 것에 의하면 신민당을 지지하는 국민들의 기대는 투표로 이어지지 못했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정보기관이 실패하자 전두환은 위기에 빠져버리게 된 것이다. 정보에 지나치게 의존하던 권력의 실수라고나 할까.

물론 그 전통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하나 둘 씩 깨어지기 시작한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합쳐서 민주정부 10년간 국정원은 상당히 많이 변화하고 발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었다. 국내 정치에 직접 개입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권력자들이 스스로 그런 개입을 억제하고 정보기관의 부당한 도움을 거절하기도 했다. 그렇게 변화하면서 국정원은 조금씩 국가 차원에서 운영하는 정보기관 본연의 할 일을 찾아 가는 것 처럼 보이기도 했다.

바로 앞에서 얘기한, 첩보를 입수하여 분석하고 정보를 생산하는 일, 눈과 귀의 역할과 국가의 이해가 걸려 있는 정보의 유출을 막는 손과 발의 역할, 정보보안의 역할에 집중하는 것 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국정원과 관련된 법조항들도 많은 개선이 있어왔다. 이제 더 이상 국정원은 국내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국정원이 진보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표현하면 안되고, 단지 국정원이 본연의 역할,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가 정보기관이 했어야 하는 기본적인 원칙을 지키기 시작했다는 정도로 표현을 해 줄수 있는 것이다. , 국정원이 조금씩 정상화 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어렵게 어렵게 정상화 되던 국정원은 이명박의 취임과 함께 극단적으로 회귀하게 된다. 암울했던 과거의 중앙정보부와 안기부, 그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행태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국정원의 퇴행

아무도 몰랐던 것은 아니다. 이명박 정권의 무리한 행보를 지켜보며 민주주의의 퇴행을 우려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국정원에 대해서도 동일한 우려를 하고 있었다. 정권의 성격 자체가 민주주의와는 별로 친하지 않았던, 오히려 완전히 정반대로 가는 행보를 보이고 있던 이명박 정권이었으니 무리한 추측은 아니었다.

하지만, 국정원은 그 조직의 특성상 그들의 행동이 밖으로 드러나지를 않는다. 이명박이 자신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던 원세훈, 하지만 아무런 정보관련 전문성도, 군 경험도 없던 그 원세훈을 국정원장에 임명하는 것을 지켜보며 사람들의 우려는 점점 더 높아갔지만 그 우려를 현실화 해낼 수 있는 근거는 거의 흘러나오지 않았다.

있어봐야 간혹 벌어지는 국정원의 민간인 사찰 혐의가 드러나는 사건이나, 대북 정보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만이 점점 더 우려의 폭을 넓혀가고 있었던 것이다. 상식적으로 북한의 최고 권력자 김정일의 죽음을 언론의 보도가 나올 때 까지도 국정원에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일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하의 국정원, 원세훈 국정원장이 이끄는 국정원은 실제로 그랬다.

과연 이 사람들이, 이 집단이 도대체 무슨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이었을까? 간간히 들려오는 소식으로는 오랜 시간 동안 대북 첩보활동, 정보 분석활동에 종사하던 전문가들이 전혀 엉뚱한 직책으로 밀려나고, 각국에 퍼져있던 인간 정보망들이 대부분 단절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국정원 본연의 눈과 귀의 역할이 무뎌지고 있다는 징후인 것이다.

그렇게 지내오면서도 이명박 정권의 임기는 쏜살같이 지나가 버렸다. 그리고 차기 정권을 선출하는 선거가 한참 진행중이던 순간 국정원의 문제점이 우리 모두가 직면한 당면 현실로 엄청나게 터져 나와 버린 것이다.

국가가 운영하는 어떤 조직의 발전과 퇴행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도 국정원 같이 거의 모든 업무가 기밀에 속하는 집단의 변화는 외부에서 감지하기 힘들다. 삼권분립에 따르는 입법, 사법, 행정 모든 기관에서도 국정원의 내밀한 움직임을 간섭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오로지 행정부의 수장이며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 뿐이다. 대통령이 입 다물고 있으면 국정원의 변화를 알아내고 일을 그르치는 것을 사전에 막아낼 도리는 없다.

