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 ‘황혼의 투쟁’으로 본 남북관계

TS_BOX

깜짝 퀴즈.

냉전을 다룬 매체에 정말 많이 등장한 장소다. 저 게임 박스에 그려진 장소는 어딜까.

댓글에 달아주시라.

좋아하는 보드게임 중에 <황혼의 투쟁>(이하 황투)이라는 보드게임이 있다. 1945년부터 1989년 사이 치열했던 냉전 시기를 다룬 2인용 보드게임이다. 두 플레이어가 각자 미국과 소련을 맡아서 전 세계를 쥐락펴락하며 누가 냉전의 승리자가 될 것인지를 겨루는 게임이다. 지금 이 시간까지 유명 보드게임 사이트 ‘보드게임긱’ 랭킹 1위를 오랜 시간 차지하는 중인 명작 중의 명작이다.

제목부터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연설문에 나온 표현이다. Twilight Struggle.

내 보드게임 인생의 정신적 지주 중 한분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게임은 둘이서 하거나, 그 게임이 허용하는 최대 인원으로 하는게 제일 재미있다’. 2인용은 밀어주기, 외교, 협잡 따위의 변수없이 철저히 건조한 분위기로 전략을 겨룰 수 있다는 게 최대 장점이다. 바둑, 체스를 생각하면 되겠다. 최대 인원일 경우엔 역으로 그런 개 난장판을 머리 쥐어 짜면서 극복해 나가는 재미가 있다. 프로레슬링도 그렇지 않은가. 1:1 대박 매치도 재미있지만, 로얄 럼블은 사람이 많을 수록 재밌는거다! 그런 의미에서 황투는 2인용 게임의 진수를 보여준다.

일단 게임 시스템 자체가 ‘냉전’이라는 사건의 성격을 제대로 보여준다. 냉전 시기에도 물리적 전쟁이 있었지만 냉전의 가장 큰 줄기는 물리적 전쟁이 아니다. 이념, 정치력, 장악력의 싸움이다. 그리고 핵전쟁의 ‘위협’이 있었다. 정확하게 짚고 가자. 핵전쟁이 수단, 방법, 필살기가 아니라 ‘위협’이다. 실제로 상호확증파괴의 핵전쟁은 미소 양국을 항상 괴롭혔다. 이런 상황 만큼은 양자 모두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게임 내에서도 이 부분이 절절하게 그려져 있다. 게임 내에서 핵전쟁은 5단계의 위기 상황으로 묘사된다. 매 턴이 지날 때마다 핵위기는 평화의 방향으로 한 칸 씩 회복되지만, 줄줄이 일어나는 사건들은 어쩜 그렇게도 핵전쟁을 향해 달려가는지. 인류가 여태 살아있는 게 신기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세계가 평화를 원하건 말건 미소 양국은 패권을 잡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러다가 정말로 핵전쟁이 터진다면? 핵전쟁을 일으킨 원인을 제공한 플레이어가 게임에서 진다! 상대를 박살내고 이기는 것이 아니라 체제 경쟁에서 패배한 것으로 취급되는 것이다. 그래서 두 플레이어는 각자 핵전쟁 위협을 적당히 통제하면서 상대를 핵전쟁의 주범으로 몰아넣으며 게임을 진행하게 된다. 게임에서 이길 수 있는 수단으로 유럽 전체의 장악과 승점 우위가 있지만 역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핵전쟁이다.

이렇게 숨 막히는 시스템을 바탕으로 게임속 수많은 카드들이 실제 역사를 다룬다. 패망한 독일의 나치 출신 과학자 영입 경쟁, 스탈린 격하 운동, 두 플레이어 모두가 머리를 쥐어뜯게 되는 쿠바 미사일 위기, 아랍-이스라엘 전쟁, 아옌데, 케네디 암살, 빌리 브란트, 고르바초프, 흐루시초프의 ‘우리는 네놈들을 다 파묻어버릴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 양 진영의 우주개발 경쟁까지. 미소 양국의 체제 경쟁 속에 중간에서 새우등 터져나간 많은 나라들의 씁쓸한 역사도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대한민국 나라 전체가 영어 못하면 사람 취급을 안 하는 분위기로 쏠리고 있지만, 정작 외신의 소식, 외국의 시각은 한국에 참 전해지지 않는다. 외국에서 본 한국은 어떤가. 이게 한국에 가장 희귀한 자료 중 하나다. 그래서 외부의 시선으로 한국을 바라보면 무척 묘한 그림이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인이 애써 외면하거나 등잔 밑이 어둡다고 못 보는 그림들을 외부인의 시각으로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황투는 충분히 그럴만한 시각을 보여준다.

게임 속 한국의 모습

한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야 북에서 포를 쏘고 대응 사격을 해도 무덤덤할 지경이다.  조중동 같은 신문들이 ‘전쟁 위기가 닥친다는데 어떻게 당신들은 생필품 사재기도 안하냐. 휴전중인 분단국가에서 당신들은 안보 불감증 있는거 아니냐’는 호들갑을 떨어도 저놈들이 무슨 헛소리를 하나 싶을 정도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 입장에서 이 나라에 포격이 쏟아진다는 말을 들으면 기겁할 일이다. 게임이 비록 89년도까지, 냉전이 한참이던 시기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외국 시각에서 보는 한국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게임 내에서 남북한은 분쟁 지역으로 분류된다. 게임 시스템상 미국과 소련이 배후를 조종해서 그 나라에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데, 일반 국가와 달리 분쟁 지역은 쿠데타 시도만 해도 핵전쟁 위기가 한 칸 악화된다(게임 내에서 상당히 자주 시도되는 수단이다. 칠레의 피노체트를 비롯해서 온갖 ‘쿠우~’가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가지 않는가? 미국과 소련이 각종 ‘쿠우~’의 책임에서 자유롭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앞에서 말했다. 이 게임은 5,4,3,2,핵전쟁이다. 5 이상으로는 평화적으로 회복도 안된다. 심지어 남한 옆의 일본도 분쟁 국가다(중국은 이 게임의 제 3의 주인공이란 말을 들을 만큼 특수한 시스템으로 분류된다. 분쟁 국가는 아니다). 이거 뭐 게임 내내 쳐다보고 있으면 한숨이 절로 나올 만큼 후덜덜한 지역이다.

