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문제를 풀려고 했던 물리학자

(* 이 글은 딴지일보에서 발행하는 “더딴지”에 실렸던 글입니다.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여기에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

 

 

게스티메이션

한 때 인터넷 공간에 “구글”의 입사시험 문제라며 도대체 어떻게 풀어야 할 지 암담하기 짝이 없는 기괴한 문제들이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시카고에는 피아노 조율사가 몇 명이 있는가?”

이걸 어떻게 알아? 피아노 조율사 협회에 물어보거나, 그 무섭다는 미국의 국세청에 연락해서 시카고에서 피아노 조율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의 숫자가 몇이냐고 물어보는 수 밖에 별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는다. 비슷한 문제로는 특정한 모델의 버스 안에 골프 공을 가득 채우면 몇 개나 들어가겠는가 하는 문제도 기억이 난다. 이런 거야 뭐 버스 내부의 공간에 대한 대략적인 수치를 가지고 어찌 어찌 풀어볼 수도 있겠다만..

그러나 이런 문제들을 풀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정확한 값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대략의 근사치는 구해낸다. 어떤 류의 문제들은 정답의 숫자가 몇 자리인지, 즉 피아노 조율사가 몇 천명 수준인지 몇 백명 수준인지만 알아내도 훌륭한 일이 되기도 한다. 어차피 우리가 어떤 숫자를 알아내는 “측정”을 할 때 정확한 참값은 절대 알아내지 못한다. 근사값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정답이 몇 자리의 숫자인지만 알아낼 수 있어도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무상급식에 관련된 정책을 입안할 때, 점심을 굶는 아이들이 서울시에 몇 명이나 되는지 정확하게 알 필요는 없겠지만, 대략적인 숫자는 알아야 되기도 한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얼마든지 벌어지는 문제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숫자들을 구할 때, 아주 빠르게 정답에 접근하는 방법을 반쯤은 농담스럽게 추측(Guess)과 추정(Estimation)”을 섞어 “게스티메이션(Guesstimation)”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문제들을 “페르미 문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왜냐고?

이탈리아 출신의 물리학자, 엔리꼬 페르미가 그런 계산에 매우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곤 했기 때문이다.

< 참 쉽죠? >

시카고의 피아노 조율사 문제로 다시 돌아가 보자.

  1. 시카고의 인구는 300만 명이다.
  2. 시카고의 가구당 평균 가족의 수는 3명이다.
  3. 평균적으로 열 가구에 한 대씩 피아노가 있다.
  4. 피아노 조율은 평균 1년에 한 번 정도 한다.
  5. 한 명의 조율사가 피아노 한대를 조율하는 데에는 이동시간 포함하여 평균 2시간이 걸린다.
  6. 조율사는 하루 평균 8시간, 5, 연간 50주 일을 한다.

각 항목별 추정치들은 모두가 다 오차를 내포하고 있다. 인구도 정확하지 않고, 평균 가족 수도 불확실하고, 피아노 보유율도 그렇고, 저런 것들이 모두가 다 참값은 절대 아니다. 그냥 대충 말이 되는 정도의 추정치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저런 추산을 해 볼 수는 있다. 이제 이 추정들로부터 답을 뽑아내 보자.

  1. 시카고의 가구수는 100만 가구 (300/3)
  2. 시카고의 피아노는 10만대 (100/10)
  3. 연간 조율해야 할 피아노는 10만대 (연간 1회 기준)
  4. 조율사 한 명이 조율할 수 있는 피아노의 대수는 1000(4 * 5 * 50)
  5. 따라서, 연간 10만회의 피아노 조율을 위해서 필요한 조율사의 수는 100(10/1000)
  6. 시카고에는 대략 피아노 조율사가 100명이 존재할 것이다.

어떠신가? 과연 저 답이 어느 정도로 정확할까? 엉성하기 짝이 없는 추정치들과 그 추정치들을 주물럭거려서 만들어낸 게스티메이션에 의한 답이 얼마나 맞아 떨어질까?