결국 퇴행할 대로 퇴행한 국정원의 행보가 정권의 몰락과 함께 터져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게 우리는 이명박 정권을 끝내고 차기 정권을 선출하는 과정에 와서야, 국정원의 퇴행의 증거를 현실에서 직면하게 된 것 뿐이다.

그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 결과 우리 사회는 아주 큰 것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

 

국정원 직원 감금사건

이 당황스러운 사건이 발생한 것은 18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대선 일주일 전, 20121211일 오후 7시였다.

인터넷 언론을 시작으로 빠르게 퍼져나가기 시작한 이 사건의 내용은 매우 어처구니 없는 것이었다. 선거를 앞두고 들뜬 분위기였다고는 하지만, 이 사건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는 점은 매우 아쉬운 일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물론 사회적인 차원에서 이 사건의 본질을 호도하기 위한 거대한 흐름이 있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사건의 내용인즉슨, 국정원의 직원으로 추정되는 여성이 한 오피스텔 내에서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즉 야당의 대선후보를 비난하고 여당의 대선후보를 홍보하는 인터넷 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제보가 들어와서 민주당 측에서 경찰과 선관위 직원을 대동하고 해당 오피스텔에 찾아가 증거를 확보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해당 여성이 문을 걸어잠그고 수사에 협조를 하지 않아서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양측이 대치하고 있다는 것. 이 대치는 무려 23일동안이나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국정원 직원도 아니라고 했었다. 그러더니 직원은 맞지만 여기는 사적인 공간이라고 주장이 바뀌었다.

그러던 상황은 어느새 역전이 되어, 선거에 눈이 먼 야당이 한 여성의 사적 공간을 침해하려다가 잘 안되자 문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게 23일 동안이나 감금해 버린, 천인공노할 인권침해사건으로 돌변해 버렸다.

여당의 대선 후보였던 박근혜의 진영은 야권 후보였던 문재인 후보를 지칭해가며, 소위 인권변호사 출신이라는 사람이 20대 젊은 여성을 자택에 감금(?)하면서 선거에 이기고자 천인공노할 인권침해를 자행하고 있다는 식으로 전방위적인 주장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국정원 직원을 20대 젊은 여성이라는 도발적인 묘사로 표현해가면서 등장한 이 어이없는 주장은 오히려 사회 전반에 더 넓게 퍼져 나갔다. 며칠 뒤, 대통령 선거를 겨우 60시간여를 남겨두고 경찰까지 합세해서 이 주장에 힘을 실어 주게 된다. 해당 국정원 직원의 컴퓨터를 압수해서 조사했으나, 야당이 주장하듯이 선거에 개입하는 인터넷 활동을 한 증거는 찾지 못했다고 발표해 버린 것이다.

사건 자체도 어이없지만, 이미 발생한 사건이 사회에 전파되는 과정에서 이런 식으로 정 반대로 호도되어 전파되고, 그 말도 안되는 호도가 정설인양 수많은 사람에게 받아들여지고, 결과적으로 정 반대의 효과만 남기고 사라져 버리는 경우는 일찌기 인류 역사에서 찾아보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원론적으로 이 사건은 현직 국정원 직원이 업무 계통상의 지시를 받고, 국정원을 벗어난 사적공간에서 비밀리에 현실 정치, 즉 대선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이벤트에 개입을 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야당에게 제보 되었고, 그 제보를 받은 야당은 정당한 절차에 의해 선관위와 경찰을 대동하고 증거 확보를 시도한 것이고, 국정원 직원으로 확인된 그 여성은 정당한 공무집행까지 방해한 것이다.

정상적인 국가였고, 정상적인 사회였다면, 하다못해 경찰과 선관위 만이라도 원칙적인 업무 집행을 했었다면, 이 직원의 행동이 과연 독자적인 것이었는지, 명령계통에 의해 지시된 업무였는지, 그 명령을 내린 주체가 누구였는지를 즉각 조사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명령권자가 국정원장, 혹은 그 이상에서 내려온 것이었다면, 그 즉시 선거 자체가 중단되었어야 하고, 만약 현직 대통령이 이 명령의 배후였다면 정보기관을 동원해서 민주적 대통령 선거에 개입한 이유로 탄핵 대상이 되었어야 마땅한 일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보다도 훨씬 더 사소한 발언 하나만으로도 선거법 위반 혐의로 탄핵 소추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다. 이게 뭐 그리 오래전 일도 아니다. 겨우 8년전.

