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을 만들어 보지 못한 나라

(* 이 글은 딴지일보에서 발행하는 “더딴지”에 실렸던 글입니다.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여기에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

 

모두가 충격을 받았다.

그것도 보통 충격이 아니다. 아주 깊숙한 나의 내면이 난자 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의 아이들이, 또 수많은 선량한 우리의 이웃들이 생기지 말았어야 할 사고와 그 사고에 대처하는 형편없이 무능한 우리 사회의 시스템에 의해 한 순간에 차가운 물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 중 단 하나도 구하지 못했다. 제 발로 뛰쳐나온 몇몇의 사람들만 동료를 잃은 슬픔 속에서 살아남았을 뿐이다.

일찍이 이렇게 오랜 시간을 슬픔과 분노에 시달려 본 적이 없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일주일이 지나고 보름이 지나도, 이제는 좀 안정이 되었으려니, 이제는 평정을 좀 찾았으려니 해도 순간 순간 울컥거리는 것이 목을 거꾸로 타고 오르고, 머리 속이 새하얗게 될 정도의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경험을 수시로 하게 된다.

의도적으로 뉴스를 피하고, 의도적으로 사람의 감정을 건드릴만한 컨텐츠들을 피하려고 노력해도 어쩔 수 없이 보게 되는 것 만으로도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눈물이 흐른다.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들의 아이가 차갑게 굳어버린 모습으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 마다, 그렇게 돌아온 아이들이 영안실에 누워 있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과연 그 아비는, 그 어미는 이제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저려온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부처님 오신 날 같은 밝은 오월의 나날들이 누구에겐가는 차갑게 식은 자식들이 품으로 돌아오는 비극적인 날이 되어 버리는 모습으로 인해 검게 퇴색해 버리고 만다.

도대체 이 비극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우리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길래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만든 이 나라는 왜 이렇게 망가져 있는 것일까?

아니다. 틀렸다. 우리 사회는 망가져 있는 것이 아니다. 망가진다는 것은 제대로 되어 있던 것이 무언가 문제가 생겨서 제 기능을 할 수 없도록 고장이 난다는 뜻이다. 과연 우리 사회가 제대로 되어 있던 적이 있는가? 이제와 돌이켜 보니 그런 시스템 따위는 우리 사회에 없었던 것이라는 점이 너무나 명확하게, 너무나 뼈아프게 가슴에 와 닿고 있다.

2014년 현재, 인류가 달에 첫 발을 올린 지 45년이 지났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친구와 실시간으로 얼굴을 보며 대화를 나눌 수도 있는 이 시대에 우리는 왜 가장 기본적인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사회 시스템조차 못 갖추고 아둥바둥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수백 명이 타고 가는 여객선을 무리하게 개조를 하고, 과적을 하고, 과적을 하기 위해 배의 복원력을 담보할 평형수를 빼 버리고, 배를 모는 선장이 불안해서 운행을 못하겠다고 할 정도로 위험하게 뒤뚱거리는 배가 수백 번이나 그 긴 항로를 오가는 동안에도 어느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그 과정에 연루된 사람들은 한 두 명이 아닐 것이다. 그 사람들 전원이 아무도 이 문제를 바로잡지 못했다. 모든 사람이 마치 사전에 서로 각본에 의해 짠 것처럼 모두가 외면을 했다. 그리고 이제 와서 서로 서로 네 탓을 하며, 누구를 희생양을 만들 것인가 하면서 탐욕과 공포로 충혈된 눈을 부라리며 주위를 살펴보고 있다.

사고가 난 뒤에도 그 수많은 죽어가는 어린 생명을 모른 체 하며 어떻게 해야 한 푼이라도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내 자리를 보전할까 하는 생각에 잠겨 도대체 몇이나 타고 있었고, 몇이나 죽었는지 헤아리지도 못하고 있다. 세상에 이런 사회가, 이런 지옥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시스템이 없는 나라

조선왕조가 몰락하던 시절, 우리 손으로 왕정을 폐지하고 근대적인 공화국을 수립했어야 하는 시점에 우리는 일제의 지배를 받고 말았다. 혹자는 일제가 우리 사회를 근대화 시켰다고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제는 철저하게 수탈을 목적으로 하는 근대화를 수행했을 뿐이다. 우리는 그 비뚤어진 근대화의 과정에서조차 철저하게 타자가 되어 수동적으로 이끌려 다녔을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손으로 우리가 사는 사회를 구성할 시스템을 만들어낼 시간과 기회를 날려 버렸다. 그리고 나서 또 한 번 찾아온 기회, 연합국의 승전으로 인한 일제의 패망을 맞이하면서 찾아온 기회도 역시 날려 버리게 된다.

