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수능생들에게

 

세상의 모든 수능생들에게

 

오늘이 벌써 수능 전날이라고 하네요. 어제 마지막 야자는 잘 마치셨나요. 칠판 한 쪽의 디데이를 써 놓은 곳은 D-1이 됐겠군요. 아, 혹시 모교가 수능 시험장이라면 모두 지워야만 했겠지만요. ‘수능 예비소집일’이라는 표현도 익숙하시리라 믿습니다. 학교는 일찍 끝났겠네요. 수능 시험 볼 장소는 한 번 슥 둘러보고 오셨나요. 혹시 지금이라도 여유가 있다면 한 번 산책 삼아 둘러보고 오시는 것도 좋을 겁니다.

오늘이 빼빼로데이라는데, 빼빼로는 많이 받으셨나요. 고3 수험생들에게는 항상 선물이 넘쳐나기 마련인 것 같습니다. 사람 만나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저도, 엿이나 초콜릿 같은 선물을 너무 많이 받아서, 수능 끝나고 한 달 뒤까지 초콜릿을 입에 달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작년에 수능을 본 대학교 1학년 학생입니다. 운이 좋게도 수능을 한 번만 볼 수 있었죠. 그래서일까요, 오늘 하루는 내일 수능을 보지 않는 저에게도 특별히 느껴집니다. 지나가다가 고3으로 보이는 학생들을 몇 봤는데, 저까지 가슴이 두근두근 하는 것은 왜일까요.

저도 작년 이맘때, 그러니까 제가 수능을 보기 전날이 기억이 납니다. 뻣뻣하게 긴장된 상태에 수많은 감정들이 나를 감싸는데, 대부분의 감정은 아마 ‘불안’이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이제까지 수험생활을 잘 해 왔는지에 대한 불안, 내일 수능을 잘 볼지에 대한 불안, 수능 이후에 대한 불안까지 말이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수험 생활을 그렇게 성실하게 한 편은 아니었습니다. 불안감이 더 드는 것은 그래서였을까요. 팟캐스트 몇 번씩 반복해서 듣지 말고 공부를 했어야 하는 걸까, 아침에는 라디오을 듣지 말고 책을 폈어야 하는 걸까, 밤에 트위터 하는 것보다는 공부를 할 걸 그랬나, 자습 시간에 도망이 일상이 된 것은 너무했던 걸까, 뭐 이런 저런 생각들이요.

 

야간자율학습

 

묻고 싶은 질문이 많습니다. 지금쯤 1년 동안의 수험 생활을 온전히 돌이켜보고 있을 여러분은, 어떤 수험 생활을 보내셨나요. 공부는 열심히 하셨나요. 목표의식은 뚜렷하셨나요. 그리고 무엇보다, 1년 동안 즐거우셨나요.

하지만 지금은 다른 질문은 제쳐두고 한 질문만 던지기로 하겠습니다. 1년 동안 여러분은 내일을 위한 지식을 쌓으셨나요, 아니면 평생을 위한 지식을 쌓으셨나요.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이고, 저는 여러분이 여러분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판단으로 수능에 도전하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일을 위한 지식’은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지만 우리도 사람인지라, ‘내일을 위한 지식’을 쌓는 일만 1년을 하기에는 따분해서 견딜 수가 없지요.

‘평생을 위한 지식’이 ‘내일을 위한 지식’과 일치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있더랍니다. 수학 공식이나 과학 원리를 ‘덕질’ 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있더랍니다. 운이 좋은 사람들이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은 우리는, 오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필요도 있는 것 같습니다. 1년 동안 나는 얼마만큼의 ‘내일을 위한 지식’과 ‘평생을 위한 지식’을 쌓았는지 말이죠.

여러분의 답이 어느 쪽이든 제가 관여할 바는 아닙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나름대로의 합리적 균형을 찾으셨겠죠. 그게 합리적인지 아닌지는 제가 판단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고, 판단해서도 안 되는 부분입니다.