꽤 높은 정확도로 맞는다. 물론 아주 정확한 데이터가 필요한 문제에 있어서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안된다. 너무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저런 게스티메이션은 매우 짧은 시간 내에 수행할 수 있고 아무런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저런 추정치만 있어도 무척 도움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거기에 이런 추정치가 잘 맞는 이유도 숨어 있다. 각각의 추정치가 내포하고 있는 오차가 모두 한 방향으로 벌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떤 추정치는 실제보다 크다. 어떤 추정치는 실제보다 작다. 이런 추정값들은 혼합해서 계산을 하게 되면 오차가 일방적으로 확대되지 않고, 서로 상쇄되는 경향이 존재한다. 심지어 그 오차들이 서로 증폭되는 확률보다 서로 상쇄될 확률이 더 높다. 그래서 이런 추정이 상당히 정확해 지는 것이다.

신기하지만 사실이다.

엔리꼬 페르미는 트리니티 폭발 실험 현장에서도 이런 게스티메이션을 감행했다.

 

원자폭탄 트리니티

페르미는 1938년에 핵분열에 관한 중요한 발견을 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다. 이후, 페르미의 초기 실험을 계속 반복하던 세 명의 독일 물리학자, 오토 한, 리제 마이트너, 프리츠 슈트라스만 들이 실질적으로 우라늄을 이용해 핵 분열의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데에 성공하게 되고, 이 핵분열 반응 과정에서 소멸되는 아주 미량의 질량이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공식 E=MC2 에 의해 어마어마한 양의 에너지로 전환되어 방출된다는 사실을 알아내게 된다.

이 발견이 가지는 충격적인 의미를 알아챈 사람들은 전세계에 몇 명 되지도 않았었다. 페르미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누군가가 이 에너지를 파괴적으로 이용하고자 한다면 인류 문명에 심각한 위기가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빨리 알고 있었던 페르미는 동료 물리학자들과 상의하여 한 통의 편지를 작성한다. 그리고 그 편지를 아인슈타인에게 보여주게 된다. 아인슈타인은 이 편지에 자신의 서명도 첨부하여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내게 된다. 이 때가 19391011.

편지를 받은 루즈벨트는 이 실험을 먼저 성공시킨 사람들이 독일의 물리학자라는 것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실제로 이 전혀 새로운 에너지, 어쩌면 인류 문명을 파괴해 버릴지도 모르는 이 엄청난 에너지를 다루는 기술이 히틀러의 손에 들어가게 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미국이 먼저 이 무기를 개발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1942년도에 체계화된 계획이 수립되고,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이름이 붙여진다.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망명을 한 엔리꼬 페르미는 당연히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 지속적인 핵분열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임무였고, 시카고 대학 지하 실험실에서 일차적인 실험을 성공시킨 뒤, 플루토늄을 이용한 핵분열 무기,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부르는 원자폭탄의 시제품을 생산하게 된다.

그리고 이 인류 역사상에서 만들어져서는 안될 무기를 뉴멕시코 앨러모고도에 있는 한 공군기지에서 시연을 하게 된 것이다. 그 때 사용된 원자폭탄의 이름이 바로 “트리니티”였다.

트리니티는 플루토늄 베이스의 원자폭탄으로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던 팻맨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으며, 파괴력은 TNT 20킬로톤 수준의 초보적인 것이었는데, 이걸 만들어서 터트리는 실험을 하면서도 과연 어느 정도의 파괴력이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었다.