무척이나 억울한 일이지만, 당시의 우리에게는 이 국정원 직원이 진짜 명령계통에 의해 지시를 받고 업무를 수행했다는 증거가 없었다. 국정원이 그렇게까지 퇴행했을 것이라는 엄청난 가정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사법 시스템이 국정원 내부에서 조차도 비밀리에 벌어졌을 법한 이러한 음모론적 지시와 전달의 증거를 찾아내지 못할 것이라는 좌절이 앞섰던 것 같다. 증거가 없으면 저항도 없기 마련이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보와 민주주의와 권력을 둘러싼 기본적인 원칙, 그 원칙이 깨어지는 순간이 우리 앞에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 전체가 들고 일어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반응을 보이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걸 못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박근혜 대통령을 선출했다.

 

대선 이후

그래도 사회의 각 시스템은 굴러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상적으로 모든 일들이 집행되고 있었다. 속으로야 썩어서 허물어지건 말건, 민주주의가 붕괴하건 말건 사회는 움직이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을 막을 수 있는 힘은 아무에게도 없으니 말이다. 대선 결과에 대해 사람들은 분노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했지만 아무런 반향은 없었다.

박근혜는 공식적으로 제18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물론 취임하고서 한참이 지난 오늘에까지도 아직도 박근혜 정권은 출범하지도 못하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박근혜는 전혀 수준이 되지도 않는 사람들로 내각을 구성하려 하고 있었고, 그 방식 자체가 스스로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박근혜는 전혀 준비된 대통령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사이에 우리에게 없었던 바로 그것이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났다.

민주통합당의 비례대표 초선 진선미 의원이 국정원 내부의 인트라넷 망을 통해 국정원의 전 직원을 대상으로 내려지는 국정원장의 지시사항 들을 무려 25건이나 입수해서 공개해 버린 것이다.

25건의 내용은 청문회를 통한 질의서로 존재가 입증된 것이며, 그 내용의 구체성 또한 사실임을 의심하기 힘든 수준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내용들은 우리가 앞에서 고민했던 국가가 운영하는 정보기관의 본연의 역할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정권을 위한 정권에 의한 정권의 홍보활동 그 자체였던 것이다.

국정원장이 자신의 직원들에게 대국민 홍보라고 주장하면서 내어놓은 내용들이 사실이거나 말거나 관계가 없다. 국정원은 원래 그런 일을 하는 곳이 아니다. 대국민 홍보는 국정홍보처 혹은 각급 부처에서 하는 일이다. 홍보는 국정원의 업무가 아니다. 국정원은 자신의 업무도 아닌 일을, 정권의 유지를 위해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북한이나 중국의 사이버 테러에 대응하려고 설치한 팀의 자원을 이용해 유권자들 사이에 인기있는 웹사이트에서 유권자를 가장하고 정권을 홍보하고, 야당을 비난하는 내용의 글을 올리는 치졸한 수준의 업무였다.

그 뿐이 아니다. 정권에 비판적인 각종 사회단체를 종북으로 규정을 한다. 심지어 그 규정에는 유권자에 의해 선출된 국회의원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정권에 비판적인 단체들이 모두 국정원에 의해 종북으로 규정되고 있었고, 국정원의 영향력을 통해 이 사람들이 인사상 불이익을 받도록 조치하라는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은 현직 국정원장의 지시사항이었으며, 실제로 언급된 당사자들이 사회 곳곳에서 불이익을 받고 있었다.

우려한대로의 증거가 고스란히 노출되어 버린 것이다. 국정원이 정보기관이기를 포기하고 정권의 수호를 위한 친위대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 드러났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그 친위대들은 대선 선거운동 기간을 맞이하여, 오롯이 여당 후보를 위한 선거활동에 투입된 것이다. 그 활동에 전념하던 최말단 직원이 한명 선거기간동안에 적발된 것이고 말이다.