게임을 해보고 나면 이 말이 절로 나온다. ‘이렇게나 후덜덜한 지역인데 현실 역사에서 ‘쿠우~’가 두 번이나 일어났다는 게 실감이 안날 지경이다’

이 정도로 게임 내 중요한 한반도에 이벤트 카드가 없을 리 없다. 100장이 넘는 카드 중 한반도와 직접적 관련이 있는 카드는 2장이다. 카드의 기능과 함께 게임 규칙 설명서 뒤에 친절하게 붙어있는 역사적 배경 설명을 덧붙인다(영문판 해석이라 의역이 좀 있다. 양해를 바란다).

한국전쟁(영문 카드명 Korean War): 북한이 남한을 침공함. 소련에 밀리터리 오퍼레이션 2 추가(군사 작전을 일으켰을 때 얻는 추가점수다). 주사위를 굴려서 4~6 나오면 침공 성공. 남한 근처에 있는 미국이 통제중인 국가 수만큼 주사위 결과에서 뺌(게임상 남한 근처 국가는 대만과 일본). 침공에 성공하면 소련은 승점 2점을 먹고(게임에서 승점은 미국과 소련이 -20~20 사이를 오고 간다. 누군가 20점을 먹으면 게임 승리)남한에 있던 모든 영향력을 미국 영향력으로 대체한다.

배경: 북한군의 38선 침범으로 촉발된 한국전쟁은 국제 연합에 의해 지목된 첫번째 전쟁이었다. 미국과 남한을 비롯한 15개국이 남한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전투병력을 파견했다. 맥아더의 압록강에 대한 언급은 중국을 도발해서 전쟁을 38선 근처의 시작 상태로 되돌려놓고 말았다.

대한항공 007기 피격사건(영문 카드명 Soviets shoot down KAL-007. 김현희 사건 말고 1983년에 격추당한 그 대한항공 여객기.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으로 검색하면 나온다): 핵전쟁 위협 1단계 악화. 미국은 승점 2점 획득. 미국이 남한을 통제하고 있다면 이 카드의 OP(작전 포인트)만큼 영향력 재분배 시도나 영향력 추가 가능.

배경: 뉴욕에서 남한의 서울로 향하던, 불운한 대한항공 007편은 자동 운항 시스템의 항법상 오류로 인해 소련 영공을 향해 항로를 벗어났다. 소련이 민항기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주장했지만, 여객기를 향해 어떤 경고도 없었음을 밝히는 테이프가 냉전 종료 후 공개되었다. 레이건 정부는 소련에 저항하는 세계적 반응을 끌어모았다 – 심지어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보다 먼저 해독된 암호 메시지를 보기도 했다. 한명의 미국 하원의원이 포함된 269명의 승객과 승무원은 공격에 의해 사망했다.

6.25야 그렇다 쳐도 한국인에게 KAL 007은 잘 아는 사람도 슬슬 드물어지는 사건이다. 물론 게임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이벤트를 선별한 것도 있을 것이고, 게임에 나오냐 나오지 않냐를 두고 서구가 이 사건을 중요하게 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것도 섣부른 판단일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 있다. 한국은 두 강대국이 게임을 하는 판 위의 작은 말, 작은 지점 하나에 불과했다는 사실.

오늘날은 어떤가? 서로간에 포탄이 쏟아지고 전 세계가 한반도를 걱정하는 상황에 자력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자력으로 뭔가를 하려고 노력이나 했는지는 더더욱 의심스럽다. 외교적으로는 존재감이 아예 없다시피 하고(UN사무총장 배출한 게 외교적 국력을 따질 때는 자랑이 아니다), 군사적으로도 국방비를 그렇게나 쏟아부으면서 우는 소리만 하고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최소한 그때보다는 좀 나아져야 하는 것 아닌가? 게임의 큰 주인공인 미소 양국처럼 강대국이 되자는 소리가 아니다. 최소한 분쟁지역에서 벗어나기라도 하던가, 아니면 새로운 이벤트 카드로 등록될 만한 평화적 노력이라도 하던가. 다 제쳐두고 입만 열면 안보 안보 노래를 부르는 나라에서, 이 나라에 실제로 위기 상황이 닥친 건지 아닌지를 미군과 미군 가족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고 알아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어처구없는 일 아닌가? 무려 26년전 역사를 다루는 게임 위의 모습이랑 비교했을 때 오늘날이 하나도 나아진 게 없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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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남태평양에 초대형 괴수가 등장해 오세아니아 대륙을 배에 깔고 엎드리면 이념이고 나발이고 미국 대통령과 소련 서기장이 힘을 합쳐 인류의 존망을 걸고 함께 싸워야 한다. 노회찬 의원이 말하지 않았던가. 한일 관계가 아무리 원수지간이라도 외계인이 나타나면 같이 싸워야 한다고.

특별출연: 필자가 키우는 고양이.







2 thoughts on “보드게임 ‘황혼의 투쟁’으로 본 남북관계

  1. 합의문에 민간교류, 이산가족 상봉, 나중에 회담 등 막 질러놨던데 김종배 씨가 바라본 것처럼 남북이 뭔가 하긴 하는 신호탄이 될 수 있을 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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