미국의 이해를 정확하게 대변하는 이승만이 남한 사회의 정권을 잡게 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손으로 시스템을 설계하고 구성해 내는 경험을 해보기는커녕, 일제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을 그대로 물려 받아 얼기설기 짜맞추고 있었을 뿐이다. 오히려 우리에게 그런 시스템을 남겨준 일본은 자신들의 시스템을 다음 단계로 발전시키고 있는 동안에도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과거의 낡아빠진 시스템을 신주단지 모시듯이 떠받들고 있었을 뿐이다.

뒤이어 찾아온 민족적인 비극, 전쟁을 맞이해서 초토화 되어버린 국가를 재건하는 과정은 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진 세 번째의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기회조차 온전히 받아 들이지 못했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토를 재건해야 한다는 의무이자 기회 앞에서도 우리는 독재자 이승만의 전횡을 막기에 급급했으며, 겨우 겨우 쫓아낸 이승만의 빈자리는 일본 제국군 출신의 또 다른 독재자가 차지해 버렸을 뿐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매년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쫓겨, 동물적인 생존본능을 대치해 버린 금전적인 부를 얻고자, 그렇게 얻은 부를 축적하고자 하는 광기 어린 경제발전만이 우리의 모든 관심사를 차지해 버렸던 것 같다. 그 이후 현재까지 우리에게 돈 이외의 어떤 가치가 사회적으로 존중 받았던 적이 있던가?

봇물처럼 터져 나온 87년의 함성 역시 두 번 다시 돌아오기 힘든 80년대의 경제적 호황에 힘 입은 것이었을 뿐이라고 얘기해도 그다지 큰 반론은 없을 듯 하다. 그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금쪽같은 기회와 시간들을 날려 버리는 동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전혀 근대화 되지 못한 상태 그대로 남아 있었고, 우리는 남에게서 빌려온 껍데기만의 시스템을 가지고서도 단순히 오가는 돈의 규모만 커진 우리의 나라를 마치 세계 10위권의 선진국이라도 된 양 거들먹거리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알맹이 없는 쭉정이 같은 나라의 추하기 짝이 없는 맨 얼굴을 이제 와서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통해 너무나도 생생하게 맞닥뜨리게 되어 버린 것뿐이다.

세월호 사건은 나에게 그렇게 날이 선 핏빛으로 다가왔다.

 

무릎을 꿇다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할까? 그저 우리 모두가 스스로를 속이고 눈 가리고 아웅하면서 이런 세상을 만들어 왔을 뿐이다. 우리가 만들어낸 괴물이 우리의 목을 조르고 있을 뿐이다.

물론 모두의 잘못이라고 얘기하면서 실질적인 책임자들의 문제들을 눙치고 넘어갈 생각은 전혀 없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이 모양 이 꼴인 이유가 그런 짓을 반복해 왔기 때문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진심으로 우리 사회의 허술함을 걱정하는 사람들의 힘은 좁쌀만하고, 돈과 권력을 쌓아놓고 이 사회를 자신들의 먹거리 사냥터로 생각하며 약자들의 죽음은 그저 문서상의 숫자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의 힘은 세상을 덮고 남는다. 이 와중에 진짜 책임자들의 처벌은커녕 과연 누가 잘못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진상이라도 확실하게 밝혀질 가능성은 있기나 한 걸까?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아 힘이 빠진다. 어디서부터 단추를 새로 끼워야 하는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거슬러 올라갈 곳조차 보이지도 않는다. 근 백 년이 넘어가는 세월 동안 누적되어 온 우리의 잘못의 두께는 끝 모를 벽처럼 눈앞을 가로막고 있어 넘어갈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먼저 사고를 일으킨 장본인인 청해진 해운과 승무원들을 처벌해야 한다. 복마전 같은 회사의 내부를 탈탈 털고 실질적인 소유주에게 가할 수 있는 최고의 처벌을 가하고 그간 부당하게 긁어 모은 재화를 모두 토해낼 수 있도록 쥐 잡듯이 잡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이 회사 말고 다른 회사에서는 또 어떤 짓을 하고 있었는가도 뒤져 봐야 한다. 그대로 놔두면 어디에선가 이런 사고는 또 터질 것이다.

