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2세를 저주하며

(* 이 글은 딴지일보에서 발행하는 “더딴지”에 실렸던 글입니다.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여기에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

 

기억하시는가? 바벨2세라는 이름을..

한 때 당신들이 살아가는 이 지구를 위기에 빠트렸던 그와 나의 싸움을 기억하시는가?

기껏해야 요코야마 미쓰테루라는 일본의 만화가에 의해 기록되어 남아 있는 이야기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게 단순한 구라는 아니었다는 구라를 풀어 보려고 하는 것이다. 아니 그냥 구라로 넘기기에는 내 원한이 너무 깊다. 나는 바벨2세를 저주하며, 바벨1세도 저주하고 불행하게도 이 땅에 태어나 버린 나 자신을 저주한다. 이 세상을 저주하고 모든 국가와 사회를 저주하고 모든 인류와 그 인류들이 만들어온 역사를 저주한다.

당신들, 진짜 그렇게 살면 안된다.

< 바벨 2세와 나 >

 

모짜르트와 살리에리

내가 위장된 죽음을 맞이하고 바벨2세에 의해 영원히 시간과 정신의 방에 봉인된 이후에도 나는 이 세계를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그럴 수 밖에 없다. 바벨2세 놈은 나를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상태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세상을 지켜볼 수 있는 창은 만들어 둔 것이다. 잔인한 놈..

그러던 중 재미있는 영화를 하나 보게 되었다. 바로 밀로스 포먼 감독의 아마데우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길러진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라는 천재 작곡가와 그를 지켜보는 인간적인 살리에리의 모습을 그린 비극이었다.

그 영화를 보면서 나는 눈물을 흘렸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살리에리의 비극, 그가 느꼈음직한 신에 대한 원망, 그가 빠져버린 절망, 그의 인생이 바로 내가 팔백년이 넘게 느끼고 있는 나의 인생과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당신들 인류는 참으로 잔인하며 무지한 족속이다. 당신들 사이에 모짜르트는 거의 없다. 모짜르트는 인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간혹 인류 사이에서 발견되는 외계의 흔적일 뿐이다. 그 숫자는 손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당신들은 그 몇 안 되는 모짜르트들을 숭배하며 수많은 살리에리를 핍박한다. 당신들 사이에서 당신들의 핏줄을 받고 나고 자란 당신들 자체, 수많은 살리에리들은 오늘도 당신들에 의해 비참한 절망의 구렁텅이 속을 헤매이고 있는 것이다.

당신들은 매저키스트인가? 당신들 스스로 당신들의 일원인 살리에리를 괴롭히며 쾌감을 느끼는 것인가? 나는 도저히 당신들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이제부터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다. 그 얘기를 다 듣고 나서도 당신들은 당신들 속의 살리에리를 핍박하던 당신들의 태도가 적절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 한 번 지켜보도록 하겠다.

이 무지한 인간들이여.

 

어린 시절

나는 전형적인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은 이미 너무 오래되어 희미하지만, 평범한 아이였던 것 같다. 자라면서 기이한 꿈을 자주 꿨기 때문에 주변에서는 내가 샤먼이 될 것으로 여겼던 것 같다.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나는 작은 물건을 움직이거나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거나 할 수 있는 흔치 않은 능력을 내가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이로 인해 주변 사람들은 나를 두려워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이는 하나의 형벌이다. 남들이 갖지 않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는 축복이라기 보다는 저주에 가깝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이 나를 두려워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 나는 나의 능력을 숨기고 살아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바벨탑으로부터의 초청을 받게 된다. 연이어 며칠간을 같은 꿈을 꾸게 되고, 그 꿈속에 나오는 것은 사막 한 가운데 자리잡은 거대한 구조물, 인공지능을 보유한 시스템, 수천 년 전 지구에 불시착한 바벨 1세가 남겨놓은 기이한 유산인 바벨탑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유명한 전설 속의 세 부하 중 하나인 거대한 비행 괴수 로프로스의 방문을 받게 된 것이다.