어떤 분은 ‘내일을 위한 지식’에만 몰두하셨겠지요. 열심히 하셨네요. 저라면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은 데 말이지요. 대단합니다. ‘평생을 위한 지식’에만 몰두하신 분도 있겠지요. 역시나 열심히 하셨을 겁니다. 세상의 눈을 피하는 것과 세상의 말을 견디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닐텐데 말입니다. 가운데에 계시는 분도 있을 겁니다. 현명하신 분이지요. 둘 모두를 선택해 진행한다는 일은 제겐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거든요.

아무튼, 모쪼록 여러분이 여러분 나름의 균형을 잘 찾으셨기를, 하고 바랄 따름입니다.

제 이야기를 하나 꺼내 보겠습니다.

수능을 본 지 꽤나 시간이 흐른 분들은 의외로 잘 모르시던데, 수능 시험장에는 시계가 없습니다. 자기가 직접 손목시계를 챙겨 가야 합니다. 그래서 수능 시험이 다가오면 선생님들이 항상 시계 챙겨라, 시계 챙겨라 백만 번은 말씀하시죠. 수험표는 안 챙겨가도 임시수험표 발급이 가능하고, 필기구는 시험장에서 준다지만 시계는 그게 안 되거든요.

 

수능 시계

 

그런데도 시험장에 시계를 안 챙겨간 붕신이 있으니, 그게 바로 접니다. 시험장에 가서 그걸 알았는데, 아, 멘붕이더군요. 뭐, 그래도 별 수 있습니까. 그냥 남은 시간을 모르고 시험을 봤습니다. 다행히 시간 때문에 시험을 망치는 일은 없었습니다.

수능 시험을 마치고 저는 한참을 걸었습니다. 왜인지 모르게 그냥 그 밤거리가 걷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강변을 지나가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모두들 시계 챙겨라, 시계 챙겨라 하면서 시계 없이는 수능을 보지 못할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사실 시계를 챙기지 않고도 무리 없이 시험을 치를 수도 있더라구요.

어쩌면 삶 전체를 이 시험에 비유할 수 있다고도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학벌이 필요하다, 스펙이 필요하다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것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것 아닐까, 하고 말이지요. 세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쩌면 허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시험장에 들어서는 여러분이 쓸데없는 곳에 각오를 걸고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나름의 이유로 시험장에 들어가고 있으시리라 믿습니다. 남들이 다 하니까 나도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시험장에 들어가지는 않으시리라고 믿습니다. 무언가 이루고 싶은 것을 위해 가장 현명하고 합리적인 방법을 선택하셨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여러분의 건투를 빕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꿈으로 향하는 수많은 길이 있고, 여러분은 그 길 중 하나를 선택하셨던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선택한 그 길이 우연히도 가장 보편적이고 널리 알려진 길이었을 뿐이지요.

그러니 우선은 이 길을 건너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시되, 길이 막히더라도 너무 실망하지는 마시라는 말씀입니다. 한 길이 막히면 다시 한 번 머리를 굴리면 되지요. 다른 길을 선택해 볼까, 아니면 다시 한 번 이 길을 뚫어볼까, 하구요. 다시 합리적 판단을 하시면 되는 겁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아주 잘 해냈던 그것을 말이지요.

자기는 원하는 대학에 간 주제에 말이 많다고 생각하시나요. 뭐 그렇게 생각하시면 어쩔 수 없습니다. 사실 맞는 말이니까요. 만약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저는 골방에 찌그러져서 여러분의 건투를 조용히 기원하고 있겠습니다.

어떤 생각으로 지금 오늘, 수능 전날에 다다르셨더라도, 수고 정말 많이 하셨습니다. 수능을 목표로 1년을 준비한다는 것은 정말로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적어도 저의 경험은 그랬습니다.