그리고 그 회사의 불법적인 활동을 평소에 감시했어야 하는 해경, 사고가 터진 뒤 최선의 대처를 통해 사람들을 구해 냈어야 하지만 두 손 놓고 구경만 하면서 수도 없이 많은 생명을 수장시켜 버린 무능하기 짝이 없는 해경을 잡아야 한다. 조직을 해체하는 수준으로 재정비 해야 하며, 관련자 모두는 다시는 동종의 직에 근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

해경을 감독해야 하는 해양수산부의 책임을 물어야 하며, 해경이 해야 할 일을 떼어내서 뭉터기 돈을 떠 안겨 주기 위해 만들어진 한국해양구조협회를 처벌하고, 그런 조직에서 나오는 이권을 바라고 모여든 자들을 수사해야 한다.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해 도와준 국회의원들을 조사해야 하며,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확인해서 재발을 막아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감시 감독하고 조직을 정비하고 제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는 최종적인 책임을 가진 대통령을 처벌해야 한다. 아니 그 이전에, 구할 수 있었던 생명을 죽게 만든 그 죄를 물어, 생명의 대가에 상응하는 죄값을 받아 내야 한다.

아주 기초적이고, 모든 일의 시작에 불과한 이런 일들이 과연 가능할까? 그저 애꿎은 몇몇을 희생양 삼아 대문짝 만하게 언론에 실어 주고 처벌하는 시늉만 내고 조직과 시스템은 또다시 과거처럼 굴러갈 것이 뻔하게 보이지 않는가?

대책을 생각해 볼수록, 또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머리 속에서 그려볼수록, 그 무게감에 짓눌려 숨쉬기조차 불편해진다. 그리고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어느새 내 다리는 휘청거리고 무릎을 꿇게 된다.

이런 사회에서는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는데, 더 이상 한 순간도 마음 편하게 살아갈 수가 없는데도, 그저 꾸역꾸역 개돼지처럼 목숨만을 연명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아니 그 목숨 마저도 언제 어디서 갑작스레 빼앗겨 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내 무릎을 꿇게 만들고 있다.

 

경험이 필요하다

결국 우리가 우리의 손으로 시스템을 만들어 보지 못한 탓이다. 그저 남들의 것을 베껴 오기에 급급해서 그게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안전 기준이 어떤 의미인지, 왜 있는 것인지, 그렇게 귀찮고 돈만 잡아먹는 불필요해 보이는 규정들이 거기에 왜 있는 것인지 진심으로 느껴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그저 남들이 하니까 우리도 따라서 잘난 척 하려고 넣어둔 규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안전 기준만 그런가? 헌법에 보장된 노동 3권 같은 조항들이 거기에 왜 들어가 있는지 진지하게 이해해 본 적이 없다. 기업 하기에 불편한, 돈 벌기에 불편한 조항들을 그저 멋있어 보이려고 넣어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집회와 시위에 대한 권리가 왜 헌법에 적혀 있는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소란스럽기만 하고 정부의 시책에 방해만 되는 그런 짓거리들을 왜 하는 것인지 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약자를 보호하는 규정들이 왜 있어야 하는지, 증오 범죄는 무엇이며 그 처벌은 왜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다.

표현의 자유는 왜 보장되어야 하는지, 공무원들은 왜 정기적으로 감사를 받아야 하는지, 세금에는 왜 누진세율이 적용되어야 하는지, 기업은 왜 세금을 내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저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따라 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 사치스럽고 불필요해 보이는 조항들을 어겼을 때 우리 사회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몰라서 그러는 거다.

그러니까 겪어 봐야 한다. 안 겪어 보고 우리가 우리의 시스템을 만들 수 있을까?