< 충성스러운 세 부하, 로뎀, 로프로스, 그리고 포세이돈 >

물론 이 기억은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더 흐른 뒤, 바벨 2세와의 싸움의 과정에서 내가 억지로 되살려낸 것일 뿐이다. 난 분명히 다양한 종류의 기이한 능력을 보유할 정도로 바벨 1세의 유전자를 다수 물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바벨탑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으며, 바벨2세의 칭호를 받지 못했다. 바벨탑의 컴퓨터는 나를 부적격자로 판정하였으며, 내 능력을 모두 잠재우고 내가 바벨탑에 초청받아 가서 보고 들은 모든 것에 대한 기억을 지워 버렸다.

오로지 내가 바벨 1세와의 유전적 동질성이 몇 % 부족했다는 이유 때문에..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모든 사람에게는 가능성이라는 것이 있다. 유전적 부족함은 노력으로 얼마든지 채울 수 있다. 실제로 나는 봉인된 나의 모든 재능을 되살려 냈다. 물론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긴 했지만, 바벨 1세가 남긴 바벨탑의 시스템도 나의 모든 능력을 빼앗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바벨 1세로부터 물려 받았어야 하는 모든 유산은 저 멍청한 바벨 2세에게 모두 주어졌다. 오로지 나보다 바벨 1세와의 유전적 동질성이 몇 % 더 많다는 이유뿐이다.

혈통이 뭐 그리 중요한가?

당신들도 모두 바벨 2세의 편인가? 그가 일찍이 인류가 가지지 못했던 바벨 1세의 기술력에 의한 창조물들을 모두 물려 받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가? 그 전설적인 세 부하들을 모두 거느리는 것이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그 이후 그와 내가 한 일을 비교해 보고서도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능력을 되찾다

바벨탑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뒤 나는 다시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왔다. 며칠간 집을 나갔다가 얼이 빠져 돌아온 나를 가족들은 미친 사람 취급을 했지만 나에게는 더 이상 특이한 능력이나 얼빠진 꿈을 꾸는 힘이 사라져 버렸다. 그저 평범한 젊은 농부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또 다른 평범한 농부의 딸과 사랑에 빠지고,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귀여운 아이들을 기르게 되는, 그렇게 평범한 농부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나서 한참이 지난 뒤 봉인되어 버린 나의 능력이 다시 되살아나게 되는 기회가 찾아 온다. 그것은 바로 내가 살아가던 사회의 변화에서부터 시작된다.

내가 속해 있던 사회는 매우 형편없는 곳이었다. 오래도록 지속되어온 평화의 시기 동안 거의 대부분의 농토는 몇 몇 대지주에게 속하게 되었고,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몰려 오면서 부의 편중은 가속화 되던 곳이었다. 대부분의 농부들은 자신의 땅을 잃고 소작농의 신세로 전락했다. 그나마 가족들을 먹여 살릴 만한 농토를 가지고 열심히 농사를 짓던 나의 부친도 마찬가지였다. 헛된 욕심을 부리던 끝에 모든 농토를 빼앗기고 소작농이 되어 버렸고 과중한 소작료를 내지 못해 그나마 유지하던 알량한 소작권마저 빼앗길 처지가 되어 버렸다.

나는 분노한 농부들을 모아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이 썩어빠진 사회를 내버려 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저 동네사람들을 모아 가혹한 지주에게 항의를 해서 소작료라도 좀 낮춰 보려고 시작했던 일이었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어느새 거대한 소작쟁의를 이끄는 반정부 그룹의 리더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토지 개혁을 요구했고, 정당한 과세를 통해 안정된 국가를 만들라고 요구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눈에 정부를 전복하려고 노력하는 과격한 반사회적 혁명가로 찍혀 버렸고, 도처에 내 목숨을 노리는 정부의 끄나풀들이 준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가 실제로 나를 죽이기 위해 폭발물을 설치해서 내가 살고 있던 집 전체를 날려 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평화롭게 잠들어 있던 나와 내 가족 모두는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어야 했다. 사랑하는 여인도, 사랑하는 자식들도 모두 한 순간에 온 몸이 찢어져 나가는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만 살아남았다.

