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9일. 호기심 / 노구치 히데요

2015년 11월 9일.

 

[오늘의 음악] 호기심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초콜릿의 단맛을 즐기기보다는 텁텁한 뒷맛을 꺼끌거리면 어른이 되는 걸까. 햄에 튀김과 같은 것을 좋아하는 ‘초딩 입맛’에서 벗어나게 되면 어른이 되는 걸까. 단순히 주민등록증에 찍힌 숫자가 멀어지면 어른이 되는 걸까.

호기심을 잃어버리면 어른이 된다고 생각했다. 무언가를 궁금해하지 않기 시작하면 어른이 된다고 생각했다. 무언가를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언가에 대해 탐구하기를 멈춘다는 뜻이고, 다시 말하자면 ‘덕질’을 멈췄다는 뜻이다. 고로, 우리는 덕질을 그만두는 순간 어른이 되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인류의 모든 진보는 덕질에서부터 시작한다, 라고 나는 단정적으로 확신할 수 있다. 조금 정제된 표현으로 말하면, 인류의 모든 진보는 호기심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궁금증과 질문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세상의 진보를 이끈 수많은 질문들이 있다. 철학적으로는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인간이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옳은 판단이란 무엇인가?” “정의롭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등등.

과학적으로도 여러 질문이 있다.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도는가?” “왜 물건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가?” “지금보다 더 단단한 물체를 만들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물질과 저 물질의 성질은 왜 다른가?” “태양이 빛을 내는 원리는 무엇인가?” 뭐 또 등등.

그리고 이외에도 수많은 것들을 제시할 수 있다. 인류의 모든 학문적 진보는 곧 이런 질문에서부터 시작됐으니까. 사회학, 역사학, 고고학, 공학, 어학, 정치학, 경제학, 외교학, 뭐 모두 마찬가지의 일이다.

그리고 이런 질문들은 어떤 진보를 가져오기 마련이었다. 필연적으로 모든 질문이 진보로 이어진 것은 아니지만, 의미 있는 질문은 의미 있는 진보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지성은 모두 이런 덕력으로 쌓인 지성이다.

호기심을 잃는 순간 인간은 어른이 된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덕질을 그만두는 순간 인간이 어른이 된다고 한다면, 사실 인류가 성장하는 것은 모두 ‘어른’이 되지 못한 덕후들의 작품이 아닌가. 호기심을 잃지 않고 성장한 아이들의 작품이 아닌가.

사실 뭐 인류에 어떤 큰 족적을 남긴다거나, 인류가 살아가는 데 거대한 도움이 되고 싶은 꿈은 내게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인류가 살아가는 데 해악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끝없이 의문하고 끝없이 궁금해하고 호기심을 놓지 못하는, ‘덕후’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다. 어른으로 자라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다.

오늘의 음악, N.EX.T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로 골랐다.

 

 

[오늘의 역사] 노구치 히데요

 

1876년 11월 9일, 노구치 히데요가 출생했다.

 

노구치 히데요

▲ 노구치 히데요 (野口 英世, 1876.11.9 ~ 1928.5.21)

 

노구치 히데요는 일본 후쿠시마 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에는 크게 화상을 입어 손가락에 부상을 입었다. 어찌어찌 수술을 하기는 했지만 화상 자국은 평생 동안 남았다. 그는 이 경험으로 의사가 되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손가락을 수술해 준 의사 와타나베 카나에의 조수로 들어가 어깨너머로 의학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 뒤 정식으로 의학교에 들어갔고, 그는 20살에 의사면허 시험에 합격했다. 공부는 꽤 잘한 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의사 일을 제대로 할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당시 환자들이 노구치가 손에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 때문에 그를 기피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그는 거듭된 수술로 어느 정도 손가락의 기능을 회복한 뒤였지만, 환자들은 그를 선입견으로만 판단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는 환자를 다루는 쪽보다는 기초의학에 힘을 싣기로 결정한다. 세균과 병리학 쪽에 관심을 가진 그는 병을 치료하는 의사에서, 병의 원인을 탐구하는 생리학자로 변신했다.

그는 당시 세계적인 생물학자였던 기타사토 시바사부로 박사의 연구소에 취직했고, 영어를 잘 했던지 논문을 번역하는 일을 도맡아 했다고 한다. 미국의 유명한 의사이자 생물학자인 플렉스너 박사의 통역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일본의 병리학보다 월등히 뛰어난 서양 의학을 접하게 되었다.