빈부의 격차가 무한대로 심해질 때 사회가 어떻게 붕괴하게 되는지, 집회 및 시위의 권리가 침해되었을 때 이 사회가 어떻게 파시즘으로 물들어 가는지, 약자를 보호하는 조항들이 무너졌을 때 내 옆에 있던 친구가 어떤 식으로 죽어가게 되는지, 노동 3권이 지켜지지 않을 때 우리들 중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어떤 꼴을 당하게 되는지 겪어보지 않고서는 우리는 결국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아직 서구 유럽의 선진국 사람들이 피를 낭자하게 흘리며 수백 년간 겪어 왔던 경험을 갖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어떤 무서운 경험을 통해서 그런 불필요해 보이고 별 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이는 사소한 조항들을 강박증 걸린 환자들처럼 지키면서 살아가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경제는 초고속 성장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근대화는 압축 진행이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어떤 수업료를 치르더라도 우리가 놓치고 건너 뛰어 버린 고통스러운 근대화의 과정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수업료는 도대체 얼마나 비쌀까? 우리가 그 수업료를 감당이나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바보가 아니다

우리는 사람이다. 사람은 추상의 능력이 있는 존재다. 이미 남들이 겪은 일들을 똑같이 겪어 봐야만 이해할 정도로 무지하지 않다. 물론 우리들 각 개인은 충분히 그럴 정도의 지능은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게 개인의 범주를 넘어서 사회적 규모로 확대되면 왜 이리도 무지한 것처럼 보이는지 모르겠다.

비록 우리 손으로 만들어 보지 못한 시스템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쌓아온 세월이 있는데 그 시스템이 가지는 의미를 우리 사회는 진짜 영영 이해하지 못해야 하는 것일까? 경험이라는 비싼 수업료를 치르기 전에는 절대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분명히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것이 아닌 남들의 경험을 가지고도 충분히 우리의 앞날을 예측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리고 그 시스템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저 보기에는 불필요하게 보이지만 바로 그 불필요해 보이는 작은 장치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존재를 지켜줄 유일한 방어책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귀찮고 힘들더라도 서로서로 그 규정들을 지켜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최소한 우리는 그렇게까지 바보는 아니다.

갑자기 쏟아지는 돈벼락을 맞은 졸부처럼, 내 생존을 지켜줄 유일한 존재가 돈이라고 생각하는 아둔한 수전노처럼 돈에 눈이 어두워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잊고 살아온 세월이 이어지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해 본다.

그리고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늦지 않게 우리의 눈 앞을 가리고 있는 검은 돈의 장막을 걷어내고, 우리 스스로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고 우리 가족의 안전을 보호하고 우리 주변의 약자들을 보호하고 나아가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평안을 지켜줄 시스템을 우리 손으로 직접 설계하고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본다.

근거 없는 낙관이라 해도 좋다. 그렇게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라고 믿을 뿐이다. 이는 판단도 아니고 논증도 아니다.

 

그저 나의 작은 신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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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thoughts on “시스템을 만들어 보지 못한 나라

  1. 정말 좋은 이야기 입니다. 제가 아는 많은 이들에게 읽게 하고 싶은 생각이 드네요.
    다만, 제가 있는 곳이, 스스로를 보수적이라 생각하며, 정부나 대통령, 심지어는 집권여당에 대한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 곳이라 재 전파가 쉽지 않겠습니다.
    제가 이 글을 공유하면, 글 중에 있는 몇몇 표현 때문에 저를 자신들의 잣대로 평가해서, 부당한 대우를 할 것이 눈에 선하니까요.

    이런 경우가 저한테만 생기는 건 아닐 것 같습니다.

    사실 위글은 어디하나 뺄것 없이 잘 쓰여졌고, 특히, 우리나라에서 제대로된 시스템 구축은 요원한 일이라는 점이나, 과정을 겪어오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다는 추론은 크게 공감가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 전직 대통령이나 현직 대통령에 대한 언급을 제 조직에서는 받아들이지 못하죠.

    그런 표현이 없다면, 그런 조직들에도 이런 좋은 글들을 전파할 수 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물론, 이런 것들은 자기 검열일 수도 있겠죠.
    혹은, 좀 더 오른쪽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다른 정보를 전할 방법을 확충하는 꾀 일수도 있을 테고…

  2. 위 댓글에 이어서..
    저런 상황인데, 혹시 일부분만 발췌해서 공유해도 될까요? ^^
    물론 맞는 행동은 아니지만, 허락해주시면 캄사…
    (일부 발췌하더라도, 박성호의 ‘시스템을 만들어 보지 못한 나라’에서 인용했다는 표기는 당연히 해야죵)

    1. 허락해 드리겠습니다. 어지간하면 발췌나 수정 편집은 좀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앞 댓글의 내용을 고려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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