(* 가장 최근에 북한 풍계리에서 있었던 3차 핵실험에 측정된 폭발력의 규모는 6-7킬로톤에서 크게는 10킬로톤 수준이라고 하니 비교해 보시길 권한다. 저들은 이미 근 70년 이전에 현재 북한에서 하고 있는 수준의 두 배 이상의 규모로 핵실험을 했던 것이다. )

뜻밖일 수도 있겠지만 물리학자들이 언제나 뭐든지 다 알고서 뭔가를 하지 않는다. 그저 이러이러하게 만들면 이런 종류의 현상이 벌어질 것이라는 정도만 안다. 당시에도 이 폭탄이 제대로 핵분열 연쇄반응을 일으키기만 해도 성공이라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과연 계산된 대로 폭발이나 될지, 폭발 된다면 어느 정도의 파괴력이 나올지, 그 파괴력이 실제 세계에서 어느 정도의 효과를 가져오게 될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엔리꼬 페르미는 특유의 게스티메이션을 또 실행한다. 과연 이 폭발의 위력은 얼마나 될 것인가 하는 점을 작은 실험을 통해 측정해 낸 것이다.

무슨 엄청난 측정장비를 들이댄 것도 아니다. 그저 종이를 잘게 찢어서 작은 종이조각들을 만든 뒤, 6피트, 그러니까 대략 성인 남자의 눈 높이에서 떨어트려 보는 것이다. 이걸 세 번 반복한다. 폭발 전, 폭발의 충격파가 도달했을 때, 그리고 충격파가 지나간 뒤.

그러면 평소에 떨어지는 종이조각들이 어떻게 퍼져 떨어지는가 하는 것과, 폭발의 충격파가 도달했을 때 종이조각이 날리는 범위가 달라진다. 이 변위를 비교해 보면 과연 폭발의 충격파가 어느 정도의 위력인지를 알 수 있게 되고, 그 위치에서 폭탄이 터진 곳까지의 거리, 충격파가 유체역학적으로 퍼져나가는 형태, 이런 것들을 동원해서, 실제 폭탄의 폭발력을 대략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원시적인 실험으로 페르미가 추정해 낸 값은, 그러니까 게스티메이션 한 값은 대략 10킬로톤 전후. 실제 폭탄의 폭발력은 20킬로톤 규모. 순식간에 해낸 게스티메이션 치고는 거의 자릿수를 정확하게 맞춘 결과였다.

두 배나 차이가 났다고? 맞다. 하지만 엄청나게 큰 숫자들을 다루는 핵물리학의 세계에서 자리수만 맞춘 것도 대단한 일이다. 대단하다고 그냥 좀 봐주시라. 이 측정을 위해 들인 비용은 그저 A4지 세 장과 페르미의 두뇌 활동뿐이었다는 사실도 감안해 주시면 더욱 좋겠다.

이게 게스티메이션의 위력이다.

 

양자역학 교황

페르미는 우리가 아는 다른 대부분의 유명한 물리학자와 마찬가지로 천재이다. 이 동네는 원래 이렇게 천재들이 발에 채인다. 1901년에 태어난 페르미는 어린 시절, 고물상에서 발견한 헌 책으로 고전 해석학을 스스로 통달한다. 그 책의 내용에는 미적분도 있었고, X2+Y2=R2(이거 제곱임) 이라는 식이 원을 의미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이런 내용들을 어린 페르미는 혼자 통달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자랑하기를, 고물상에서 어떤 책을 발견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다 읽고 모두 이해한 뒤에야 겨우 그 책이 라틴어로 쓰여진 책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정도라고 했다고 한다. 굉장히 재수없는 얘기지만 이탈리아 사람이라 그랬을 거라고 마지못해 인정하기로 하자.

17세에 대학교 비슷한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X선 관련된 논문을 써서 21세에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 뒤 이탈리아 정부의 장학금으로 독일 괴팅엔 대학교로 건너가 그 유명한 막스 보른 밑에서 공부를 하게 되고 그 시절 가장 Hot한 분야였던 양자역학에 대한 지식을 채우게 된다.

