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력

난 약점이 하나 있다.

기억력이 졸라 나쁘다. 진짜 신기한 것은 기억력이 몽땅 다 나쁜게 아니고, 특정한 분야에서만 기억력이 바닥을 친다. 그 특정한 분야라는 건 바로..

내가 싫어하거나 관심이 없는 분야.

이게 곰곰 생각해보면 아마 일종의 반항심 같은 건데,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해야 하는 상황에 빠지면 기억력이 갑자기 제로로 수렴한다는 거다.

그 시작은 초등.. 그 때는 국민학교 였다.

4학년인가 5학년인가 그 때 였는데, 갑자기 나보고 학급회장을 하라는 거다. 그거야 뭐 하면 하는 거지. 근데 결정적인 문제는 학급회 시작할 때 국민의례를 해야 되는거다.

애국가 같은 것은 그나마 노래니까 어영부영 다 외우고 있는데,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해야 되는데 그 문구를 도저히 기억을 못하는 거다.

국기에 대해 경례~ 하고 나서 아이들이 모두 가슴에 손을 올리면,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블라블라를 해야 되는데 죽었다 깨나도 이걸 끝까지 다 못외우겠는 거였다. 종이에 적어서 몇번을 외워도 고개만 돌리면 뒷 문장이 기억이 안나고.. 심지어 문장 중간에서 막혀 버리고..

보다 못한 학급 부회장 하던 여자애가 대신 외워주고..

그나마 공부좀 하고 똘똘해 보여서 회장 시켜놨더니 국기에 대한 맹세 그 짧은거 하나를 못 외워서 절절매는 나를 보고 있던 선생님은 또 얼마나 답답했을까?

근데 신기한건 전혀 쪽팔리거나 하질 않았다는 거다. 그냥 내 심정은.. 씨바, 안 외워지는 걸 어쩌라고? 이런거 만든 넘이 나쁜 넘이지.. 하는 생각만 들었던 기억이 난다. 집에와서 부모님한테 그 얘길 했더니,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어 보신다.

–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 아니라고요~~~ 진짜 안 외워진다고요~~

– 학교 들어가기 한참 전에 구구단을 다 외웠던 넘이 왜 그걸 못외워?

– 그거랑 이거랑 다르다고요~~~~

결국 내가 학급회장을 맡았던 한 학기 동안은 학급회의 시간에 국기에 대한 맹세는 부회장이 외우는 걸로 관습이 바뀌어 버렸다.

비슷한 사건이 또 생겼다.

고등학교 들어가서 교련 시간에 총검술 연습을 하는데 그걸 또 못외우는 거다. 개별 동작을 누가 구령을 붙여주면 자세 나오게 각 잡히게 잘 한다. 근데 그 순서를 못 외워. 남들 다 찔러 총~ 하는데 혼자서 막고 돌려쳐~ 하고 있고.

졸라 얻어 맞고 기합받고 해도 또 못 외워. 전체를 방과후에 붙잡아 놓고, 시험 봐서 외운 놈은 집에 보내주고, 못 외운 놈은 계속 연습하게 하는데, 해가 져서 깜깜해져도 못 외워. 전교에서 혼자 남는 상황까지 가 버리니까, 결국은 교련선생님도 포기하고 넌 총검술 하지 마라.. 그러면서 집에 보내주더라.

그건 그나마 약과였다.

나이가 들어 군대에를 갔는데, 훈련소에서 제식훈련 과정 중에 총검술이 또 있다. 씨바.. 나 이거 죽었다 깨나도 못 외우는데..

훈련소 소대장이 나랑 나이가 비슷한 소위 나부랭이 였는데, 어느날 나를 불러다가 진지하게 상담을 하더라.

너 향도(훈련병 중에 반장 같은거.)도 하고 이거저거 하는 거 보면 졸라 똑똑한 넘인데 왜 그그렇게 총검술을 못 외우냐.. 자세도 나쁘지도 않고.. 일부러 그러는 거 아냐?

사실 나도 답답했다. 내가 뭐 의식적으로 군사교육을 반대한다거나 했으면 차라리 사격훈련을 거부하지 뭐 찌질하게 총검술 16개 동작 순서를 못 외우는 척을 하는가 말이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분야의 것들은 그냥 보기만 하면 외운다.

독일어 부정관사도 다 외운다.

아인 아이네스 아이넴 아이넨 아이네 아이너 아이너 아이네 아인 아이네스 아이넴 아인.

정관사도 외운다.

데어 데스 뎀 덴 디 데어 데어 디 다스 데스 뎀 다스 디 데어 덴 디

릴케의 시 같은거 독어 원문으로 아직도 외운다.

Du bist wie eine Blume

so hold und schon und rein..

어.. 이 뒤는 뭐더라? 잊어 버렸다.

물리학 법칙 중에 외울만한게 뭐 있나.

특수상대론에 의한 길이 수축 공식은?

길이 엘투는 엘원 루트 1 마이나스 c 제곱분의 v 제곱.

수학에서 나오는 근의 공식도 아직 외우고 있다.

2a 분에 -b 프라스 마이너스 루트 b 제곱 마이나스 4ac

내가 이거 외우는 거 보고 딸아이가 놀라더라. 아빠는 이거 배운지가 언젠데 아직도 이걸 외워?

루트2의 값은? 1.414213…

파이는? 3.14159265358979…

화학도 마찬가지다.

수헬리베붕 씨엔오에프 네나마알규 피에스염아칼카.. 주기율표 20번 까지다.

또 해볼까? 이거 은근히 재미있네..

크카나마알아철 수구수은백금, 이게 기억이 나다니. ㅎㅎㅎ 금속의 이온화 경향 순서다.

전기공학에서 숫자를 색으로 표현하는 칼라코드 순서도 기억이 난다.

흑갈적오노녹파보회흰 금은.

누구나 다 외우고 있는 조선왕조 임금 순서.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

근데 왜 그런 이상한 특정 분야에 대해서는 기억력이 제로로 떨어져 버리는 걸까?

전화번호 같은거야 예전 유선전화 시대에는 필요한 건 다 외웠다가 요즘 핸펀 시대가 오는 바람에 하나도 못 외우게 되고 말았지만, 그런 상황도 아니고 참 신기한 일이다.

이른바 “선택적 기억력 감퇴증” 뭐 이런 병이라도 걸린거 아닐까?

근데 글을 다 쓰고 다시 읽어보니, 내가 외우고 있는 것들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난 천재였군.

(* 예전에 위트업스 라는 블로그가 있었는데 거기 썼던 글을 옮겨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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