노구치는 얼마 뒤 플렉스너 박사에게 편지를 썼고, 이 편지에 감명을 받은 플렉스너는 노구치를 미국으로 불러 연구원으로 채용했다. 그는 플렉스너 박사가 있던 펜실베니아 대학교 연구원으로 일했고, 나중에 플렉스너가 록펠러 연구소로 자리를 옮기자 따라서 자리를 옮겼다.

미국에서 노구치의 연구 성과는 상당했다. 마비에 대한 연구를 했던 그는 ‘스피로헤타’라는 마비를 일으키는 세균을 발견했고 이것이 매독으로부터 발생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후에도 황열병의 원인균을 최초로 발견했고, 그로 인해 노벨 생리의학상 후보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그는 황열병을 직접 연구하기 위해 떠난 아프리카에서 결국 황열병에 감염되는 바람에 1928년에 사망했다. 향년 51세였다. 그는 생전에 20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세균질환 연구에 거대한 역사를 쌓은 학자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면 그를 소개할 리 없다. 그의 사후에 엄청난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살아생전에 했던 연구의 결과는 모두 허구로 밝혀졌다.

우선 미국에 간 것부터 이상했다. 그는 사실 초청을 받아 간 것은 아니었다. 당시 플렉스너 박사가 통역을 해 준 노구치에게 “어려운 일이 있으면 찾아오라”고 말한 것이 화근이었다. 노구치는 플렉스너에게 편지를 썼으나 도움 요청은 거부당했고, 노구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으로 찾아가 플렉스너에게 채용을 요구했다. 플렉스너가 채용을 해 줬으니 문제가 될 것은 없지만, 최소한 노구치가 대단한 업적을 쌓아 초청을 받은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후에 했던 연구에도 이견이 많다. 그의 최대 업적이라고 불리던 황열병의 경우, 그의 사후 황열병을 연구하던 학자들이 그의 연구 결과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조사를 해 보니, 노구치가 발견했다는 병원균은 황열병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세균이라는 점이 밝혀졌다.

이후 조사가 계속됐고 황열병은 세균이 아니라 바이러스가 원인이었음이 드러났다. 노구치가 살던 때의 현미경으로는 바이러스를 발견할 수 없었으므로 그의 연구는 완전한 날조임이 완벽히 드러났다.

이 연구가 날조로 드러나자 학계에서는 노구치의 연구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가 시작됐다. 노구치가 생전에 발견했다고 주장한 소아마비 원인균, 트라코마 원인균, 광견병 원인균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결론이 났다. 소아마비와 트라코마, 광견병은 후일 모두 바이러스가 유발한다는 결론이 났다. 황열병과 같은 이유로 날조임이 드러난 것이다.

실험의 윤리성에 대해서도 비판이 쏟아졌다. 그는 마비 원인균 연구 과정에서 매독 균을 미성년자에게 주입하는 생체 실험을 벌였고, 결국 실험 대상이 된 청소년들의 부모로부터 고소를 당하기도 했었다. 당사자 동의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당시는 매독 치료제도 없던 시절이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반론도 존재한다. 노구치의 시대에는 바이러스의 존재조차 알 수 없었고, 그는 일부러 결과를 날조해 발표한 것이 아니라, 노구치 본인도 이 결과가 진짜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랬다면 이것은 연구의 미숙이지, 그의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스스로가 원인균으로 지목한 병원균이 실제로 병을 일으키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어야 했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단순한 실수였다고 하면, 노구치 히데요의 의학적 업적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노구치 히데요는 2004년부터 일본 1,000엔 권의 모델로 들어갔다. 원래는 나쓰메 소세키가 있던 자리다.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일본은 아무런 과학적 업적도 남기지 못한 과학자 한 명을, 나쁘게 해석하면 날조를 일삼은 사기꾼 과학자를 화폐 모델로 세운 것이다. 그것도 일본 현대문학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나쓰메 소세키를 밀어내고 말이다.

 

노구치 히데요 1000엔

▲ 1000엔권에 들어간 노구치 히데요.

 

진정한 ‘긍정 사관’이란 이런 것일까. 뭐 아무튼 업적이 있을 수도 있는 사람을, 아니 과거에는 있었다고 착각했던 사람을 1,000엔 권 모델로까지 만드는 일본의 ‘비정상의 정상화’를 본받기로 하자.

 

 

※ 이 글의 참조문헌과 사진의 출처는 widerstand365.tistory.com/796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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