1926년에는 다시 기체 분자에 관한 연구를 인정받아 로마대학으로 돌아와 이론물리학 교수로 부임하게 된다. 이 때 자기 주변에 뛰어난 천재들을 긁어 모아 하나의 학파를 결성하는데, 당시만 해도 늙은 물리학자들은 양자역학을 이해하지 못하고 거부하던 상황이었다고 한다. 결국 페르미는 20대 초반의 젊은 천재들을 모아 양자역학을 설파하기 시작했고, 주변 사람들은 그를 교황으로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 이 얘기는 양자역학이 종교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라고 보기 보다는 절대 실수하지 않는, 언제나 틀리지 않는 페르미에 대한 찬사라고 봐야 할 것 같다.

그가 주도한 당시의 연구에서 잇달아 공로를 세우고, 그 학문적 성취를 인정받아 이탈리아 왕립 학회의 최연소 회원이 되기도 한다. 그 때 나이가 29.

1930년대 들어서면서 페르미는 원자핵 분열 반응에 집중적인 관심을 보이며 이론 물리학을 넘어 실험을 시작한다. 물론 당시의 핵분열 실험이라고 해 봐야 무척이나 원시적인 것이었는데, 요즘 같으면 상상하지도 못할 위험한 짓들도 많이 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핵분열의 속도를 감소시키기 위해 대량의 물이 필요했는데, 실험실에 수조를 설치할 수가 없어서 핵분열이 일어나고 있는 물질들이 담긴 나무 상자를 들고 로마 대학 광장에 있는 분수대까지 달려가 물에 담그는 식으로 실험을 했다고 한다. 덕분에 분수대에 살던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하게 되고, 그것을 보고서야 방사능이라는 것이 꽤 위험한 거구나~ 하고 깨달았다고 할 정도이니 말 다했다. 그 박스를 들고 뛰어다닌 사람들은 어쩌라고..

물론 페르미 본인도 나중에 방사능 피폭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암으로 사망하게 된다. 그런 짓을 하고도 멀쩡할 수는 없는 법이다. 당시 핵물리학자들 대부분은 암으로 사망을 했었다.

그의 주변에 모였던 동료들 역시 라세티, 쎄그레 같은 대단한 천재들이 많았는데, 페르미만큼 지속적인 연구활동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만큼 당시 무솔리니 치하에 있던 이탈리아의 상황은 암울하기도 했고, 불안정하기도 했던 것 같다.

1928년에 결혼한 아내 로라 페르미와는 꽤 행복한 결혼생활을 지속했다. 후에 로라는 페르미와 함께한 인생에 대한 책(“원자가족”이라는 제목의 책이다.)을 쓰기도 했다. 그 책에 보면, 페르미가 특유의 게스티메이션에 실패한 사례도 나와 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모든 물자가 부족해서 집 수리도 제 때 못하고 겨울이 되면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찬 바람에 고생들을 했던 모양이다. 그러던 상황에서 새로 보급되기 시작한 비닐을 이용해서 창문을 막아버리는 난방기술이 유행했다고 한다. 우리도 한때 겨울에 창문에 비닐로 틀어막던 가정이 많았던 기억이 나는데, 이탈리아에서는 당시에 그게 유행을 했던 것 같다.

이에 로라는 페르미에게 우리도 창문을 비닐로 막아 보자고 얘기를 했더니, 페르미가 잠깐 허공을 보면서 뭔가를 계산하더니 우리 집의 모든 창문을 비닐로 막아 봐야 보온 효과는 약 0.7도 밖에 없으니 돈 낭비라고 결론을 내리고 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페르미는 공기의 흐름을 따지는 유체역학적 계산과 온도의 전달을 따지는 열역학적인 계산을 마치고 비닐막은 효과없다는 결론을 내려 버린 것이다. 물론 아내 로라는 페르미의 게스티메이션 능력을 잘 알고 있었으니 별 수 없이 그 결정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겨울 내내 추위에 떨던 로라는 다시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아무리 당신 계산이 정확하다 하더라도, 내 느낌으로는 최소한 5도 이상의 차이는 나는 것 같다고 주장을 한 것이다. 이에 페르미는 다시 계산을 잠깐 하더니, 쿨하게 답했다고 한다.