바로 그 순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미처 깨닫기 전에 힘겹게 눈을 뜬 내 앞에 펼쳐져 있는 모습은 지옥 그 자체였다. 한 순간 전에도 살아 숨쉬며 함께 살아가던 나의 가족들의 찢겨진 팔다리가 내 주변에 널려 있었고 나는 거대한 분노의 해일이 나 자신을 집어 삼키는 것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마치 또 한 번의 거대한 폭발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사방으로 튀어 날아가 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수 년 전 바벨탑의 컴퓨터가 봉인해버렸던 내 자신의 깊은 곳에 잠재된 능력이 다시 돌아와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나는 이 사람들과 다르다. 나에게는 이 사람들과 다른 능력이 있다. 그리고 나는 이 능력을 썩어빠진 사회를 개조하는 데에 모두 바치도록 하겠다는 깨달음과 결심이 함께 몰려 왔다.

나는 다시 일어섰다. 바벨 1세의 유산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나 자신만의 깨달음과 나 자신만의 싸움을 시작하기 위해 두 발로 우뚝 선 것이다.

 

혁명을 준비하다

그 이후 나는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나를 죽이기 위해 설치한 폭탄의 폭발 속에서도 생채기 하나 없이 살아난 나의 몸, 큼직한 돌덩이들을 수백 미터 바깥으로 날려 버릴 정도의 무서운 텔리키네시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고 지배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내 몸에 접촉한 생물체의 목숨을 단숨에 끊어 버릴 수 있는 충격파를 쏘는 힘,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체력, 점프력, 주행력, 근력, 이런 초능력을 가지고 사람들의 숭배를 받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간혹, 미약한 초능력을 한 두 가지 보유한 능력자들을 만나게 되면 그들 자신이 먼저 나서서 자신들이 그 동안 이루어낸 모든 것을 나에게 모두 바치고 나의 부하가 되기를 간청하기 시작했다. 일반인들은 모두 나에게 엎드려 경배를 하고 나를 신과 동일한 존재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내가 거느린 세력을 늘려가기 시작했다.

물론 일이 모두 쉽지는 않았다. 우리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될수록, 각국의 권력층들은 공포에 빠지기 시작했고, 그들이 가진 모든 힘을 동원해서 나와 내 주변의 세력을 파괴하기 위해 노력하곤 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힘이라는 것들은 모두 내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아이들 장난 수준에 불과하다는 점은 명확했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결정권자, 대부분 권력과 재물에 눈이 먼 독재자들에 불과한 그 인간들의 정신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국가들은 모두 내 명령대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나는 이 작은 사회 하나를 바꾸는 대신, 인류가 쌓아온 이 문명 세계 모두를 개조해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계는 있었다.

문제는 내가 어떤 한 사람의 생각을 완전히 뜯어 고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또한 동시에 수백 명 이상의 정신을 지배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결국 내가 능력을 사용하는 동안은 나의 명령에 복종하겠지만, 그런 지배는 한 순간에 불과했고 내가 능력을 사용하는 것을 멈추는 순간, 그는 또 다시 자신만의 정신을 회복해서 나에 대한 저항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내가 가진 능력만으로는 이 세상을 바꿀 수 없고, 일거에 시스템을 완전히 바꿔버릴 정도의 거대한 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달았으며, 이런 세력을 기존의 국가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길러 나가기 위해서는 음지에 숨어 준비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내 본거지를 히말라야 산맥의 설경 속으로, 인류의 발길이 닿지 않는 그 깊은 곳으로 옮겼고 거기서 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뜯어 고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준비한 본거지에서 나는 과학자들을 포섭해 생명공학을 연구하게 했고, 공학자들을 불러와 차원이 다른 무기 체계를 개발했으며, 나만의 군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개조한 인간들을 양산해서 각국의 요직에 스며들게 만들었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비전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단 몇 년의 시간만 더 있었다면, 나는 내 임무를 다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 계획대로라면 이 세상은 한층 더 진보한 문명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며, 분쟁과 혼란은 영원히 종식되었을 것이고, 인류는 약자를 보호하며 강자는 양보할 줄 아는, 모든 구성원이 자신의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미래의 문명사회, 완벽한 보편 복지가 구현된 행복한 사회, 모든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기본소득이 주어지는 그런 사회를 건설하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확신하고 있다.