이는 명백한 국정원의 정치개입이며, 국정원법 위반 사항이며, 이 모든 범죄적 업무를 직접 지시한 사람이 원세훈임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빼도박도 못할 증거들이었던 것이다.

최근 본지와 직접 인터뷰를 통해 이 모든 사실을 털어 놓은 진선미 의원은 이 상황에 대해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는 국정원에서 근무하는 대부분의 정보전문가들에게 크나큰 자괴감과 모멸감을 준 사건이다. 이는 조직을 완전히 와해시킨 수준이다. 자기가 맘대로 휘두르려고. 원세훈 국정원장은 애초에 자신이 정보업무를 한 적도 없으며 행정업무 하던 분이다. 심지어 군대도 갔다오지 않았다. “

맞다. 현재의 국정원은 원세훈 원장이 재임한 20092월 이래 4년간 완전히 와해된 것이다. 법으로 규정된 국정원 본연의 업무는 도외시한 채, 정권의 사익을 위해 정권의 잘못을 감추고, 정권에 비판적인 여론을 호도하며, 정권의 치적을 가장하여 홍보하는 일에만 전념해 온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껍질만 남은 국정원, 실제로는 정권 친위 조직은 법에 의해 국정원에게 주어진 온갖 자원과 인력을 동원해서 대통령 선거에 개입한 것이다.

이제 와서 그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정황상 내릴 수 있는 추측 말고, 진짜 증거가 첨부된 사실로 말이다.

 

도망자가 된 국정원장

원세훈 국정원장은 지난 321일자로 퇴임을 했다. 퇴임식도 거행했다.

그 정도 규모의 장으로서 성대한 퇴임식과 함께 각계 각층의 관련인사들의 축하를 받으며 영광스럽게 퇴임하기는 커녕, 소수의 고위직들만 모여서 한밤중에 몰래 퇴임식을 거행했다. 일찌기 보기 드문 일이다.

그리고, 국정원장 원세훈의 지시사항이 드러나게 되면서 그에 의해 종북으로 몰린 수많은 단체들이 전직 국정원장을 상대로 직접 고소를 하고 나섰다.

민주노총, 전교조, 참여연대, 민변등의 고발이 이어졌다. 전직 국정원장이 업무와 관련해서 중첩된 피고소인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 와중에 원세훈 전 원장이 해외로 도피하려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진선미 의원이 25개 지시사항을 세간에 알려냈음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메이저 언론에서는 다루지 않고 있었다. 겨우 뉴스타파나 한겨레 등이 보도할 뿐이었다. 지상파 방송에서도 전혀 다루지 않았다. 기껏 그런 폭로가 있었으나 국정원은 공식적으로 일축했다는 식으로 단신으로만 처리해 버리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던 중이다.

애초에 국정원 직원이 선거개입하다가 적발된 시점에서부 국정원, 경찰, 검찰, 메이저언론의 공고한 연대는 지켜지고 있던 중이다. 물론 그로 인해 이렇게 민주주의가 훼손되는 상황에서도 박근혜 정권의 탄생과 이후의 행보가 마치 아무 탈이 없는 것처럼 이어지고 있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 일도 없는 척, 한 국가의 정보를 총괄하던 정보기관의 장이 임기를 마치자 마자 해외로 도피한다는 것은 정상적인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또다시 침묵을 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 사회가 지금 이런 수준이다.

결국, 진선미 의원은 소문으로만 떠도는 정황을 확인할 수 없다는 한계에 부딪혀 원세훈 전 원장이 출국할 가능성이 있다는 바로 그 날, 직접 공항으로 가서 물리적으로 출국을 저지하겠다는 행동에 돌입한 것이다.

국가 최고의 정보기관의 수장이 야밤에 몰래 퇴임식을 가지고 해외로 도피를 시도하는 도망자 신세가 되어 버렸고, 모든 사법 시스템과 모든 언론이 침묵하는 사이에 일개 비례대표 초선 의원이 행동에 나서는 상황이 오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직접 행동이 성과를 보였는지, 원세훈은 출국하지 못하고 국내에 남아 있게 되었다. 들리는 얘기로는 자신은 원래 출국할 생각도 없었다고 변명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저 이삿짐만 쌌다는 것이다.