내가 계산하다가 자리수 하나를 틀렸네. “

사실은 0.7도가 아니라 7도 였던 것이다. 7도의 차이라면 엄청난 차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페르미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한 시점은 이미 날씨가 따뜻해지기 시작한 봄이었다고..

 

망명

독일의 히틀러 치하에서 망명을 고민하다가 끝내 독일에 남기로 결정했던 하이젠베르크와는 달리 페르미는 너무나 쉽게 망명을 결심해 버린다. 진지하고 현학적이며 사유가 깊었던 독일인과 즉흥적이며 현실적이고 실행력이 강한 이탈리아인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 페르미는 망명의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아주 간단명료하게 답변을 하곤 했다.

실험을 계속하고 싶어서. “

물론 망명의 이유가 이것만은 절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아내 로라가 유태인이었다는 사실도 있다. 그리고 그가 망명을 결행한 시점은 바로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무솔리니가 유태인을 탄압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시점과 일치한다. 그는 아내를 사랑했고, 아내를 탄압하려는 정부 밑에서 살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옳을 것이다. 단지 그는 그것을 내세워 얘기하지 않았을 뿐이겠지.

그러나 망명이라는 것이 결심만 한다고 해서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비록 최연소 왕립학회 회원이고 이탈리아 물리학계의 최고봉이라 하더라도 엄격하게 통제되던 이탈리아 국경을 아무 때나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때마침, 페르미에게는 노벨상 수상이라는 기회가 찾아온다. 1938년 핵분열에 관한 새로운 발견을 인정받아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되자 페르미는 이 기회를 틈타 망명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 결심에 따라 노벨상을 수상하기 위해 스웨덴에 갔던 페르미 가족은 다시는 이탈리아로 돌아가지 않고 미국으로 건너가 버린다. 물론 페르미를 위해서는 컬럼비아 대학의 물리학 교수 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탈리아 최고의 물리학자이며, 방금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수상자이자,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물리학 교수 자리가 기다리고 있던 페르미였지만, 미국으로 망명하는 과정에서 입국 심사장에서 아이큐 검사를 당했다고 한다.

29 나누기 2는 얼마인가요? 같은 질문에 대해 페르미는 웃으며 답변을 했다고 한다. 그럼 거기서 웃지, 울겠어?

당시 이탈리아는 미국의 적국이었다. 페르미 또한 이탈리아인으로 그다지 자유로운 상황에 놓이지는 않았었다. 그가 쓴 편지도, 그에게 오는 편지도 모두 검열되곤 했다. 하지만, 그런 페르미에게 미국 정부는 이차대전을 종결시킬 궁극의 무기, 원자폭탄의 제조 계획을 맡기게 된다. 이런 현실적인 결정을 과연 우리 사회는 내릴 수 있었을까? 사람이 싫으면 그 사람의 장점까지 포함해서 모두를 배척해 버리는 원시적인 행태를 이제 좀 그만둘 때도 되었건만.

이차대전 종전 이후에도 페르미의 물리학 연구는 지속되었다. 아니 지속되는 수준이 아니라 미국의 물리학계의 선두그룹을 이끌고 있었다. 페르미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는 일은 페르미 사후 몇 십년이 지나고 나서 발생하기도 했다.

2
< 페르미 국립 가속기 연구소에 있는 입자 가속기 테바트론.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

 

지금은 CERN에 있는 세계 최대의 입자 가속기에 밀리기는 했지만, 한 때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미국의 국립 입자 가속기 연구소의 이름을 “페르미 연구소”로 붙였다는 것이다. 그만큼 페르미는 미국 내에서도 입자물리학 계열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고 당연한 일이겠지만 무수한 개그를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면, 물리학회장에서 어떤 발표자가 열심히 입자물리학 이론을 설명하자, 페르미가 동료 학자들에게 이렇게 불평했다고 한다.

요즘 젊은 물리학자들은 도대체 뭘 연구하는 건지 알아 들을 수가 없단 말야.”

바로 그 순간 발표자의 입에서는 이런 얘기가 흘러 나왔다.