 

수능 성적표

 

수능이 끝나면 무얼 하실 생각이신가요.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3개월 동안은 온전히 여러분의 시간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입니다. 너무 시간이 많아 무료하기도 하고, 남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잉여로운 시간이지요. 한국에서 죄책감 없는 잉여로움을 얻기는 참 어려운 일인데, 지금까지 잘 해낸 보상 정도로 받아들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3개월 동안 어떤 일을 할지 찬찬히 고민해 보는 것도 오늘 하루를 보내는 좋은 방법이실 겁니다. 공부를 하시는 것도 좋겠습니다만, 눈앞에 있는 해방의 고지를 바라보며 하루를 즐기는 것도 좋은 방법이실 겁니다. 저는 수능 전날, 전주에서 고등학교 3년을 보내며 눈앞에 두고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경기전에 다녀왔습니다. 여러분도 잠깐 어디를 다녔다 오는 것도 좋겠습니다. 1년 동안 마땅한 여가를 즐기시지도 못했을 테니까요.

마지막으로 어떤 응원을 보내야 할지 참 많이 고민했습니다. 단순히 “수능 잘 보세요”라고 말하기에는 무책임합니다. 수능은 어쨌든 상대평가인지라 모두가 잘 보면 안 되는 시험이지요. 잔인하지만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노력한 만큼 성적이 나오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조금 양심에 찔립니다. 사실 저는 노력한 것 이상으로 수능 성적이 잘 나온 케이스였거든요. 그렇다고 “노력한 것 이상으로 잘 나오기를 바랍니다”라고 할 수도 없고 말이죠.

그냥 이렇게 끝내겠습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생각해 찾아온 답이 ‘수능을 잘 보는 것’이라면, 저는 여러분의 선전을 기원하겠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답이 수능이 아닌 다른 방향을 향한다면, 저는 다시 그 쪽으로 방향을 틀어 힘껏 박수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너무 큰 결기나 결심, 각오를 품고 가시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세상에는 수능보다 멋진 일이 아주 많고, 결기와 결심과 각오는 아껴 두었다가 더 멋진 일에 사용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만 시험장에 들어가신 이상, 열심히는 해 봅시다. 세상에 잘 봐서 욕먹는 시험은 운전면허 필기시험 말고는 없더라구요.

모쪼록,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내일 저처럼 뭐 하나 빠뜨리고 가시는 일은 없으셨으면 좋겠네요. 수험표, 신분증 그리고 시계는 꼭 챙기시고, 무엇보다 이성의 끈은 꼭 챙겨서 붙들고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만 줄이겠습니다.

 

OMR 카드

 

 

추신.

제목을 뭐라고 정해야 할지 한참 고민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고3들에게”라고 하려고 했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세상에는 수능을 보지 않는 고등학교 3학년도 얼마나 많은데요. 제 주변에도 한 명이 있네요.

그렇다고 “세상의 모든 열아홉에게”라고 하기에는 조금 그렇습니다. 수능을 보는 이들 중에는 열아홉 살이 아닌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데요. 조기졸업을 예정하고 있는 학생들도 있을 거고, 무엇보다 재수생과 삼수생들이 있지요. 제 친구들 중에도 아마 많을 겁니다.

“세상의 모든 수능생들에게”라고 제목을 정하긴 했지만 사실 별로 만족스럽진 않습니다. 수능을 보는 이들에게만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거든요. 세상에는 수능을 보지 않고도 나름의 멋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많지요.

거기에 이번에는 수능을 보지 못하고 떠나가 버린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세월호 참사에서 희생된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금요일에 돌아와 주었다면 지금쯤 수능을 함께 보고 있었을 겁니다. 함께 웃고 떠들다가 긴장된 표정으로 시험장에 입장했겠지요. 누군가는 시험을 잘 봤다며 웃고, 누군가는 시험을 망쳤다며 울상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그럴 일이 없다니 슬픔이 더욱 생생해집니다. 올해 수능생이 가장 줄어든 도시가 경기도 안산이었다는 가슴 아픈 소식도 들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응원이 필요할 때는 응원을, 위로가 필요할 때는 위로를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응원이 필요한 이에게는 힘껏 박수를, 위로가 필요한 이에게는 함께하는 눈물을 보내주고 싶은 오늘, 수능 전날입니다.

 







1 thought on “세상의 모든 수능생들에게

  1. ‘후생가외’라더니,
    비더님이 대학교 1학년일 줄이야…!!!
    항상 비더님 글 잘 읽고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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