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광주를 말하다: 5월의 전조

비더슈탄트, 5월의 광주를 말하다.

1. 5월의 전조

 

역사가 항상 역사로만 끝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물론 역사가 기록의 형태로 남아, 후일 우리의 삶에 지침의 형태로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 그 자체가 지금까지 영향을 끼치는 경우도 많다. 특히 아직도 그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현대사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아마 그런 역사 가운데에 가장 뜨거운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역사는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이겠다. 여전히 그 어두운 시대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이들이 힘을 갖고 있기에 그렇고, 여전히 민중에게 총부리를 겨눈 독재자가 살아있기에 그렇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전히 많은 것이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다.

 

오늘은 그래서 오래 전에 썼던 글 한편을 다시 불러온다. 2013년 초에 썼던 글이다 보니 여기저기 손볼 곳이 많아서 편집은 다시 했지만, 내용 자체는 변함이 없다. 글을 쓰던 때에도 2년 안에 무언가 혁명적으로 바뀔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막상 2년 전의 글을 찬찬히 살펴보니 황망한 느낌이 몰려온다.

 

하지만 여전히, 침몰하는 대한민국 호를 인양할 수 있는 것은 진실이라고 믿는다. 19805월로, 돌아가 보기로 하자.

 

 

5월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선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봐야 하겠다. 이야기는 19791026일에서부터 시작한다. 입법ㆍ행정ㆍ사법의 3권을 모두 대통령 아래에 귀속시킨,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유신의 시대는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으로 갔다. 정국은 혼란스러웠다.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대행을 거쳐 대통령이 되었지만 실질적 권력은 최규하에게 가 있지 않았다. 권력은 잡은 사람은 오히려 다른 사람이었다.

 

그가 바로 전두환이었다. 전두환은 육군본부 보안사령관이면서, 1026 사건을 조사하는 합동수사본부의 본부장이었다. 그는 이내 자신과 권력 싸움을 벌이고 있던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1026 사건에 연관이 있다며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대통령의 재가 없이 체포하고, 군대 내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는 ‘북괴남침설’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군부 내의 권력을 넘어서 정치권력 전반을 손에 넣으려는 야심을 점차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박정희라는 독재자의 죽음은 민주화의 시발점으로 삼기 충분한 계기였고, 신민당과 (심지어) 공화당 등 정치권은 민주화를 위한 개헌 일정을 앞당기며 민주적 개헌 논의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울의 봄’이라는 이름의 학생 시위도 봇물 터지듯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정도 해 두고 515일로 가자. 1980515, 서울역 앞에는 10만여 명의 대학생과 시민이 자발적으로 모여 계엄령 해제와 민주주의 회복을 외쳤다. 그래, 그 날은 ‘서울의 봄’의 절정이었다. 10만여 명을 이끌고 집회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8시를 넘기자 집회를 주도했던 운동권의 핵심 멤버들은 회의에 들어갔다. 너무 많은 인원이 모여 통제가 어려운 상황이고, 시간이 늦으면 시위대의 귀가 시 안전이 우려되기 때문이었다.

서울의 봄2

 

당시 이 자리에 모인 대표적인 멤버들은 심재철 (서울대 총학생회장), 신계륜 (고려대 총학생회장), 형난옥 (숙명여대 총학생회장), 이해찬 (서울대 복학생 대표), 유시민 (서울대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 이수성 (서울대학교 학생처장) 등이다. 지금의 정치권에서도 듣기 어려운 이름들이 아니다. 사진 한 장이라도 찍어 뒀으면, 꽤나 역사적인 장면이 됐을 수도 있겠다.

 

아무튼. 그런데 여기서 ‘매파’ 유시민과 ‘비둘기파’ 심재철의 주장이 갈린다. (이 부분에서 유시민이 매파였는지 어떤지는 확실한 바는 아니다. 다만 당시 매파와 비둘기파가 갈렸던 것은 사실이며, 유시민이 매파에 속했던 것은 일각의 주장이다.)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많은 인원이 모였다. 통제가 불가능하다. 이대로 청와대로 진군했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심재철)

 

여기서 해산하자는 것은 자살하자는 것과 같다. 여기서 물러나면 신군부가 어떤 보복 행위를 할지 모른다. 이대로 밀고 나가야 한다. 결단코 오늘 밤,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 (유시민)

 

여기서 잠깐 심재철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뭐 읽다 보면, 심재철이 주장했던 퇴각이 앞으로 어떤 참사를 불러오는 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제부터 할 이야기에 대해, 우리의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책임보다 그가 가진 책임이 더 큰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미리 앞질러 이야기를 해 보자면, 심재철은 이 사건 이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증인으로 서게 된다. 이 사건에 연루되었던 증인들은 대부분 김대중이 내란 음모를 꾸몄다고 증언했었다. 왜 그렇게 됐는지는 나도 잘 모르는데, 남산에 한 번 다녀오면 알게 된다고들 하더라.