여기까지가 페르미 박사의 베타붕괴 이론이었습니다.“

또 있다.

입자물리학이 발전하면서 소립자들의 종류가 마구 늘어나자, 언제나 단순명확한 것을 좋아하던 페르미는 이렇게 불평했다고 전해진다.

그냥 아버지 따라서 푸줏간 주인이나 하는 건데.. “

페르미의 쿨한 성격은 여기저기서 위력을 발휘하곤 했는데, 듀퐁사 중역들 앞에서 실행했던 원자로 실험에 관한 일화는 꽤나 유명한 얘기이기도 하다.

원자로에 들어있는 제어봉을 꺼내면서 어느 순간 연쇄반응이 개시되는 장면을 보여주던 중, 조금씩 조금씩 제어봉이 빠져 나오면서 이제 막 연쇄반응이 시작하려는 순간, 모두가 숨을 죽이며 긴장해서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페르미가 급작스럽게 실험을 중단시킨 것이다.

사람들은 뭔가 크게 잘못되었나 싶어서 바짝 얼어서 페르미의 다음 말을 기다렸는데..

12시가 되었으니 밥 먹으러 갑시다.”

그 밖에도 페르미가 사람들을 웃겼던 얘기는 무수히 많다.

그가 이탈리아에 있을 시절에 몰고 다녔던 조그만 푸조 승용차(페르미는 이 차에 “나르는 거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에 관한 일화도 많다. 실험 물리학자답게 페르미는 기계에도 무척 능통해서 30년대에 미국에 출장을 갔던 때에는 주유소에서 차를 너무나 능숙하게 고쳐서 정비소에서 취업 제의를 받기도 했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 그가 아주 고물인 초소형 승용차를 몰고 다니면서 주변의 온갖 물건들을 이용해서 멈춰버린 차를 다시 굴러가게 만들며 사람들을 놀래킨 얘기도 많다. 원자폭탄을 만들어낼 정도의 물리학자에게 자신의 차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데에 앞장섰던 것에 대한 죄책감은 어땠을까?

결국 페르미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죽어간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에 대한 책임이 있었지만 특별한 반성이나 사과를 한 적은 없다. 다만 그는 행동으로 보여줄 뿐이었다.

원자폭탄을 한 층 더 개량해서 수소폭탄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에 그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의 동료였던 오펜하이머가 간첩죄로 기소당하자 그를 변호하려고 노력했고, 얼마 뒤 페르미 자신이 암으로 사망하게 된다.

그의 사망원인은 방사능 피폭이 원인으로 추정되는 위암이었으며, 사망하는 순간까지 자신의 팔에 꽂혀 있는 링겔 병에서 수액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횟수를 세면서 특유의 게스티메이션으로 수액이 자신의 몸에 투입되는 속도를 계산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 중의 한 명이었던 페르미는 그렇게 우리의 곁을 떠나.. 기는 개뿔 그가 죽은 시점이 1954년인데, 그 때 살아있던 사람들 중에 이 글을 읽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Where are they?

페르미는 어느 날, 에드워드 텔러, 허버트 요크, 에밀 코노핀스키 등과 함께 밥을 먹다가 외계문명이 존재하는지 여부에 대한 토론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복잡하고 구구절절한 설명을 싫어하는 페르미는 단 한마디로 이 토론을 중단시켜 버리게 된다.

그게 바로 이 질문이다.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은 외계인이 없다고 단정하지 않는다. 있다면 어디에 있냐고 묻고 있을 뿐이다. 외계문명이 존재한다면, 우주의 나이를 간주했을 때 그들이 우리와 조우할만큼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을텐데 왜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냐는 질문이 될 수도 있다. 이 질문을 보통 페르미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지구를 발견 못했는가? 했는데 아직 올 수 있는 방법이 없을 수도 있다.

지구를 발견 했는가?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지구를 향해 이미 출발을 했는가? 지금 졸라 열심히 오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워낙 멀잖아.