그런 나의 비전이 한 순간에 무너지고 송두리째 붕괴된 것은 바로 그 시점이었다.

바벨 2세가 나타난 것이다.

 

바벨 2세와의 조우

그 때까지도 나는 기억을 되찾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저 나에게 특이한 능력이, 그것도 엄청나게 많다는 점, 내가 다른 인간들과는 달리 늙지 않는다는 점만 알고 있었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에 24시간 365일 매진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방해자가 등장했다. 그것도 내가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강자. 나 자신보다 훨씬 더 강력한 자질을 보유한 그 아이. 그리고 나도 기억하지 못하던 바벨 1세의 유산을 독차지한 그 얄미운 놈. 전설의 세 부하들의 보호를 받는 그 아이가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정말로 그 아이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한 일본의 가정집에서 태어난 소년이었으며, 평범한 학교 생활을 하다가 나와 유사하게 기이한 꿈을 꾸기 시작했고, 바벨탑의 초청을 받아 로프로스를 타고 바벨탑에 가게 된 것뿐이다. 그리고 그와 나의 결정적인 차이는 그저 그가 가진 유전자가 바벨 1세와 좀더 일치한다는 것뿐, 겨우 몇 %의 차이일 뿐.

아직 자신의 길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 아이, 이 세상을 어떻게 바꿔야 한다는 미래에 대한 비전도 없던 그 아이, 그저 이 세상의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 변화보다 더 나은 것이라는 착각, 그게 흔히 말하는 세계 정복을 꿈꾸는 악당으로부터 지구의 평화를 지키는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기득권의 논리를 답습하던 그 아이.

그리고 나와 똑같이 생긴 외모를 가진 그 아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 턱에 수염도 나지 않은 그 애송이보다는 아름다운 수염을 기른 내 모습이 훨씬 더 멋있었다는 것은 나만의 주장은 아니다. 최소한 외모로는 내가 우월했다.

처음 만나게 되던 날, 나는 그 아이가 나의 모든 계획을 붕괴시킬 위험한 아이라는 점을 미처 깨닫지도 못했다. 그것은 나의 불찰이다. 아직 능력이 채 완성되지도 않은 그 아이를 그 자리에서 제거했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너무나 쉽게 생각했다. 여태껏 수십 년 동안 나를 능가하는 인간을 한 번도 보지 못했고, 그 결과 자만에 빠졌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흔하게 발견되는 별 것 아닌 보통의 초능력자인 줄로만 알았다.

급기야 그 아이는 내가 진행하던 모든 계획들을 하나 하나 망가뜨리기 시작했고, 방해하기 시작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내 조직들은 그 아이에 의해 하나 하나 붕괴하기 시작했으며, 뜻하지 않은 방해 세력이 등장하자 나의 부하들 역시 하나 둘 의심을 시작했다. 약자들은 원래 자신들이 섬기는 주인보다 더 강한 존재가 나타나면 그 믿음이 흔들리기 마련이라는 점은 나도 이해한다. 나는 내 자신이 그 아이보다 더 강한 존재라는 것을 우선 내 부하들에게 먼저 입증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고 그 아이를 추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찾아낸 사실은, 놀랍게도 내 자신이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한 번 방문했던 적이 있던 사막 한 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구조물, 바로 바벨 1세의 유산인 바벨탑이 그 아이의 집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무서운 사실을 깨닫고 나서 나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 내 안에 봉인되어 있던 기억을 해제하기 위해 노력을 했고, 그 노력은 성과를 거두었다. 모든 것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저 아이는 나와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나의 쌍둥이 동생, 그러나 나보다 단 몇 % 더 많은 유전적 우월성을 가진, 쉽게 말해 혈통이 더 좋은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바벨 1세의 후예가 되었고 나는 되지 못했고.

이제 나는 내가 그 동안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동원해서 내 아버지 바벨 1세의 유산을 모두 물려 받은 저 괴물 같은 녀석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전쟁, 그리고 패배

인류의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몇 차례의 큰 전쟁이 있었다. 물론 내가 보유한 거대한 세력과 단 세 부하만 거느린 아이 하나와의 전쟁이었다. 그러나 그 아이의 뒤에는 바벨 1세의 유산이 있었던 것이다.