진의원은 이 상황에 대해서 원세훈 원장에게 직접 묻고 싶어한 것이다. 그러면서 또 다른 정황도 얘기한다.

한 국가의 최고 정보기관의 장이 임기를 마치자 마자 외국으로 나가면, 테러의 위험도 있는 거 아닌가요? 납치될 가능성도 있고 정보유출의 위험도 있는 거잖아요. 한 일년 정도는 국내에 머물러야 할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어쨋든 공항에 가서라도 말이라도 붙여 보고 싶었다.”

이 또한 옳은 주장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 조차 사회 전반에 전달되지 못한다. 별 일도 아닌데 그저 임기 마치고 잠시 쉬러 해외로 나가는 국정원장을 별 것도 아닌 혐의로 일개 의원이 나서서 종북단체들과 합세해서 눈길 끌기용 이벤트를 벌인다는 수준으로, 가십거리로 처리되고 만다. 이 사건의 본질보다, 공항 의전실에 나타난 진의원의 패션이 더 많이 보도가 되는 것이 그 단적인 증거이다. 우리 사회가 지금 이런 수준이다.

도대체 이 사건이 이런 식으로 묻혀가도 좋을 만큼 그렇게 별 거 아닌 사건인가?

진심으로 모두에게 묻고 싶다.

도대체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인가?

 

최대의 적은 무관심

황당한 일들이 이어지면 사람들은 반응하지 못한다. 인간의 감각은 자극에 민감하면서도 적응속도가 무척 빠르다. 자극적인 사건들이 이어지면 어느새 적응해버리고 그 자극을 자극으로 인식하지도 못하게 되어 버린다.

이명박 정권 내내 우리는 민주주의가 퇴보하는 수많은 사건들을 지켜봐왔다. 그러다 보니, 진짜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어가는 정권의 횡포에 대해서도 무감해지고 말았다. 무감해지면 무관심해진다.

박정희 시대, 전두환 시대를 겪어온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국정원은 원래 그런 거 하라고 있는 조직이다. 정보기관에서 여론조작도 좀 하고 정권홍보도 좀 하는 게 무슨 잘못인가? 난 별로 관심 없다.”

아니다. 진짜 큰 잘못이다. 정보기관이 정권의 안전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게 되면 그 결과가 어떤 형태로 나오게 될지 과거를 돌이켜 보시라. 중정, 안기부에 잡혀가 고문당하던 수많은 민주화 운동가들, 잡혀가고 사라져 버린 수많은 고귀한 생명들, 이런 상황들이 다시 돌아오게 된다. 우리 혹은 우리의 동료들이 똑같이 잡혀가고 사라지고 하는 날이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 아닐 것 같은가?

그렇게 사라져간 소중한 생명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해 줄 수 있었는가? 대법원에서 재심을 해서 무죄선고가 내려진다고 해서,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에게 무엇이 돌아가는가? 그들의 가족들이 겪었던 그 엄청난 고통들이 무슨 댓가로 보상이 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우리는 지금 과거로 퇴행하는 권력과 정보의 결합체를 보고 있는 중이다. 이것을 바로잡지 못한다면 우리가 잃을 것은 민주주의 뿐이 아니다. 우리와 우리 동료들의 생명이다.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무엇이고,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고리를 쥐고 있는 사람은 또 누구일까?

기본적인 이야기이다. 어떤 사건이 발생하고 그 사건이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을 경우, 그 문제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해결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은 바로 그 사건으로 인해 가장 큰 혜택을 본 사람이다.

이 경우에는 누구일까? 이 모든 사건의 최대 수혜자는 누구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대해 진선미 의원은 이렇게 답을 하고 있다.

그야 당연히 박근혜 대통령이죠.

맞다.

우리가 무관심을 떨치고 나서서 얘기해야 할 상대, 이 모든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하라고 요구해야 될 사람은 바로 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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