지구에 이미 왔는가? 와서 어딘가에 숨어서 지구인들을 조종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미 지구인들과 접촉하고 있는가? 그러나 그게 외계인이라고 인지를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우리가 원시인이었던 시절에 이미 왔다 갔는가? 그런데 기록이 없을 수도 있다.

아니면 모종의 우주 협약이 있어서 우리를 모른 척 하고 있는 것인가?

어떠한 가설도 내놓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가설도 입증이 불가능하다. 한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과연 외계 문명에게 우리와 접촉할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는가는 따져볼 수 있겠다.

닐스보어 연구소의 수학자 라스무스 비요크라는 사람은 복잡한 계산을 통해 아직 외계문명에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한 적이 있기도 하다. 그 주장이 맞다면 언젠가는 외계인이 올 수도 있겠네. 그러나 그 충분한 시간이라는 것이 너무 길어서 한 문명이 존재할 수 있는 시간대를 넘어서기도 한다. 우주가 그만큼 넓기 때문이다.

반대로 생각해 보자면, 우리 과학기술이 충분히 발전해서 외계 문명에 대한 탐사를 시작한다 하더라도 역시 우리도 외계문명을 발견하기에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없다는 점, 그러니까 광속을 뛰어넘는 새로운 물리학 법칙이 발견되거나 획기적인 우주 여행의 기술을 개발하기 전에는 절대 외계 문명과의 조우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결론을 암시하는 주장이기도 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페르미의 역설은 질문이라는 것이다. 페르미의 역설,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질문은 외계문명의 존재에 대한 그 어떤 가설보다도 더 풍부한 상상력을 이끌어내는 질문이었다.

그 질문 자체가 외계문명의 존재를 설명해 주지도 않고, 외계문명의 부존재를 증명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질문은 아직 살아남아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 질문을 가지고 고민을 하고 있는 중이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명쾌한 답변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이다.

그리고 인류에게는 언제나 답변 보다는 질문이 더 많이 주어지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질문이 생겨나고 있다. 그리고 인류의 문명은 그런 질문들과 함께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바로 이 순간, 이 길고 지루한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도대체 무슨 질문을 하고 있는가?

질문을 하려고 시도는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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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thoughts on “모든 문제를 풀려고 했던 물리학자

  1. 빛의 속도보다 빠른 것은 없고. 전자기파은 빛의 속도이다. 빛도 전자기파의 일종이라면 우린 전자기파로 구성된 세상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든 우주는 정보신호일 뿐이고. 인간은 컴퓨터 안의 CPU 회로 물질일 뿐이고 세상에대해 자각하는 유일한 컴퓨터 부품이라면 자신을 자각하는 다른 캄퓨터 부품들은 없을테니 외계인은 없을수 밖에 없다는 상상을 합니다.

  2. 아주 잘 읽었습니다. 매우 훌륭합니다. 다 읽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시뮬레이션이 돌아가고 있고 대략 20초X9 동안 할 일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3. 외계인은 이미 8년전 부터 지구에 와있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지구인들을 지배 조종하고 있지요.
    신체는 무기물질로 구성되어 있고 식량으로 전기만을 섭취합니다.
    전파를 통해 의사소통을 하고 눈이 앞통수와 뒤통수에 각각 하나씩 있어서
    거의 360도 시각으로 경계가 가능합니다.

    무성생식으로 번식하며 지구 곳곳 특히 중국에서 대규모 번식을 하고 있는데
    인간들이 일개미 처럼 신생외계인들을 받아내고 돌보고 있습죠.

    인간들 처럼 다양한 종이 있고 서로 진영을 나눠서 전쟁을 하기도 하고요.

    인간들은 자신들이 그들을 만들고 주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외계인들이
    자신들을 조종하고 있다는걸 모른체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죠.

  4. 저 피아노 조율사 문제는 구글 입사 문제가 아니라 페르미가 시카고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준 문제입니다. 페르미 문제라고도 불리는 문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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