초기의 상황과는 달리 갈수록 전세는 불리해졌다. 내가 거느린 군대는 애초에 그 아이의 적수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 아이 하나인데, 언제나 불시에 나타나 내가 애써 일구어 놓은 나의 지부를 다 때려 부수고, 내가 나타나면 도망을 가는 바벨 2세의 교활한 전술 앞에서 내가 거느린 거대한 세력은 무용지물이었다.

아직은 자신의 능력이 완성되지 않은 것을 알고 있던 (알긴 뭘 알아, 바벨탑의 그 얄미운 컴퓨터가 알려 줬겠지.) 바벨 2세는 나와의 직접적인 대면을 애써 피하며 애꿎은 나의 사랑하는 부하들은 족치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슬슬 불안감이 엄습했다. 바벨 2세가 거느린 저 막강한 세 부하의 힘을 어떻게 무력화 시킬 수 있을까? 바벨 2세의 명령에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저 외계의 무기에 내 부하들이 버텨낼 도리는 없었다. 뭔가 중요한 프로젝트만 있으면 나타나서 다 때려부수고 약 올리듯 사라지는 그 녀석들 때문에 이제는 아무런 일도 할 수가 없는 지경에 빠져 버리게 되었다.

이대로 이 싸움을 지고 마는 것인가 하는 절망감이 드는 순간 나는 한가지 힌트를 얻어내기도 했다. 왜 이 단순한 생각을 미리 하지 못했던가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나와 바벨 2세는 동일한 인간이라는 점이었다. 결국 그 세 부하는 나의 부하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바벨 2세가 자신들의 주인임을 입증하는 것은 그가 가진 특유의 정신력뿐이다. 그 정신력은 나에게도 있었다. 내가 하는 명령을 그 세 부하들이 듣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내 예측은 적중했고, 세 부하들은 나의 지시를 따르게 되었다. 아마 이 때가 바벨 2세의 최대의 위기였던 것 같다. 세 부하들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바벨 2세는 그저 초능력을 조금 쓸 줄 아는 어린 아이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바벨 2세를 끝장 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긴 싸움이 진행되는 동안 바벨 2세의 정신력이 내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빠르게 완성되어 가고 있던 것이다. 이미 그 시점에서는 수십 년간 길러온 나의 그것을 능가했었다. 결국 나는 세 부하를 통제하기 위해 기계의 도움을 빌어 내 능력을 증폭해서 사용했어야 하고, 그 결과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왔을 때, 바벨 2세도 나도 두 명의 주인이 모든 에너지를 소모해 버리고 탈진상태에 빠져 버린 것이다.

세 부하는 혼란에 빠졌고 내 부하들도 혼란에 빠졌다. 싸움은 중지 되었고 결판을 내지 못했다. 결과는 무승부였지만 긴 싸움의 흐름 속에서 나는 완전히 패배했다.

그와 내가 모두 빠져버린 탈진 상태에서 회복되었을 때 이미 바벨 2세의 능력은 나를 완전히 초월해 버리게 된다. 수십 년간의 노력이 있으면 뭐 하겠는가? 젊은 놈을 어떻게 당해. 이미 삭아가는 중년의 슬픔을 곱씹으며 내가 회복했을 때 이미 히말라야에 자리잡은 나의 중심 본거지는 거의 대부분 파괴된 상태였고, 나의 부하들은 모두 흩어져 버린 상황이었다.

죽을 고비를 넘길 때 마다 강해지는 초능력자들의 특성상 바벨 2세는 이제 완전히 각성해 버렸고 나 혼자서는 절대 당할 수가 없는 경지로 올라가 버렸다. 나는 지난 수십 년간 끌어올려 사용해 버린 정신력 낭비의 결과로 인해 제대로 회복하지도 못하는 중늙은이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싸움은 나의 패배로 끝났고, 바벨 2세는 나를 죽였다고 세상에 알린 뒤 남들 몰래 나를 바벨탑 내부의 캡슐에 영원히 봉인해 버린 것이다.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조치였다.