 

뭐 아무튼, 그런데 내란 음모가 있었다는 거짓 증언을 했던 증인들은 모두들 자신의 증언이 고문으로 인한 허위 자백이었음을 법정에서 밝혔다. 하지만 심재철만은 자신의 증언을 철회하지 않았고, 결국 김대중의 내란 음모죄는 성립되어 사형이 선고된다.

 

이 때 김대중은 말했다.

 

이 땅의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 정치보복이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해 달라.

 

이 말은 바다를 건너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귀에, 로마 교황청의 귀에, 국제엠네스티의 귀에 들어간다. 퇴임하는 카터 대통령은 로날드 레이건 차기 대통령에게 “김대중만은 석방시켜 달라”고 부탁했고, 교황청과 엠네스티 역시 김대중의 석방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김대중은 사형의 위기를 넘겼다.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은 2004년 재심에서 무죄가 나왔다.

 

수인번호 9번 김대중수감중 김대중과 면회 온 이희호 여사

시간이 더 흐르고 나면, 심재철은 새누리당의 국회의원이 된다. 사실 국회에서 뭐 하시는지는 잘 모르겠다. 뉴스에서는 국회 본회의장에서 스마트폰으로 ‘누드 사진’ 검색해서 보다가 걸린 거라든지, 세월호 사건을 ‘개인 회사의 잘못’으로 치부하며 ‘유가족이 보험금으로 45천만 원을 받았다’고 허위사실을 유포한 것 밖에는 보지 못한 것 같기는 하다.

 

주제에 맞지 않는 내용이 너무 길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정치인의 과거를 아는 일은 중요한 것 아니던가, 하는 핑계를 대며 어물쩍 넘어가 보기로 하자.

 

다시 515일 밤, 결국 심재철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이에 따라 이수성은 내무부 장관과 총리 비서실에 전화를 걸어 모든 시위 군중의 안전귀가를 약속받았다. 그렇게 심재철은 해산을 선언했다. 이 사건이 바로 ‘서울역 회군’이었고, 서울역 회군을 마지막으로 짧지만 강렬했던 서울의 봄은 끝을 맺는다.

 

, 물론 인정한다. 심재철이 없었더라면 그날 밤, 10만 명의 군중은 신군부의 총탄에 희생되었을지도 모르지. 몇몇은 ‘심재철이 대한민국을 구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다. 군중들이 해산하지 않았더라면 신군부는 그들을 강력하게 진압했을까. 물론 자신의 정권을 위협하는 민중을 그냥 두는 독재자는 없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날 서울역에서 회군하지 않았더라도, 광주에서의 참사와 그 뒤로 수년간 국민들이 겪어야 했던 독재의 칼날이 변하지 않았을까, 종종 고민해보곤 한다. 아무튼 이 결정으로 광주에서 참사가 일어나고 신군부가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아니던가.

 

역사에 가정법은 없다. 다시 돌아가자. 전국총학생회장단은 516일부터는 정상수업을 받으며 시국을 관망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시국을 관망할 틈 따위는 없이 517일 새벽, 신군부는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며 517 쿠데타를 벌였다.

 

다음날 김대중 등의 정치인은 연행되었고,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가택에 연금당했다. 2600여 명의 재야 지식인들과 학생들이 이날 체포되었다. 비상계엄령 뿐 아니라 정치 금지령, 언론 검열령과 휴교령이 함께 떨어졌다. 군대는 대학교 안에까지 들어오며 학생들을 잡아들였다. 전북대학교에서는 군인들이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까지 잡아들여 폭행했으며, 이에 쫓기던 학생이 옥상에서 떨어져 추락사하는 일도 있었다.

 

전남대학교에서는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전두환은 이 시위 진압에 공수부대까지 투입하며 과잉 진압에 나섰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두환은 이때 대통령은 아니었다. 대통령은 최규하였다. 하지만 그는 보안사령관, 합동수사본부장, 중앙정보부장 서리,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 등 핵심 직책을 여럿 겸하고 있었고, 1212 군사반란 이후 계엄사령관이 된 이희성 사령관은 사실상 그의 지휘 아래에 있었다. (518 재판에서 전두환이 무기징역을 받은 것과 달리 이희성이 7년형 밖에 받지 않은 점을 보면 확인할 수 있겠다.) 전두환은 실제로 얼마 뒤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하자 곧 대통령에 취임했다. 당시의 정국은 전두환이 통제하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뭐 전두환과 518의 관련성 이야기는 끝에 가서 다시 하기로 하자.

 

어찌됐든 이날 진압은 너무 과했다. 시민이라면 시위에 참가하지 않았어도 곤봉 등으로 때리고, 특히 청각장애인 김경철 씨가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귀가하다 공수부대의 눈에 띄어 구타당하고 뇌출혈로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이쯤 되니 시민들은 점점 분노하기 시작했다. 전남대 학생들의 시위에서 시작된 이 사건, 공수부대의 과잉 진압으로 점점 일이 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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