나는 그렇게 눈 뜬 시체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여태껏 해 오던 그대로, 약육강식의 정글을 유지했고, 죽어라 내 말을 안 듣던 리버태리안들이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전 세계를 뒤덮었으며, 양극화 문제는 심각해 지고 있으며 내가 사회민주주의의 정신 하에 그렇게 열심히 개조해 놓은 북유럽에서조차 복지 정책들이 후퇴하는 그런 세상이 되어 버렸다.

나의 간섭이 중단되자 미국에서는 금융위기가 발생해서 수없이 많은 시민들이 집을 잃어 버리게 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진 자들은 뻔뻔하게 정부의 막대한 구제금융을 요청하는, 뻔뻔하기 그지없는 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무엇이 중요한가

모짜르트의 천재성이 중요한가? 살리에리의 노력이 중요한가? 아무도 못 알아보던 모짜르트의 천재성을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이 바로 살리에리이다. 신은 그에게 모짜르트의 천재성을 주는 대신 그 천재성을 알아보는 능력만 주며 살리에리를 가지고 놀았다.

바벨 1세는 자신이 불시착한 이 지구에 살아가고 있던 인류를 경멸했다. 자신은 신으로 숭배를 받으면서도 이 인류에게는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 틀림없다. 심지어 누가 될지도 모르는 바벨 2, 즉 자신의 적자에게, 너에게는 이 세상을 구할 의무도 없으니, 내가 물려준 이 힘을 네가 쓰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쓰라는 식으로 무책임한 유언을 남긴 인간이다. 아니 참, 외계인이지.

하지만 그의 피를 물려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테스트 통과에 실패한 나는 오히려 이 세상을 구하고 인류를 구하기 위해, 누구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문명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을 한 것이다.

다시 묻는다. 무엇이 중요한가? 혈통인가? 노력인가?

그리고 그 순수한 노력을 방해한 존재, 내가 세운 원대한 문명사회 개조 계획을 성공 직전에 나타나 짓밟고 방해한 존재가 바로, 이 세상을 그저 되는 대로 굴러가게 내버려 두는 것이 이 지구의 평화를 지키는 길이라고 바보같이 믿고 있던 그 바벨 2세라는 애송이 녀석이었던 것이다.

그가 이 사회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소작인의 슬픔을 이해하겠는가? 저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자의 애환을 알겠는가? 자본의 힘 앞에 생존권을 박탈당한 수많은 민중들의 슬픔을 알겠는가?

단지 몇몇 기득권자들의 꼬임에 빠져 세상을 개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느니, 인류는 지금 이대로가 좋다느니 하는 터무니 없는 생각을 하면서 지금도 바벨탑 엔터테인먼트 룸에 쳐박혀 덕후질이나 하고 있는 어린 아이에 불과한 그 바벨 2..

아마 만약 누군가가 또 나타나 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려고 노력하는 순간 그는 마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바벨 2세의 공격을 받게 되고, 지구의 평화를 위협하는 악의 무리라는 오명을 쓰게 될 것이다. 저 아이는 그렇게 자기 자신이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인류를 사랑했다. 모든 박해 받는 사람들, 모든 탄압받는 민중들을 구원해 주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지배하려는 악당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정의의 사도 바벨 2세에게 패해 죽은 걸로 되어 있다. 심지어 나는 죽지도 않고 이렇게 살아있는 시체가 되어 이 세상을 지켜 보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제 답을 해 보시라. 과연 누가 악당인가? 바벨 2세인가? 나인가?

나의 이름은 “요미”다. 이렇게 살아온 나, 내가 과연 그렇게 나쁜 놈인가?

 

 

끝.

 

(* 고종석님의 지적을 받아 살리에르라고 잘못 쓴 이름을 모두 살리에리로 수정함. *)







1 thought on “바벨2세를 저주하며

  1. 오래전 좋아하던 만화를 이렇게 분석하시니 나이를 먹은후 많은 생각이 드네요. 과연 어릴적 영웅이라고 생각했던 그 인물이 정말 정의로운 사람인가라는.. 그리고 그 정의라는 것이 진정으로 대중들에게 도움이 될것인가 하는점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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